주름 잡힌 지층, 유동하는 마음이 형태로 드러날 때…
미술평론가 최태만
김문규의 작품에는 지극히 인공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이 공존한다. 먼저 인공적이란 잘 정돈된 원(圓), 원통형 기둥, 구(球), 기하학적 입방체 등 그가 대리석이나 나무 등을 가공하여 만든 형태에서 발견할 수 있는 특징이다. 그런 반면 형태적 완결성이 돋보이는 그 속으로부터 분출하는 역동적 에너지를 암시하는 추상 표현적 격렬함은 자연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운동을 떠올리게 만든다. 예컨대 <에너지041>(2004)을 보면 정원에 가까운 원반이 지닌 견고한 형태는 그 내부로부터 일어나고 있는 균열에 의해 안정과 동요, 질서와 파장이란 서로 대비되는 두 요소가 결합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외부의 윤곽선이 지닌 확고하면서 분명한 경계에 비하면 내부로 수렴되거나 혹은 외부로 팽창하는 에너지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거친 질감과 형태는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거나 혹은 내부에 응집된 운동에너지가 폭발하며 밖으로 분출하는 듯한 긴장을 불러일으킨다. 대리석이 지닌 투명할 정도로 깨끗한 물성과 사포로 정밀하게 마감한 표면의 부드러움은 이 흡입과 팽창의 에너지에 의해 파열된다. 파열이란 안정을 흩어놓는 것이지만 완파가 아닌 균열이며 이것은 대지에 잡힌 주름과도 연결된다. 대지에 패인 홈, 균열, 주름은 대리석에 새긴 상처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빛과 공기의 흐름을 이끌어 내거나 순환시키는 생명의 길이자 그 흔적이기도 하다. 그것은 또한 퇴적된 시간의 흔적이며 형태가 생성, 변화, 소멸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시각적 파노라마는 더욱 구체화되고 풍요로워진다.
만약 이 에너지의 방향이 원의 중심을 향해 빨려 들어가는 구심력으로 작용한다면 그 속에 뚫린 구멍은 블랙홀일 수 있고, 밖으로 확산하는 원심력을 상징한다면 그 구멍은 격렬한 운동 내부에 고요 즉 태풍의 눈과 같은 것으로 비쳐질 수도 있다. 이것이 비록 시각적 현상에 의해 야기된 심리적 반응이라고 할지라도 재료에 과도하게 가해진 손길 때문에 자칫 공예적으로 보일 수 있는 작품의 시각적 내용을 풍부하게 만드는 것임에 분명하다. 현대미술의 맥락에서도 이 작품은 미니멀 아트의 차갑고 냉정한 형태와 추상표현주의의 주관적 감정의 표출이란 상반된 특징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까닭에 ‘특수한 사물(specific object)’이나 ‘생생한 형태(forme vivante)’의 어느 측면에 기울어진 것이 아닌, 이 두 요소가 충돌하며 서로를 긴장상태로 강화하거나 조화롭게 통합되는 제3의 대안을 지향하고 있다. 이를테면 <에너지Ⅱ>(2006)의 경우 순환하는 고리로 표현된 형태는 매끈한 표면과 거친 질감을 동시에 지닌 채 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에너지의 운동을 보여준다. 표면은 계란의 껍데기처럼 완전성을 지향하고 있으나 구(球)가 해체되어가는 과정 또는 띠를 이용하여 공간을 하나의 구로 포장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듯한 이 작품은 따라서 운동의 연속성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것은 멈춤 즉, 형태의 자기완결성에의 안착이 아니라 움직임이며 내부에 뚫린 큰 구멍으로 인해 이 운동에너지는 시각적으로 더욱 강화된다. <에너지Ⅴ>(2003)에서 운동에너지는 더욱 가속적이다. 특히 내부에 난 구멍은 작품 자체에 내재한 공간과 그것을 둘러싼 공간을 활성화하며 비어있지만 곧 채워질 상태에 대해 암시한다. 아니면 역으로 채워진 공간이 점진적으로 비워질 수 있음을 암시한다고 할 수도 있다. 이 작품에서도 주름진 표면은 서로 섞여 하나의 덩어리를 이루는가 하면 그것으로부터 흘러나온 띠들이 일정한 방향으로 구의 외곽을 감싸며 작품이 어느 정도의 크기까지 확산될 수 있는 가능성을 드러낸다. 여기에서 이 작품의 형태는 완결이 아니라 과정임을 드러낸다. 이 작품에서도 원심점에 뚫린 구멍은 태풍의 눈일 수도 있고 미궁일 수도 있고 우리의 시선이 빨려 들어가는 미지의 영역일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때로 그는 채석장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자투리 판석들, 부분적으로 오랜 시간에 걸쳐 땅에 묻혀 있었기 때문에 어느 부분이 점차 화석으로 변해가는 불그스레한 표면을 지닌 돌의 우연적 형태를 그대로 가공하여 작품을 제작하기도 한다. 이 경우 측면은 채굴 당시의 거친 표면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나 넓은 면은 깔끔하게 다듬고 그 속에 무수한 균열과 특유의 질감을 지닌 표면을 만들기 때문에 이 관계는 역전된다. 즉 돌덩어리의 우연적이고 자연스러운 윤곽선과 그 내부의 매우 집요하고 정밀하게 계획된 주름진 형태에서 그러한 역전관계를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인공성이 지닌 이 대립된 두 요소는 서로를 간섭하지 않고 단일하며 정돈된 형태 속에 통합되고 있다.
<에너지Ⅲ>(2006)에서 평평하게 펼쳐진 표면과 그 내부에 복잡하게 주름 잡혀 있거나 혹은 상처처럼 패인 자국은 누적된 시간의 증거인 지층을 연상케 만든다. 돌출과 함몰, 넓은 평원 위에 느닷없이 나타나는 산맥처럼 예리하게 융기한 부위와 움푹 들어가거나 혹은 아예 구멍 뚫린 공간은 넓은 평면의 휴지(休止), 안정성, 질서를 일정한 방향을 지닌 채 지각변동을 일으키는 에너지의 흐름과 그 결과를 보여준다. 그것은 대지나 단애(斷崖)의 표면을 떠올리게 만들지만 혼동, 무질서가 아니라 질서 속의 변화를 드러내는 까닭에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된 암벽의 피부를 떠올리게 만들기도 한다. 이 작품의 피부는 그러나 얼어붙은 것, 즉 응고가 아닌 유동이며 그런 점에서 그의 작품의 표면은 생성 중에 있는 것이자 시간과 운동에너지에 의해 주름 잡힌 지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질에 대한 가공이 과도하기는 하지만 그의 작품의 모티브는 주로 자연으로부터 추출된 것이다. ‘빛’으로부터 ‘생’을 거쳐 ‘에너지’에 이르기까지 그가 추구하고 있는 세계는 자연으로부터 물려받은 모티브를 추상화하는 것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구체적인 형태를 지닌 대상을 재현한 것이 아니라 빛, 공기, 물, 바람 등을 추상적 형태로 표현한 것이다. 이런 점은 그의 관심이 뭔가 근원적인 것으로 향하고 있음을 밝혀준다. 빛은 비록 질량을 가진 것이 아니지만 대리석이나 나무를 통해 그것을 방출되는 에너지로 표현하고 있는 바 그것에서 종교적 신비에까지 도달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식을 추적할 수 있다.
단순하고 명징한 외양에 비해 복잡한 내부는 오묘하고 변화무쌍한 자연의 한 단면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임에 분명하지만 형태와 기법의 세련이 오히려 작품을 장식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가 될 정도이다. 더욱이 재료가 지닌 물성을 거스르는 기량의 탁월성이 재료에 대한 기술의 승리를 확정하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은 우리의 신체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으로부터 크게는 우주공간, 더 나아가 그것을 넘어서는 관념의 세계까지 형태로 표현하려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그가 표현하고자 한 에너지는 우리가 살아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호흡이자 대지의 숨결이며 삶의 역동성 자체이다. 대리석의 투명하도록 아름다운 표면을 통해 우리는 숨을 쉬고 있는 시간을 본다. 그의 작품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하다. 만물은 유전(流轉)한다. 그러나 유전하는 것은 만물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다. 이 형태는 바로 유동하고 있는 우리의 마음이다.(최태만/미술평론가)
– 장소 : 해운대아트센터
– 일시 : 2014. 12. 4 – 1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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