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영재(吳榮在) 회고전(回顧展)
– 고일(高逸)과 초연(超然)으로 구현된 피안적(彼岸的) 적멸경(寂滅境) –
김동화(金東華)
2008년 7월, 해운대에 있던 갤러리 솔거에서 오영재 화백의 회고전이 열린 바 있었다. 당시 화가의 미망인(황금자 여사)이 소장하고 있던 409점의 작품들을 양산 법기의 작업실에서 전부 가져와 166점을 전시장 벽에 걸었다. 그 중 대부분은 곡면(曲面)과 난색(暖色)으로 구성된 ‘파라다이스(Paradise)’ 연작이었으나, 서명이 없는 기하학적 추상작업들과, 각면(角面)과 한색(寒色)으로 구성된 1990년대 이전 작품들도 여러 점 눈에 띄었다. 면분할 방식의 구상계열 풍경화와 인물화(구작)들도 일부 섞여 있었다.
혹자는 화가의 1980년대 작품 속 푸른 계열의 차가운 색채와 곧게 뻗은 직선은 영도 바닷가의 거친 파도에서, 1990년대 작품 속 붉은 계열의 온화한 색채와 부드러운 곡선은 법기 수원지의 잔잔한 물결에서 옮겨온 것이라 이야기하기도 한다(그는 1985년까지는 부산의 영도 청학동에서, 1985년부터는 양산의 법기 수원지 근처에서 살았다).
그 때의 전시장에서 작품 ‘풍경-수원지(1976)’에 유독 시선이 끌린 것은 연록의 색조와 고요한 물결이 마치 녹음처럼 싱그럽고 얼음처럼 투명했기 때문이었다. 차고 맑은 추수(秋水)에 가녀린 소녀의 청안(淸顔)을 씻는 듯한 청신함이 돋보여, 작가의 깨끗한 품성까지도 화포 위로 환하게 번지는 것 같았다. ‘풍경-수원지’의 물과 숲의 분위기, 빵과 사과를 그린 정물화(1949)의 구도와 색채, 항아리를 그린 작품에서의 질감 및 색조 등에서는 스승인 손일봉(孫一峰) 화백의 영향이 남아있으면서도, 한편으로 자기만의 독특한 감각과 화면 해석이 살아있어 구태를 벗은 참신함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스승의 그림 위에 반투명의 색유리 한 장을 살짝 더 끼워 넣은 듯, 번뜩이지 않는 투명한 분위기가 화면 깊숙이 스며들어 있었다.
부산과 경남 지역 색면추상 회화의 선구자적 역할을 담당했던 화가는 1923년 전남 화순에서 태어나 일본 도쿄의 아사카다니(阿佐賀谷) 미술학원에서 수학했고, 1953년에 경주예술학교 회화과를 졸업했다. 그는 자신의 작품세계의 변천을
1. 사실주의적 습작 과정의 제작 (1943-1960)
2. 구상화풍의 주된 제작에 겸해서 추상작품 시도 제작 (1961-1980)
3. 추상작품의 주된 제작에 겸해서 구상화 제작 (1981-1988)
4. 정리된 결과로서 일관되게 추상작품 제작 (1989-)
이상의 4단계로 요약했는데, 화가의 작품세계를 연대기적으로 이해하는데 이 구분은 상당히 유용하다. 또 그는 자신과 피카소의 작품을 비교하며 자신의 예술세계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기도 했다.
피카소는 여러 방향에서 본 어떤 대상을 해체하여 한 장면으로 재구성한 구상적 입체주의 화풍을 성립시켰다. 나의 경우, 인간을 포함한 대자연의 대상을 해체하여 한 장면 상징성으로 재구성하는 추상적 입체주의의 방법을 갖는다. 그것에 자연이 지닌 영적이자 미적 절대성을 인간적 체질화로 전위(轉位)하는 경우, 사랑의 정회(情懷)가 다양적 형세로 작용하여 이루는 인간 상호간의 진실된 삶의 교화기류(交和氣流)가 인간의 본질적 소망인 자유+평화+행복=낙원이 되는 보람을 차지하게 된다는 나 나름의 자각에서, 작품상 표현의 주제는 자유+평화+행복=낙원이며, 이러한 근거에서 작품의 명제로서 파라다이스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는 화가로서 일평생 가난을 숙명처럼 짊어지고 살았다. 그림 외에는 아무 것도 몰랐고 관심도 없었기에, 처자들이 겪은 생활고는 필설로 다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영도 청학동의 달동네 셋집에 살면서 생계가 핍절했을 때, 한 화랑 주인이 찾아와 선금을 주면서 이해하기 어려운 색면추상 작품 말고 애호가들에게 팔릴 수 있는 구작을 다시 그려달라고 요청했다는데, 화가는 석 달 동안 단 한 점의 그림도 그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는 작가적 신념과 현실의 선호도가 상충할 때 그 둘 사이에서 적당히 타협하거나 절충할 줄을 몰랐던 심지가 곧은 사람이었고, 그림을 돈이나 명예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할 줄 몰랐던 진정한 예인이었으며, 미술 애호가들의 눈높이를 따르기보다 자신의 예술적 신념을 투철하게 견지해 온 천생의 작가였다. 작품의 완성도에 대한 엄격함 때문에 첫 개인전을 환갑이 지나서야 열었고, 1999년 작고할 때까지, 일평생 개인전을 단 두 차례만 가졌을 뿐이었다. 생전의 화가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의 성실함과 과묵하고 꼼꼼했던 성격 그리고 소설을 집필할 만큼 뛰어났던 문재(文才), 미술 이론에 대한 깊은 조예 등을 회고하기도 했다.
전시장에 있던 수많은 그림들 중에서도 그의 작업의 원천을 짐작해 볼 수 있게 하는 드로잉적 성격의 작품들은 채 열 점이 안 될 정도로 적었고, 풍경을 그린 수채화를 모두 포함한다 해도 스무 점 남짓이 전부였다. 그 중 이채로운 작품은 1960년대 초반에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사각상자’ 라는 제목의 수채 드로잉이었다. 육면체를 그린 이 작품의 고아하게 곰삭은 갈색조의 색감과 명확하고 단순한 형태가 내 마음을 한순간에 사로잡았다. 지적인 느낌을 강하게 풍기는 이 드로잉은 면분할의 구상계열 작품들과 파라다이스 연작들의 시원과도 같은 도상이다. 이 작품들은 모두 색면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색면의 기본형은 바로 직육면체 혹은 입방체이기 때문이다. 즉, 작품 ‘사각상자’는 색면의 기하학적 최소단위만을 화면에 옮겨서 형태와 명암의 연구를 시도한, 일련의 조형적 퇴고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매우 중요한 작품인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것은 화가의 추상적 회화세계의 원형을 담고 있는 일종의 컨셉트 드로잉(concept drawing)인 셈이다.
또 다른 그림 ‘파라다이스’는 색채 없이 명암만 달리한 면분할적 컴포지션이다. 필자가 부산공간화랑 신옥진(辛沃陳) 사장님께 “이 그림은 도무지 상하와 좌우를 분간할 수 없다”고 말했더니, 신 사장 왈(曰), ‘파라다이스’를 그리고 서명을 하기 직전에 내가 “오 선생님 작품은 어디가 위쪽이고 어디가 아래쪽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고 말하자, 오 선생이 “내 그림은 사면 어디서 보아도 다 작품이 되지”라고 대답하며 빙긋이 웃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 그런데 유채로 그린 ‘파라다이스’보다 이게 오히려 더 아르카익(archaic)한 느낌이 있었다. 사실 만년에 그린 ‘파라다이스’ 유화는 세상에 대단히 많지만, 흑백의 콘테로 그린 작업은 전시장의 전체 작품 중에서도 이것이 유일했다. ‘파라다이스’ 연작을 시작하면서 작업의 발상을 조형으로 전환해 본 최초의 에스키스일 수도 있고, 유화 물감이 아닌 다른 재료로의 매체실험을 시도한 것일 수도 있다. 단순한 가운데 변이가 있고 정지태와 가동태가 서로 맞물려 있어, 오래 보아도 질리지 않는 격조를 자랑한다. ‘파라다이스’ 유채(油彩) 연작들은 가난과 척박한 현실을 벗어나 자유, 평화, 행복을 통해 낙원에 이르고자 하는 작가의 염원과 이상을 간직하고 있으며, 단호, 선명, 예민한 색면들의 에지(edge) 처리와 작가의 섬세한 숨결을 느끼게 하는 정밀(靜謐)한 붓질의 흔적은 고결한 기품과 대가적 풍모에 촌치의 미달조차도 허(許)하지 않는다.
또 다른 한 점의 작품은 스테인리스 반합을 연필로 정밀하게 그린 데생인데, 물통의 표면에 부딪힌 빛의 비산(飛散)을 예리하게 묘사한 것이 특징적이다. 표면의 기둥처럼 생긴 형태는, 이후 풍경을 면분할로 해석하는 유채 작품 속 각면체의 그것과도 유사했다.
나머지 한 점인 ‘무제’는 종이에 양면으로 그려져 있는데, 전면은 1961년작 수채화이고, 후면은 1974년작 유화이다. 여기서 특별히 언급할 부분은 전면인데, 이 수채화는 지금까지 알려진 화가의 추상작업 전체를 통틀어 제작의 연기(年記)가 가장 상한으로 추정되는 매우 중요한 작품이다. 이 작품 속에는 삼각형, 사각형 등의 다양한 직선적 형태소들과 적색, 녹색, 청색, 황색 등 한란(寒暖)의 다종한 색채소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들 형태소와 색채소를 결합시키는 최초의 시도는 이후 추상작업이 분화, 진행되어 나가기 전의 가장 순수한 조형적 원형을 보여주고 있다. 색채소의 관점에서 볼 때, 이후 제작의 시기별로 다르게 나타나는 한색과 난색 모두가 이 한 작품 속에서 구유되고 있으며, 형태소의 관점에서 볼 때, 비록 초기 작업에서 등장하는 각면 중심의 구성과는 달리 후기 작업의 구성이 주로 곡면으로 이루어졌다고는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이 곡면이 꼭짓점 없는 원형을 이루는 방식이 아닌, 도형 내부에 꼭짓점들이 존재하는 상태에서 각 선분들만 곡선으로 구성되어지는 것이기에, 결국은 직선으로 이루어진 삼각형이나 사각형 같은 도형들의 곡선화된 변이에 다름 아닌 것이다. 즉 형태 측면에서 볼 때, 후기 작품은 초기 작품의 직선 요소들을 곡화시킨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 작품은 화가의 전체 작업의 통시적 양상 모두를 자신 안에 혼일융회(混一融會)하고 있는 대단한 문제작이라 할 수 있다. 암색 계열이 주조를 이루고 있는 세련된 색채의 사용과 예리한 도형들이 서로 부딪히며 만들어내는 구성의 역동성은 화가가 지닌 탁월한 조형적 감각과 역량을 여실히 증명하고도 남는다.
이 외에 이번 미광화랑 전시에 새롭게 출품된 ‘원질(原質, 1981)’의 경우는 화가가 1980년대에 주로 제작하던, 날카롭게 각이 진 기하학적 도상들을 연필로 섬세하게 음영 처리한 작업이다. 이는 당시 화가가 진행하던 작업의 구성과 형태감을 잘 보여주고 있는데, 사각사각 거리며 종이를 스치고 지나가는 연필심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감칠맛 나는 필촉의 예민함이 특히 돋보인다. 보통의 드로잉들에 비해 거의 강박적이라 할 만큼 정교함이 발휘된 이 작품의 제목에서 우리는 화가가 추구했던 ‘순수한 본래적인 바탕’ – 화가 자신은 이것을 ‘이성화 정신작용’ 또는 ‘지정의(知情意)의 평균 작용성’이라는 용어로 설명하는데, 자연은 지정의적 분할이 없는 절대적 통일성으로 그 내면이 조화되어 있으며, 이러한 자연의 속성처럼 분할이 없는 인간의 평균 작용성을 이성이라 정의했다. 이러한 자연의 완전함에 근접하려는 인간의 모습은 <중용(中庸)>에 나오는 ‘誠者 天之道也 誠之者 人之道也 (誠(성)은 하늘의 道(도)이고 誠(성)을 행하는 것은 사람의 道(도)이다)’ 라는 구절을 연상케 한다 – 에 대한 깊은 관심을 느껴볼 수 있으며, 이러한 바탕들의 집적으로 구축해 낸 세계를 휘어진 입체들로 묘사하면서, 양감이 느껴지는 강력한 형상으로 상징화시켜 표현해 내고 있다. 화가는 자신의 작업을 설명하면서 ‘구조주의’라는 개념을 도입하고 있는데, 구조주의에는 ‘변화에 치우친 것에 통일을 있게 하고, 통일에 치우친 것에 변화를 주어, 변화 중 통일, 통일 중 변화가 있는 가운데 균형이 잡혀 조화적 분위기를 있게 하는 적극적 전개능력’이라는 내의(內意)가 있음을 명확히 적시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바탕에서 시간성과 공간성을 종합한 종합성(자연, 인간, 문화의 종합)으로 현재를 기반한 문제해결을 통해 보편성으로 나아가는 예술을 지향했다. 주객의 한계를 없애고, 이상과 현실, 현재와 과거와 미래를 종합해 그 중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다는 그의 예술적 지향은 바로 중용을 의미하며, 복합적인 것의 균형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동(動, 변화)과 정(靜, 통일)의 조화적 개념이 관련된다고도 볼 수 있다. 1981년은 구상을 주로 하던 시기를 지나 화가의 추상작업이 본격화되기 시작하던 시점으로, 이 작품이야말로 1980년대 전반기 작업의 전형적 도상과 사유의 양상을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컨셉트 드로잉이기도 하다.
화가는 1984년 12월에 열렸던 제1회 개인전(유화랑) 전시도록에 ‘1980년 후반 무렵부터 현재 하고 있는 추상형식의 실마리가 생겨졌는데, 추상화를 꼭 그린다거나 그와 같은 형식을 갖는다는 의도나 계획은 전혀 없었다. 따라서 나 자신도 어쩔 수 없는 경황에서 스스로 그렇게 되어버렸다’ 라고 자술한 바 있다. 또한 그는 ‘제작을 해 가는데 있어서의 정신적 태도로는 시종여관 무계획의 중화입장(中和立場)에서 직관적 전개방향을 지켜갔으며, 따라서 제작이 끝나야만 결과를 알게 되는 것으로 결말 되고 있다’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조형적인 프로세스가 극도로 치밀하게 진행되어진 것처럼 보이는 그 작품 자체의 드러난 외표와는 너무나도 다르게 화가 자신이 ‘무계획’과 ‘중화’, ‘직관적 전개’를 중시했다고 서술한 점은 그의 내면적 정신세계를 파악하는데 대단히 중요하다. 이것은 그 외현의 서구적 요소에도 불구하고 왜 그의 작업 속에 그토록 깊은 동양적 감흥이 서려 있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 가장 핵심적인 열쇠가 되기 때문이다. 또한 ‘의도와 계획을 갖지 않았음에도 나 자신도 어쩔 수 없이 스스로 그렇게’ 추상의 형식으로 진척되었다는 언급 역시 서구미술이 추구한 이지적 조형의지 이상의 어떤 선적(禪的) 경지에 대한 희미한 힌트가 암시되고 있는 것이다. 전반적으로 이 시기의 작업에서는 색채와 형태의 조화를 통한 시각적 세련미가 잘 구사되고 있으며, 색채 구획 중 한두 곳 혹은 서너 곳을 여백으로 살짝 비워두는 방식으로 화면 구성상의 단조로움을 깨뜨리는, 일종의 악센트(accent)로서의 신선함이 발휘되고 있는데, 우리는 이를 파격과 자유정신의 은유로서 읽어볼 수 있다. 인간을 포함하는 자연을 입체와 평면, 여백과 선으로 조합, 직조하면서 1990년대 이후로는 화면의 분위기가 담담한 문인화적 멋과 정취의 세계로 진행되어 나가고 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 이 시기의 작업은 소위 인간세를 초탈한 듯한 뉘앙스가 담겨진 잔잔한 유토피아적 달관을 느끼게 한다. 이는 결국, 서구의 형식과 동양의 정신이 결합된, 소위 ‘한국적 근대성’의 한 단면적 반영이기도 한 것이다.
이후로도 부산의 몇몇 화랑에서 더러 화가의 작품들을 접할 기회가 있었다. 이지적 화면 구성, 정제된 색조 사용, 조형의 정교함과 치밀함 등에서 실제 화력(畵力)에 비해 현저하게 저평가되어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2009년 9월에 열린 ‘꽃피는 부산항’ 전에 출품되었던 ‘청류(淸流, 1986)’는 청고한 화격이 돋보이는 보석 같은 작품이었다. 미광화랑의 ‘꽃피는 부산항’ 전 전시 서문과 작품 해설을 쓰기 위해 출품작 26점 전부를 리뷰하면서, 오영재 화백의 ‘청류’와 김윤민(金潤珉) 화백의 ‘개울’, 서성찬(徐成贊) 화백의 ‘부귀화’ 등의 작품에서는 깊은 예술적 감동을 받았다. 그러나 독자적 조형어법으로 일가를 이룬 지역 대가들(오영재, 김윤민, 서성찬)의 작품이 전국 단위는 고사하고 부산 내에서조차도 평단과 미술시장의 합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우리들이 미술사적으로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될 중요한 지점들이 있다. 화가는 추상화(抽象化)의 과정에서 논리적 맥락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인식시킴으로서 부산, 경남 지역 현대미술의 흐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1970년대에는 대상을 기하학적 단위입자들의 집적으로 파악했지만, 1980년대 이후로는 면분할의 구성을 통해 순수조형의 정수를 보여주었다. 그의 작업에서는 일반 구상에서 시작해 추상적 구상을 거쳐 완전 추상(올-오버의 전면 추상)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에 걸쳐 인과적 필연성에 기초한 이지적 논리가 투철하게 유지되고 있어, 그의 치열한 작가정신의 단면과 궤적을 여실히 읽어낼 수 있다. 극한의 난관 속에서도 작가적 신념과 현실의 요구를 타협, 절충하지 않고, 관념적 이상세계와 낙원경을 간단없이 추구했던 그는 부산, 경남이 자랑할 수 있는, 그야말로 대표적인 추상화가이다. 전국적으로도, 전후 동시대 작가군 중에 이 정도 성취를 이루어 내었다고 내세울만한 사람은, 내 보기엔 그저 김환기(金煥基) 화백 정도뿐이다.
부산시립미술관에서의 회고전을 앞두고 열리는 이번 미광화랑에서의 오영재 전은 부산의 추상미술 계보에서 화가의 비조(鼻祖)적 위상을 확고하게 정립하는 의미 깊은 전람회이다. 이번에 전시된 작품들 중에서도 구상계열인 ‘유광(流光, 1980)’이나 ‘초설(初雪, 1987)’과 같은 작품은 화가의 진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풍경화(風景化) 된 단위격자 구조들을 잘 보여주는데, 이 작품들은 일견 명확히 형태로 구현되어 나타난 구상화처럼 보이지만, 실은 회화의 근원적 요소를 표현하는데 화가가 훨씬 더 중점을 두고 있다는 것을 읽어낼 수 있게 한다. 또한 세계를 결코 더 이상 분절될 수 없는 기본 단위로 파악해 내겠다는 세잔(Paul Cezanne) 류(流)의 견고한 구성의지가 드러나고 있기도 하다. 세계와 존재의 근원과 궁극을 향해 계속 거슬러 올라가고자 하는 화가의 이성적 조형의지는 필연적으로 추상화(抽象化)의 경로를 밟아나갈 수밖에 없었는데, 그가 마지막으로 도달했던 회화의 세계는 모든 열렬한 것, 모든 부유하는 것들이 차분히 가라앉아 잔잔해진 맑고 고요한 관조와 침잠의 경지였다. 단순한 형태소와 색면들이 반복되는 화포 속에서 광풍제월(光風霽月)의 쇄락(灑落)과 평정(平靜)함을 읽었던 것이 필자만의 감흥이었을까? 나는 그 촘촘한 짜임새의 구성적 배열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으로 그 그림들 속에서 고화에서 보는 성긴 수풀에 외로운 정자 한 채가 서 있는, 용슬재도(容膝齋圖, 倪瓚 作)와 같은 원인(元人)의 일품(逸品)을 방(倣)한 소림모정(疏林茅亭)의 황간(荒簡)한 정조를 느꼈다. 그 고화 속 탈속한 담졸의 경지를 서양의 재료로 표현한다면 바로 이런 그림이 되지 않았을까? 망상(網狀)의 패턴화된 구성과 듬성한 사의적 심회가 서로 부딪히고 있는 기묘한 세계가 그 안에서 역동적으로 혼융되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 고일과 초연의 경지가 현실의 치열한 바이브레이션(vibration)을 떨쳐낸 적멸의 파라다이스 아니었을까? 그 피안적 적멸성, 바로 그것이야말로 오영재의 회화가 최후로 도달한 동양적 의경이라 말할 수 있겠다. 그의 회화에서는 형상의 바이브레이션(動)이 보이되 이 바이브레이션을 형태적 패턴화를 통해 화면 속에서 동조화(靜)함으로서 전체를 안정화시키고 있으며, 색채의 변주(動)가 있으되 이 색채들을 동일 계열의 색조로 범주화(靜)시킴으로서 전체를 의연하게 만들고 있다. 이 동중정(動中靜)의 경이로운 세계야말로 차안과 피안, 사바와 극락을 모두 품어 낸 총체적 파라다이스라 할 것이다. 또한 그것은, 시퍼렇게 날이 선 채 곧추 세워진 정신의 고도를 표상하는, 가히 심상의 오벨리스크(obelisk)라 할 만하다.<김동화 글>
– 장소 : 미광화랑
– 일시 : 2014. 11. 8 – 1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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