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대 달맞이고개에 있던 갤러리 이배는 지난 2월 이승희․이우림展을 끝으로 전시장을 마린시티로 이전했다. 또한 옮긴 곳 인근 제니스 스퀘어 5층에 ‘이배 아트랩’을 동시에 개관했다. 이배 아트랩은 특강, 세미나 등의 행사를 전문적으로 맡게 된다. 그동안 전시영상 인터뷰를 흔쾌하게 응해준 이종담 실장 외 김민정 큐레이터가 새 식구로 합류했다. 이배 갤러리 큐레이터 중에는 지금은 그만 뒀지만 영상 인터뷰를 똑 부러지게 잘 했던 이지은 큐레이터가 기억에 남는다. 앞으로 마린시티에서의 갤러리 이배 활동이 기대된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아크릴로 만들어진 입체 작품들이 먼저 눈에 띈다. 입구에서부터 통로처럼 긴 구조의 전시공간은 작품을 감상하는데 집중 할 수 있는 효과가 있다. 한 쪽 벽면에는 까맣게 칠하여 작품 설명과 작가 소개를 해 놓았다. 허미회 작가 작품은 아크릴 액자보다는 입체 상자라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두께가 두껍다. 아크릴 박스 안에는 여러 이미지들이 등장하여 중첩 효과를 내는데 같은 이미지가 앞뒤로 중첩되기도 하고 서로 다른 이미지가 배치되기도 했다. 작품 속에는 자연 풍경, 집, 상가, 인물 등이 등장한다. 아크릴 박스 안에 중첩된 이미지를 통해 작가가 하고픈 이야기는 뭘까.
이번 전시 주제는 ‘Coffret Double(s)-Je(ux)’인데 ‘또 다른 나의 상자’라는 뜻이다. 작가는 프랑스 유학시절 언어공부를 위해 프랑스어로 일기를 쓴 후 수녀에게 맞춤법 검사(?)를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자신의 일기를 남에게 보여주는 부담감 때문에 작가는 ‘나’라는 대명사보다는 ‘엘르(그녀)’라는 가상의 인물을 내세워 일기를 썼다. ‘엘르’라는 가상 인물은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해주는 매개체이자 자신을 드러내주는 또 다른 자아였던 것이다. 이후 작가는 일상의 경험과 상념을 투명한 공간에 기록하고 수집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유럽을 여행하면서 경험한 풍경, 현재 작가가 살고 있는 강릉 송정의 앞바다, 집, 문, 넝쿨 식물 등이 아크릴 이미지로 등장한다. 작가의 비밀스러운 일기에 대한 경험은 작은 비밀상자와 같은 아크릴 박스에 투영되어 기록되고 있다.
『작가는 필름에 전사된 사진이미지, 텍스트, 일상적 오브제를 투명한 아크릴 상자에 붙이거나 조합시켜 다양한 이미지들이 겹쳐지고 반사되는 설치작업을 한다. 필름지를 아크릴에 붙이는 것은 높은 난이도의 숙련된 수작업을 요구되어 마치 동양화의 배접과 거의 동일하다. 텍스트와 이미지가 반영된 투명상자 속의 이미지들은 서로 겹치면서 안과 밖, 현실과 허구, 이미지와 물체, 글씨와 형상, 나와 타인의 경계를 유동적으로 만든다. 거기에는 일기의 단편들이 쉽게 공개되는가 하면 일상의 이미지들이나 과거의 경험이 ‘그랬던 것’으로서 오늘을 만난다. 따라서 작가에게 있어 상자는 작가의 사생활과 기억을 담고 있는 내적공간인 동시에 그 투명성으로 인해 안과 밖의 구분이 모호한, 시각적으로 열린 공간이기도 하다.』<갤러리 이배 전시설명 중>
프랑스 소르본느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작가는 2009년 귀국 이후 국내외 여러 전시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이번 전시는 아크릴 박스 속 이미지를 통해 작가가 말하려는 이야기, 비밀스런 일기를 통해 고민했던 자아 등을 공감하고 느낄 수 있는 좋은 기회인 것 같다. 전시는 4월 20일까지 이어진다.
– 장소 : 갤러리 이배
– 일시 : 2014. 3. 12 – 4.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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