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묵광展(아트스페이스 이신)_20230518

//평 론//
먼 시선으로 만나는 기(氣)의 춤-손묵광 사진전

이성희

  1. 먼 시선
    모노톤의 실루엣, 멀어지면서 펼쳐지는 산의 능선들 위로 새 한 마리가 날아간다. 카메라의 초점이 새를 포착하자, 산의 능선들이 내밀하게 품고 있던 허공이 문득 아득히 눈을 뜬다. 우리가 산을 보는 것이 아니라 산이, 산의 허공이 우리를 본다. 그리하여 풍경의 허공 속으로 우리를 부른다. 구만리 허공 위를 떠도는 아찔한 경이로움. 손묵광이 열어놓은 함평의 한 풍경이다.

손묵광은 멀리서 보려 한다. 한 호흡, 한 마장의 거리, 아니 어쩌면 한 생애의 구비보다 더 멀리서. 그리하여 그는 무엇을 보려는가? 챨리 채플린의 유명한 말이 있다. “삶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언덕에서 내려다보면, 도시의 불빛들이 만들어내는 저녁은 얼마나 화려한가. 그러나 그 작은 불빛 하나하나에 어떤 쓰라린 서사와 사연이 몸을 태우고 있는지는 잘 모른다. 멀리서 보려는 시선은 이 삶의 치열한 서사에 새겨지는 색채와 디테일을 하나씩 지우면서 멀어진다. 멀어지고 멀어져서 어느덧 색채와 디테일이 사라진 수묵(水墨)의 선에 이른다. 이것은 삶으로부터 도망치는 시선인가?

시선은 세계에 대한 인식과 태도를 압축한다. 근대 시선은 대상을 가까이서 보는 ‘근(近)의 시선’이다. 왜 가까이서 보려하는가? 세밀하게 분석하고 측량하기 위해서이다. 르네상스에서 발명된 원근법은 근대적 ‘근의 시선’의 등장을 선언하는데, 르네상스 당시 원근법(perspective)을 뜻하던 어휘 ‘코멘수라티오(commensuratio)’는 ‘측량할 수 있는’ 또한 ‘같은 단위로 젤 수 있는’의 뜻이었다. 왜 측량하려고 하는가? 제어하고 지배하기 위해서이다. ‘근의 시선’의 바탕에는 지배의 욕망이 마그마처럼 끓고 있다.

근대의 시선, 가까이서 보는 시선은 베이컨이 외쳤던 “자연이라는 마녀의 곳간을 약탈하라”라는 선동에 따르는 시선이다. 원근법(遠近法)이라는 번역어와는 달리 ‘perspective’에도 ‘원(遠)’의 의미는 전혀 없다. 관점, 전망의 뜻이 있을 뿐이다. 지배의 욕망으로부터 자유를 얻기 위한 멀리서 보기, ‘원(遠)의 시선’은 동아시아 문화사에서 오래된 은자들의 시선이다. 은자들의 정신을 매혹적으로 표현했던 장자(莊子)의 시선이기도 하다. 그 시선을 예술화한 것이 산수화이다. 손묵광의 멀리서 보기는 삶의 고단함으로부터 도피하는 시선인가, 아니면 ‘근의 시선’이 가진 지배 욕망으로부터 자유를 얻기 위해 동아시아 예술 정신과 접속한 시선인가? 그 판단은 다음 질문을 통해 결정할 수 있다. “그의 시선은 무(無)를 얻었는가?”

2. 무, 혹은 아득함의 공간
멀어지면서 볼 때, ‘근의 시선’에서 세밀하게 포착되는 수많은 상의 거미줄 사이로 무가 떠오르기 시작한다. 이 무를 감당할 수 있을 때, 그 무를 품을 수 있을 때 산수화의 시선과 접속된다. 그것은 ‘아득함’의 공간 앞에 선 고요한 전율이다. 도피의 시선들은 무를 감당하지 못한다. 아니 무를 보지 않는다. 도피의 시선은 이 대상에서 저 대상으로 옮겨다닐 뿐이다. 산으로 도망가면 산의 세부에 사로잡히고, 물로 도망하면 물의 거품에 사로잡힌다. 손목광의 사진 앞에서, 그의 시선에 접속하면 고요한 전율이 밀려온다. 지각 이전에 몸으로 밀려오는 무의 아득함 말이다. 그는 무의 이미지를 얻었다.

‘지각의 현상학’에서 메를르-퐁티는 매우 묘한 공간 하나를 제시한다. 객관적인 측량이 가능한 넓이의 공간에 대해서 그것과 전혀 다른 깊이의 공간을 말이다. 그것은 ‘아득함’의 공간이다. 아득함의 공간 앞에서 우리의 몸은 대상과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지 못하고 정확히 포착할 수 없는 그 세계의 바탕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게 된다.

시각 속에 들어온 사물들과 그 지평이 나의 소유 가능의 영역에서부터 존재의 계시 영역으로 전환하는 것이 아득함의 깊이다. 그 아득함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지각의 운동은 무에 잠기는 운동이며, 그 가운데서 시각의 주체인 ‘나’는 점차 무화된다. 손묵광의 ‘한국풍경, 합천’ 앞에 서 보라. 시선을 차단하는 산의 검은 덩어리에서 한 발만 내디디면 천 길 벼랑으로 떨어지듯이 우리는 무의 아득함 속으로 쑥 빠져들게 된다. 여기에서는 ‘나’가 해석하고 분류할 대상들은 무화되고 그리하여 해석하고 분류하는 ‘나’도 무화되고 공간과 몸(나)이 하나가 되면서 스며드는 아득함의 고요한 전율이 있을 뿐이다.

무를 품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있음’과 ‘없음’이 서로를 생성하면서 추는 기운의 춤을 볼 수 있게 된다. 손묵광의 렌즈는 이 춤을 꽤나 집요하게 좇는데, 그것은 흑백사진, 구름과 산봉우리의 만남에서 잘 드러난다. 구름은 시각에 무의허공을 여는 산수화의 상용 장치이기도 하다. 그 풍경들은 바슐라르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구름의 몽상가는 구름 낀 하늘에 바위가 몰려 있는 것을 볼 때가 있다.” “바위와 구름은 서로를 완성한다.” ‘대지의 의지와 몽상’ 바슐라르의 몽상 가가 산봉우리와 구름에서 가벼움과 무거움의 대립이 융합하는 것을 보았다면 동아시아 옛 위대한 산수화가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것은 유(有)와 무(無)가 상생하는 기(氣)의 춤을 보는 것이다. 이러한 춤을 노자(老子)는 황홀(恍惚)이라고 하였다.

손묵광은 황홀한 자연의 춤을 포착한 듯하다. 그러나 작가의 렌즈가 이 춤을 제대로 담은 것은 구름과 산봉우리가 만나는 흑백사진이 아니라 오히려 모노톤의 ‘한국풍경’ 시리즈이다. 푸른 산줄기가 겹겹이, 다성음악 선율들의 파동처럼 펼쳐지는 ‘함평’이나 ‘덕유산’, ‘가야산’을 보아야 한다. 마른 나뭇가지 끝에 앉은 새 한 마리나 혹은 고사목은 이 춤을 포착하고자 하는, 작가의 고고한 시선의 은유이다. 그 시선에 접속하여 보라, 우주적으로 펼쳐지는 기운의 춤 들을. 황홀한 기운생동(氣韻生動)이지 않은가.

손묵광은 “풍경의 재현이 아닌 진경산수를 바탕으로 한국 산천의 내밀한 변화, 그에 따라 호흡이 달라지는 나의 내면을 담으려 했다.”고 ‘작가 노트’에서 말한다. 그의 진경산수 사진에는 우리 산천에 대한 깊은 애정이 담겨 있다. 사진을 찍기 위해 수없이 산에 오르는 힘든 과정이 또한 그러했을 것이다. 그러나 “재현이 아닌”, “나의 내면”이란 말들에는 추상의 욕망이 스며들어 있다.거대한 산과 우주적 아득함의 공간을 보여주는 동아시아 옛 산수화에서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되는, 작지만 중요한 포인트가 있다. 산수화에서는 비록 잘 보이지 않을 정도일 때가 많지만, 거의 반드시 근경에 소슬한 인가와 길, 그리고 사람이 그려져 있다. 이 작은 인적이 산을 더 광대하게 하고 공간을 더 광활하게 하며, 산수화 전체를 살아 움직이게 한다. 그러나 카메라의 렌즈는 이것을 포착하기가 무척 곤란하다. 먼 시선을 통해 풍경 속에 무를 드러내고 유와 무가 서로 생성하며 출렁이는 춤을 포착하는 손묵광의 시선은 인적을 포착하지 않는다. 그러할 때 먼 시선은 추상의 유혹에 빠져들기 쉽다. ‘지리산’과 ‘국사봉’을 보라. 작가가 말하는 ‘진경산수’의 실재는 점차 뒤로 물러서고 “재현이 아닌” 가상 같은 선과 매스의 판타지가 열린다.

동양화론의 제일 원리인 기운생동과 추상은 가까운 듯하면서 멀다. 기운생동은 추상처럼 대상의 닮은 재현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대상이 가진 기(氣)의 생명감을 실감나게 포착하는 것이다. 그것은 얼핏 추상으로의 길을 여는 듯하지만 둘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기운생동이 대상인 산수 기운과 “나의 내면” 기운의 합일을 통해 고양되는 생명의 느낌이라면, 추상의 미는 기본적으로 생명을 부정하는 무기적인 것, 결정적(結晶的)인 것 가운데서 발견해 내는 추상적 합법칙성이다.(보링거, ‘추상과 감정이입’)

손묵광의 파인더는 기운생동과 추상의 경계선을 넘나들며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고 있다. 그것은 그가 추상의 욕망에도 불구하고 우리 산천을 직접 만나는 생생한 감응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시선이 앞으로 어느 쪽으로 더 나아가게 될지는 알 수 없다. 그것이 어느 쪽이든, 먼 시선을 통해 산천의 춤 속에서 찾아가는 것이라면 그 춤이 그의 시선을 인도할 것이다. 그리하여 이르게 될 모종의 풍경을 우리는 다시 기대하고 있어야 하리라.

장소 : 아트스페이스 이신
일시 : 2023. 05. 18. – 06.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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