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최광호 사진 : 빛과 중력 – 백한승
빛은 직진한다. 그래서 충돌한다. 사진은 빛의 충돌을 기록하는 매체다. 멀리서 날아온 빛들은 직진을 거듭하다 존재와 충돌한 후에야 비로소 필름에 갇힌다. 빛의 조각들이 필름에 입힌 상처들을 우리는 사진이라 부른다. 최광호는 빛에 마주 서는 작가다. 빛 속에서 그의 카메라는 눈보다 피부처럼 작동한다. 그래서 그의 사진은 관찰이 아닌 작용이 되며 그것이 그를 사진 속으로 뛰어들게 했다.
“그것은 파도가 밀려드는 것 같았습니다.” 작가 최광호는 자신의 첫 사진을 그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정작 그 사진이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는지는 기억하지 못했다. 이러한 ‘밀려듦’은 그의 예술 전체를 아우르는 주요한 모티브가 된다. 그는 이 ‘빛의 밀려듦’과 그를 바라보는 ‘지금의 나’와의 작용을 살아있음의 증거로 받아들여 제작에 임한다.
그가 할머니의 죽음을 목도하였을 때, 그는 카메라를 버렸다. 작가는 이를 두고 “죽음의 단절이 사진에 담기지 않았기 때문”이라 말한다. 그리고 그는 즉각적으로 죽음의 단절감을 담은 자신의 몸 전체를 인화지에 던진다. 그리고 그것을 ‘포토그램 : 육체’라 이름 짓는다. ‘포토그램 : 육체’는 전통적 입장에서 포토그램이 아니다. 이는 이미 빛에 노출된 인화지 위에 가해진 육체의 흔적이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존재의 그림자가 아닌 존재와 빛이 직접 접촉한 행위의 결과로 보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광호가 이를 포토그램이라 부르는 것은 그의 확장된 빛과 사진에 대한 태도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최광호는 ‘할머니의 죽음’의 실패와 ‘포토그램 : 육체’의 성취를 간직한 채로 새로운 사진의 가능성에 몰두한다. ‘하느님 똥구멍’은 자의적 빛을 통해 자연의 빛을 역전시키려는 시도였다. 그에게 ‘어두운 태양’은 자연에 대한 도전이었으며, 동시에 자신의 사진에 대한 저항이었다. 사진 속에서, 그의 빛은 태양보다 밝았다. 그는 일본에서 “사진을 배웠다.”라고 말한다. 그는 그곳에서 확장된 자의식을 전통적 사진 형식에 불어넣는 시도들을 거듭한다. ‘얼굴’, ‘타령’, ‘한 컷 반’, ‘한 롤이 인생이다’는 즉물적 대상을 자의적 시퀀스에 동시적으로 대입하는 방식을 취한다. 그가 보는 세상은 이미 사진이었고, 모든 이미지는 빛과 자의식으로만 통제되기에 이른다.
그는 뉴욕에서 “예술을 배웠다.”라고 말한다. 그 시기의 뉴욕은 포스트모던의 격전지였으며 따라서 무엇이든 예술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의 공간이었다. 최광호는 거기에서 그가 그동안 구축해 왔던 프레임을 부순다. 그는 사진에 구멍을 뚫음으로써 사진이 지시하는 시간과 공간으로 부터 탈출하였고, 프레임을 겹치거나 연장함으로써 그것들을 넓혔다. ‘하늘, 땅, 물, 불’, ‘구멍 동화’는 그의 예술에의 현상적 지향을 잘 보여준다. 뉴욕에서의 그는 일본에서의 즉물적 페르소나로부터 확장된 기호들을 사용하게 되는데, 빛으로만 형상을 드러내던 존재들은 형상 자체의 상징으로 확장되어 드로잉, 페인팅, 판화, 설치, 행위 등의 형식으로 프레임 안에 쏟아져 들어온다. 그의 마음속 만물은 기존의 사진이 갖는 완고한 재현의 굴레로부터 그렇게 벗어난다.
최광호의 작품 속 기호나 사물들은 공중 에 떠 있거나 혹은 날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사진을 눕히거나 심지어 카메라를 공중에 던지는 방식으로 제작된 것 들이다. 1990년 가을, 브롱스의 베인 브리지를 걷던 최광호는 손에 든 사과를 찍다가 태양과 사과와 자신이 일직선상에 위치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이 시점으로부터 그의 사진에는 중력을 조작하려는 적극적인 움직임이 나타난다. 그의 ‘중력 거스르기’는 사진에 나타나는 제한된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극복하는 용도로 쓰인다. 최광호에게 있어 중력은 공간과 시간의 증거이며, 이를 교란함으로써 나타나는 균열에 자신이 염원하는 세상과 자의식을 불어넣는다. 그 시절 그는 일기장에 이런 문장을 적는다. “매일이 지구를 움직인다.”
15년간의 외유를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동생을 잃는다. 그리고 그는 ‘동생의 죽음’과 함께 마침내 ‘할머니의 죽음’을 발표한다. ‘동생의 죽음’은 ‘광호 타잎’이라 불리는 새로운 방식으로 제작 되었다. 최광호는 아버지 옆에 동생을 묻었다. ‘광호 타잎’은 혈육을 묻은 흙의 사유로부터 출발한다. 사진의 은 또한 흙에서 왔고 다시 그리로 돌아간다는 믿음은 노광된 필름과 인화지를 오랜 시간 현상액에 머무르게 하는 방식으로 실험되었다. 사진의 노출과 현상, 인화 방식을 모조리 무시한 ‘광호 타잎’은 유제로부터 탈락된 입자들이 다시 인화지에 전사되는 과정을 거쳐 이미지로 정착된다. ‘광호 타잎’은 감각으로부터 지각을 얻어내고, 이의 논리를 사유에 그대로 적용하는 이른바 ‘작업이 작업하게 하는’ 그만의 방식을 여실히 보여준다.
누구도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 최광호의 예술에 일관되게 유지되는 자기동일성은 한계를 부정함으로써 생기는 경계에 다시금 도전하는 끝없는 정반합의 실험에 의해 구축된 것이다. 지금의 최광호는 그림을 그린다. 그리고 그것들을 다시 사진의 영역 안에 두기 위해 입술에 물감을 발라 그것 위에 찍는다. 그리고 그는 ‘그것이 사진’이라 말한다. 어쩌면 그는 그의 손에 들려 있는 물감들조차 빛의 파편들로 여기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만일 그렇다고 할 수 있다면, 최광호의 시간과 사진은 빛과 중력의 감각만이 존재하는, 영원히 지속되는 현재의 입맞춤이 된다.//백한승//
장소 : 아트스페이스 이신
일시 : 2023. 03. 30. – 05.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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