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욱展(금샘미술관)_20230314

//전시 평론//
김종기 독립미술비평가(부산민주공원 관장, 철학박사)

정희욱은 미술학도로, 전업 작가로 살아온 평생동안 거의 모든 작업을 돌로 해왔다. 부분적으로 철판 등 다른 재료를 사용해 만든 작품도 없진 않지만, 그의 중요한 모든 작품은 돌로 만든 얼굴 연작이다. 처음 공예고등학교에서 미술가가 되기로 결심 할 때부터 그는 돌을 선택했다. 그리고 대학을 졸업한 후 3~40년의 세월 동안 돌과 씨름하고 돌과 함께 살아왔다. 그리하여 그의 모든 의식과 행동은 돌을 지향하고 있었다. 평생 돌 작업을 하고 돌 작품을 만들었다.

그래서 그는 돌 조각으로 특화되어 각인되어 있는 중견 조각가이다. 그런데 왜 돌을 재료로 선택했을까? 돌은 선사시대부터 인간들이 자신들의 관념과 의식을 표현해 온 가장 근원적인 재료였다. 또한 그 때문에 돌을 재료로 하는 예술작품, 조각작품은 이미 오래전에 위대한 성취를 이룩했다. 대리석, 화강암 등 돌로 만든 조각작품은 미켈란젤로, 로댕 같은 위대한 예술가들의 작품에서 예술성의 정점에 달했다. 그렇다면 후대의 작가들은 무엇을 더 할 수 있을 것인가? 돌을 재료로 선택한다는 것은 그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런데 정희욱은 미술가, 조각가가 되겠다고 마음먹고, 조각을 시작하면서 그와 같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기 전에 돌이라는 재료가 가진 흡인력에 자신도 모르게 빨려 들어갔다.

그는 경주 남산 불곡마애여래좌상, 충남 서산 마애여래삼존상, 전남 화순 운주사지 와불 등, 선조들의 종교적, 예술적 성취가 담긴 석불이 자신을 부른다고 느꼈다. 석불이 있는 전국의 모든 사찰, 산을 찾아다녔다. 무명의 석공이 남긴 종교적·예술적 작품들이 정희욱의 내면 깊은 곳에서 정희욱에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어느 곳이든 돌부처님이 있는 곳에 가서, 부처님에게 손을 대고 그 숨결을 느낀다. 그 숨결은 돌부처님이 정희욱에게 불어주는 것이었다. 더 나아가 정희욱이 작업 재료를 구하기 위해 전국을 다니면서 찾아낸 거대한 돌들, 이 돌들이 그에게 숨결을 불어주었다. 이 숨결이 정희욱의 작품에서 들숨과 날숨이 되었다.

정희욱의 얼굴 ‘자소상’ 연작은 대부분 가늘고 긴 눈과 작은 입이 있다. 무릇 ‘자소상’이란 자신의 초상조각을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자소상’은 정희욱이 구축한 정희욱 자신의 세계이다. 그런데 이 자소상에서 눈과 입은 구멍이 뚫려 있다. 정희욱은 조각의 뒷부분으로부터 빈 공간을 크게 파내고 눈과 입에 공간을 만들어놓고는 다시 그 부분을 두껑돌로 결합해 두었다. 이 때문에 이 얼굴 조각들은 모두 얼굴 내부에 형성된 빈 공간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조각 제작 방식은 정희욱 작가에서 특유한 방식이다. 정희욱은 물질로서의 돌덩어리 속에서 정신적이고 관념적인 어떤 것이 머무는 공간을 만들고자 한다. 따라서 이곳은 정희욱이 만든 소우주이면서, 물질과 정신이 공명하는 곳이다. 나아가 그는 이 소우주에 만들어진 ‘눈’과 ‘입’을 통해 현실세계로서의 대우주를 바라보며, 들숨과 날숨을 통해 교류한다. 또한 귀를 바닥에 대고 역사의 소리, 삶의 소리를 듣는다. 이 때문에 정희욱의 얼굴 연작은 하이데거가 말하듯, 이 현실 세계에 내던져진(企投) 인간존재로서의 현 존재를 드러낸다.

정희욱은 반구대 암각화를 자주 찾는다. “반구대 암각화는 처음 만났던 20대 시기부터 이제 60대가 된 나에게 오랜 시간 감동을 준 귀중한 문화 자산이자 늘 경이롭고도 새로운 예술적 대상이다. …… 바다에서 비교적 먼 거리인 이곳에서 이루어진 이 고대의 예술 행위는 어쩌면 현대의 갤러리에서의 그것과 매우 유사해 보인다. 무엇보다 이 바위 앞에 서서 보면, 바위 면에 새겨진 암각화에서 내뿜는 에너지도 엄청나지만 바위면 자체에서 우러나오는 강렬한 에너지를 느낄 수 있다.” (정희욱, <반구대 앞에 서서> 아리오소 갤러리 2023.01.10.~02.17)

정희욱이 느낀 이 강렬한 에너지는 칸트가 말하는 ‘역학적’ 숭고로 포착할 수 있다. 또한 그가 자신의 작업 재료로 찾아내는 수십 톤이 넘는 거대한 돌덩이는 ‘수학적 숭고’로 포착할 수 있다. 이때 숭고는 예술 작품 자체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자연을 마주할 때 발생하는 주관적 감정이다. 칸트에서 역학적 숭고란 자연의 위력이 너무 강해 그것이 “우리에게 공포를 일으키는 것”으로서 표상될 때 나타난다. 한편 수학적 숭고란 “단적으로 큰 것”, 다시 말해 “일체의 비교를 넘어서는 큰 것”을 의미한다. 너무 큰 대상 또는 너무나 강한 자연의 위력에 대해서는, 감각을 종합하여 어떤 대상의 이미지를 형성하는 우리의 구상력(Einbildungskraft)은 머릿속에서 그것의 이미지(像)를 떠올리지 못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우리의 감성적 척도가 도달할 수 없는 큰 것을 내면적으로 지각할 수 있다는 것, 칸트의 말을 그대로 빌면 “감성의 모든 척도가 이성의 이념들에 부적합하다”는 것을 발견하는 데에서 쾌감을 느낀다. 이것이 바로 숭고의 감정이다. 따라서 숭고는 위대한 자연대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대상을 내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인간의 이념 속에 있게 되는 것이다.

칸트보다 앞서 버크(Edmund Burke, 1729-1797)는 숭고를 좀 더 쉽게 “즐거운 공포”, 다시 말해 생명을 빼앗길 정도의 위험에서 오는 공포감과 그 위험이 사라질 때의 안도감에서 생기는 기쁨의 혼합감정으로 설명한다. 그리고 고전주의 미술가들이 재현의 원리에 따라 화폭에 아름다운 대상을 재현하고자 했다면, 낭만주의자들은 장엄한 자연과 왜소한 인간을 대비하여 숭고를 묘사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리오타르에게 숭고 미학의 단초를 제공한 뉴먼(Barnett Newman, 1905-1970)은 화폭에서 모든 이미지를 지움으로써 숭고를 실천하고자 하였다. 뉴먼의 캔버스에서는 인식될 수 있는 재현대상은 모두 사라지고, 형태와 색채는 최소한의 것으로 환원된다. 이와같이 뉴먼의 미니멀리즘은 묘사를 포기함으로써 이 세상에서 묘사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증언한다. 여기서 묘사할 수 없는 것이란 이미지를 통해서 시각화할 수 없는 것을 말한다.

무엇보다 정희욱은 반구대 암각화를 마주하면서, 그리고 자신이 찾아낸 거대한 돌덩이를 마주하면서 감각이나 지각을 통해 표상할 수 없는 거대한 에너지를 느꼈다. 지금껏 자신의 조각 얼굴 연작을 주로 ‘자소상’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면, 이번 전시에서 정희욱은 이 조각을 ‘자각상(自覺像)’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이를 통해 그는 자신의 작업을 되돌아보는 성찰의 시간을 갖고자 한다. 과연 나의 작업은 어디에 와 있는가? 나의 작품은 현대미술에서, 컨템포러리 아트에서 어디쯤 위치하고 있을까? 그리하여 스스로를 묘사하는 ‘자소상’은 스스로를 돌아보는 ‘자각상’이 된다. 그리하여 이 자각상을 옥색 또는 푸른색 단색 평면의 대형 캔버스 앞에 놓아두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제 정희욱은 석조각 예술가라는 단일한 정체성을 넘어서고자 하는 실험정신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 ‘자각상’들과 단색 평면의 캔버스들은 이중적 의미에서 ‘숭고’를 내보여주고 있다. 첫째, 이 ‘자각상’들은 그 이전의 ‘자소상’들과 이어져 있다. 그리고 이 자각상은 정희욱이 반구대 암각화, 그리고 자신의 작업 재료가 되는 거대한 돌덩이에서 뿜어나오는, 시각적으로 묘사하거나 재현할 수 없는 에너지를 담는 용기가 되었다. 둘째, 자각상의 뒤에 놓인 대형 단색평면화들은 정희욱이 자신의 작품에서 ‘숭고’를 표현하는 방식을 보여주며, 그 자체로서 재현할 수 없는 것이 있음을 증명하는 증거가 되었다. 무엇보다 그의 단색 평면은 돌에서 나타낼 수 없는 색상을 나타낸다. 이 단색의 대형 캔버스는 정희욱 작가의 창작 작업이 내면적으로 복잡한 과정을 거치면서 실험의 도상에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그저 돌작업 전문가, 석조각 장인에 머무르고자 하지 않는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작품에서 물질적인 것을 넘어 정신적인 것을 표출하고자 한다. 칸딘스키는 세계를 물질과 정신, 현실과 꿈,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으로 나누면서 세계사가 이와 같이 물질과 정신의 대립으로 전개된다는 이분법적 이원론 세계관을 비판한 바 있다. 이러한 이원론 세계관에 따르면 물질은 피상적인 것이며 정신은 본질적인 것이다. 그러나 정신과 물질은 너무나도 직접적으로 상호 의존되어 있기 때문에 구분할 수 없다. 물질 속에 은폐되어 있는 정신은 물질을 통해서만 가장 내면적인 것, 즉 인간의 영혼에 호소하고 있다. 칸딘스키는 물질 속에 내재하는 정신의 현존을 부정하는 물질주의적(속류 유물론적) 세계관에 비판을 가하며 물질주의 시대를 극복한 정신적인 것의 시대를 주장한다. 따라서 정신적인 것의 시대는 모든 영역(자연, 예술, 학문)의 거대한 우주적 연관성과 현상 상호간의 유대관계를 예감케 하고 밝혀주는 ‘종합’의 시대를 의미한다.

이번 ‘관찰자’라는 제목의 전시에서 정희욱은 기존의 얼굴 조각 뒤에 대형의 단색 평면 캔버스를 보여준다. 이 캔버스에는 푸른색, 또는 옥색이라는 색채 이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이 캔버스는 정신적인 것을 배제한 가장 단순하고 원초적인 물질성을 드러내 보여준다. 따라서 이 단색평면은 ‘미니멀리즘’의 정수를 건드린다. 그러나 또한 바로 그 때문에 그 원초적인 물질성에 깃든 정신적인 것이 드러난다. 칸딘스키에 따르면 예술작품은 외적 요소와 내적 요소로 성립된다. 정희욱의 텅빈 단색의 평면은 어떤 ‘구체적’ 형상도 존재하지 않고 비어 있지만 또한 색으로 가득 차 있다. 여기서 단색의 평면은 예술작품의 외적 요소로서 예술작품이 구체적 형식으로 나타난 물질적 형식을 의미한다. 한편 여기서 내적 요소는 작가의 구체화되지 않은 감정을 의미한다.

정희욱은 전시장 벽에 대형 단색 평면 캔버스를 세워두고 그 앞 바닥에 자신의 평생 작업의 진수가 담긴 얼굴 조각을 배치해두었다. 들뢰즈는 어떤 것의 의미는 그것이 처음 배치된 어떤 한 곳에 고정되어 있지 않다고 말한다. 이것이 들뢰즈가 말하는 아장스망(agencement, 배치/재배치)이며, 이를 통해 새로운 의미가 생성된다. 정희욱은 자신의 조각 ‘자각상’과 대형 평면의 캔버스를 전시장에 새롭게 배치함으로써 새로운 공간성을 만들고 거기에서 나오는 어떤 울림(Klang)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렇게 돌 조각과 단색 평면이라는 이질적인 소재와 형식이 만나 발생할 결과는 미리 예측할 수 없는 미결정성(Unbestimmtheit/indeterminacy)의 영역에 속한다. 이렇게 의도된 미결정성, 불확정성이 정희욱의 이번 전시에 드러나는 중요한 특징이라 할 수 있겠다. 이렇게 새로운 공간에 이질적 대상을 과거와 다른 방식으로 배치함으로써 자신의 중요한 작품인 얼굴 두상이 어떤 분위기, 감정을 자아내고 그것이 평면 캔버스와 어떻게 공명하는지를 지켜보는 것. 이것이 정희욱의 아장스망이 의도하는 바라 할 것이다.

나아가 정희욱은 자신의 자각상이 이집트 조각상의 영향을 받았음을 내보여준다. 작품 ‘관찰자의 시선’은 이집트 파라오 아크나톤의 아내 네페르티티 흉상을 염두에 두고 제작한 것이다. 이집트 미술에서 나타나는 이른바 ‘정면성의 원리’는 영혼불멸의 관념에 뿌리를 두고 있다. 사후에도 인간의 영혼이 살아남아 부활한다고 믿은 이집트인들은 그 영혼이 깃들 육체를 보존하기 위해 미라를 만들었고, 또한 미라 대신 만들어진 조각과 그림은 미라의 대체물이었다. 그래서 이집트 미술에서 그림은 우연적인 시각 조건을 무시하고 그 대상의 본질적인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나도록 대상을 여러 시점에서 포착하고 그것을 한 화면에 종합하는 다시점 구성으로 ‘시각적 종합’과 ‘시각적 추상’이었다. 또한 조각도 대상의 온전한 모습을 그대로 드러낼 수 있도록 엄격함과 딱딱함을 특징으로 한다. 따라서 이들 조각은 현실 세계가 아니라 영원의 세계를 응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편 네페르티티 흉상은 석회암으로 조각해 스투코로 덧칠한 흉상이다. 그럼에도 왼쪽 눈은 미완성으로 남았다. 정희욱은 ‘관찰자의 시선’에서 네페르티티의 미완성 눈처럼 한쪽 눈을 비워두었다. 그리하여 이 채워지지 않는 미완성의 눈은 역설적으로 얼굴 속의 소우주를 바깥 현실세계라는 대우주와 연결시키는 고리가 된다. ‘관찰자’라는 제목은 관심과 연결된다. 주체로서의 나는 나 주위의 숱하게 많은 객체, 대상들에 의해 둘러 쌓여 있다. 그리하여 나는 많은 대상을 눈으로 본다.

라캉은 눈(eye, 시선)과 응시(gaze)를 구분하면서 눈을 주체의 시점, 응시를 주체를 바라보는 타자의 시점, 즉 주체가 보여지는 시점이라고 말한다. 나는 나의 눈과 시선을 통해 한 지점에서 볼 뿐이지만, 나의 실존 속에서 나는 사방에서 응시되고 있다. 그런데 내가 응시되고 있음을 자각하지 못할 때, 나를 둘러싼 대상은 나에게 의미 없는 대상일 뿐이다. 그런데 내가 대상들에 의해 응시되고 있음을 안다는 것은 내가 그것들과 특정한 관계성 속에 놓여있다는 것을 자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해서 정희욱의 얼굴 조각은 자각상이 된다. 이 자각은 내가 나를 돌아본다는 것, 나를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포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나와 대상을 변치 않는 어떤 본질에 의거하여 포착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살아가는 현실 속에 기투된 실존적 현존재로서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나를 인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나는 타자에 의해 응시되고, 또 그러한 타자들을 응시하는 것이다.

한편 정희욱의 조각은 미완성(Non finito)을 지향한다. 애초에 미완성 기법이란 작가가 감상자를 작품에 끌어들이는 바탕이 되는 것이다. 작품에서 마무리 지어지지 않은 미완성 영역을 보면서 감상자는 머릿속에서 작품의 완성형태를 그리면서 창작자가 되어 작품에 개입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작품의 의미는 창작자에 의해서 완결되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감상자가 그 작품을 만나게 될 때 비로소 형성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작품 속에 감상자가 있다”라는 테제가 만들어지게 된다. 예전의 비평에서도 말한 것처럼 정희욱은 청년 시절부터 이러한 미완성의 기법을 몸으로 체득하였다. 그는 특히 전남 화순 운주사의 ‘와불’에서 이러한 미완성의 양식을 보았고, 그것을 ‘멈춤’의 미학이라고 표현한 바 있었다. 이때 그가 주목한 것은 이 미완성에서 보이는 물질과 정신의 조화였다.

한편 정희욱의 조각작품은 옆으로 놓인 얼굴이 귀를 바닥에 대고 있는 형상으로 이루어진다. 여기서 정희욱의 얼굴 조각은 예술사에서 좌대를 없애버린 로댕과 뒤샹의 레디메이드를 넘어 좌대 개념 자체를 파기해버린 미니멀리즘 미술을 넘어선다. 이제 정희욱 조각의 좌대는 바로 이 세계이다. 이 얼굴들, ‘자각상’, ‘관찰자’는 바닥에 귀를 대고 세계의 소리,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의 소리, 인간들의 외침을 듣고자 한다. 그래서 정희욱의 얼굴 조각은 동시대의 목소리를 듣고, 동시대 인간들의 삶을 응시하는 토대가 된다. 이로써 정희욱은 자신의 얼굴 조각들이 컨템포러리 아트의 한 발현 양태가 될 수 있음을 웅변하고 있다. 그리고 이 얼굴 조각들이 단색 평면과 함께 재배치(agencement)되면서 새로운 의미가 만들어지는 미결정의 과정을 탐색하는 실험적 성격을 띠고 있다 하겠다.//김종기//

장소 : 금샘미술관 제2전시실
일시 : 2023. 03. 14. – 0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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