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노트//
“그림이 당신을 보게 하라“
나는 내 그림을 보는 관객에게 일정 수준의 자세를 요구한다. 일반적인 관객의 자세는 나의 그림이 더 이상의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 아주 최소한의 조형 언어만을 사용하였기에 관람객의 태도를 바꿔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모든 정보의 최소화는, 그것을 읽어 내는 관객의 입장에서 아주 곤혹스럽고 때로는 무시하고 지나칠 수 있기에 관람자의 그림을 대하는 태도를 먼저 꺼낸 것이다.
나는 내 그림이 내가 그린 그림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진 그림이 되길 바랬다. 그만큼 간절하게 나를 지워야만 이야기는 시작 될 수 있다. 나를 중심으로 세상을, 관계를, 우주를 이야기한다면 결국 나의 이야기로 끝나고 말 뿐이다. 여기서 화자인 나를 지우려는 작업은 결국 모순이 생기겠지만 내 존재의 한계를 인정하고 스스로 최소한의 이야기를 던지는 것으로 시작한다. 종이와 먹 그리고 붓, 간소한 재료를 통해 무심코 흘린 점 모양의 단순한 씨앗, 돌멩이, 물방울 등 유사형태의 모양이 관객을 응시하고 있다. 관객이 이 점의 형태를 관찰하거나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이 그림이 당신을 바라 보고자 한다. 당신은 관객이 아니고 대상이 되어야 한다.
씨앗, 돌멩이, 물방울이 우리를 바라보는 시각, 이것을 느끼는 것이 이 작업의 주된 목적이기 때문이다. 오래 전 상상력이 풍부했던 옛 선인들은 이것을 심안(마음의 눈)이라 불렀고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그림을 눈으로 보려고만 하지 말고 눈을 감고 그림의 이야기를 마음에 품고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는 것에서 출발하는 마음의 눈은 곧 물아일체 즉 너와 나의 경계가 없는 무위이화의 세계, 화엄의 세계를 경험하는 첫걸음이다.
나를 죽이는 일은 일체의 모든 번잡한 요소를 제거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색채와 구도의 조형적 변화는 이 땅의 살아가는 인간세 이야기이지 그들의 이야기가 아니기에 최소한의 요소만을 엄격하게 요구한다. 더 이상 뺄게 없는 최소의 세계이면서 가장 많은 이야기를 담는 수묵의 정신은 물성이나 기법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 사물을 대하는 작가의 태도에 속해있다.
많은 관객들이 정보의 단순성으로 스치듯 지나간다. 수 많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단순함은 그냥 묻혀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양파의 껍질처럼 얇은 막이 쌓여서 양파를 형성하듯 단순함의 두께는 비록 한눈거리일 지라도 이 단순함이 쌓여서 나와 너를 그리고 세상을 우주를 만들고 있다.
오래전 밥을 먹고 설거지를 하다가 수챗구멍에 걸린 밥알을 보며 안타까와 했었다. 비록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밥알의 일대기가 주마등처럼 내 머릿속을 지나갔다. 농부의 손에서, 작년에 모아둔 종자로 간택되어, 정성스럽게 키워져, 들판의 모내기에서 힘껏 자라 탈곡되어, 나의 밥상까지 왔을 밥알을 보고 있노라면 그가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의 여정이 허망하게 되는 순간 미안한 감정이 느껴졌고 한동안 잊을 수 없는 장면이 되었다.
좀 더 시간이 지난 후에 비로소 그가 나를 바라보며 미소 짓는 것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인간이여 슬퍼 마라. 나는 그냥 존재할 뿐 네가 나를 먹어 너와 하나가 되지 않아도 나는 스스로 있었고, 너도 나와 같은 한 낱의 존재이며 모두 그렇게 존재할 뿐이다.
“자네가 뭔데 나를 보며 슬퍼하는가?”
어떠한 언어로도 씨앗, 돌멩이, 물방울이 하고자 했던 말을 표현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소박하고 순결하게, 평온하고 고요하게, 자신에 넘쳐 거기에 있었다. 숱한 사물들 가운데 하나의 사물처럼, 너무도 확연한 가시적 물질에 내재하는 불가시적 정신 존재를 표현하며 그렇게 있었다.
“이아관물(以我觀物) 이물관물(以物觀物)”, 곧 “나로서 사물을 관찰하지 않고 사물로서 사물을 관찰하는 것”
장소 : 리빈 갤러리
일시 : 2022. 08. 02 – 08. 17
추PD의 아틀리에 / www.artv.kr / charmbit@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