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소개//
어떤 언어에는 비미래 시제(non-future tense)가 있는데, 이 시제에는 현재와 과거의 구분이 없다고 한다. 어떠한 미래성도 담지하지 않는 이 시제는 현재와 과거를 동등하게 취급한다. 이러한 언어를 쓰는 사람들은 시간을 어떻게 느끼고 있는 것일까? 과거와 현재가 동등하게 취급된다면, 이들에게 미래를 기대하는 감각이 존재할까? 또한 이들에게 도래하지 않는 미래는 어떻게 취급될까?
시간에 대한 언어는 시간에 대한 우리의 직관을 반영한다. 예를 들어, 한국어 화자는 과거, 현재, 미래를 구분하는데, 이는 시간이 선형적으로 흐른다는 우리의 주관적인 느낌과 심리상태를 반영한다. Chris Sinha의 2014년 논문 When time is not space에는 선형적 시간에 대한 언어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아몬다와Amondawa (Tupi Kawahib)족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아몬다와족은 시간적 관계를 표현하기 위해 선형-공간적 표현(현재, 과거, 미래와 같은) 체계를 사용하지 않는다. 결국 우리가 가장 본능적인 것이라 믿어온, 시간에 대한 우리의 직관과 그것을 반영하는 언어는 시간에 대한 세계관을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틀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간에 대한 우리의 선형적인 인식은 후천적인 사회적 산물인가? 나는 논의를 그러한 방향으로 확장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시간적 인식이 근본적인 것이 아님을 확인하는 동시에, 우리와는 다른 시제의 체계를 가진 여러 다른 언어들의 화자들이 시간을 감각하는 방식에 대해 상상해보고 싶었다. ‘비미래’ 라는 미묘한 시간적 감각에 대한 영감은 본 전시에 참여하는 안미린 시인의 시 <비미래> 시리즈에서 얻었다. 이 글의 첫 부분에 발췌 인용된 시는 <비미래> 시리즈 중 첫 번째로 『눈부신 디테일의 유령론』의 2부에 수록되어 있으며, 본 전시는 여기서 언급되는 안미린 시인의 ‘가설’에 대한 시각적인 응답으로 기획되었다. 김가민, 신정균, 그리고 윤산의 작업은 안미린 시인의 시와 느슨한 연계를 꾀한다.
우리는 우리가 ‘현재’라고 믿는 시점에 미래에 대한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는 모든 것이 고정된 ‘과거’와는 다르며, 무수한 가능성의 ‘미래’와는 다르다고 믿는다. 흔히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말하듯 인간의 실존이 가능성을 선택하는 것에 있으며, 우리의 ‘현재’는 선택 그 자체라면, 당신이 매순간 내린 결정 때문에 파괴되는 다른 모든 가능성들은 무엇일까. 모든 가능성의 고정이 과거이고, 선택이 현재이며, 무수한 가능성이 미래라면, 실패한 가능성들은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모든 가능성 중에 선택되지 못한 실패한 가능성, 그것이 ‘비미래’ 가 아닐까.
나는 이 가설을 밀고 나가고 싶다.//한수정 큐레이터//
장소 : 제이무브먼트 갤러리
일시 : 2022. 05. 06 – 06. 15
추PD의 아틀리에 / www.artv.kr / charmbit@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