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평론//
유석규 작품의 지각과 표상의 이중적 기호
글 / 미술학박사 김재관(쉐마미술관장)
C,A 피들라는 “예술 활동이라 불리어지는 것은 단지 조형예술가의 활동만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또한 “일반적으로 예술이란 오직 한 가지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형태의 예술로서 존재하고 있는 것이며, 예술작품이란 인간의 감각생활 또는 정신적 상황에서 나타나는 것이다.”라 하였다, 이 말을 통하여 예술 활동은 예술가 개개인의 본성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며, 예술이란 유기체로서의 인간의 정신적 현상과 신체적 현상이 예술 활동으로 분리되어 발전적 변화를 하게 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사물과 대칭적 존재로서 존재해 왔다. 상대적으로 인간의 대칭적 존재로서의 사물이란, 그것이 예술의 대상으로 결정되기 이전까지 그것이 단지 거기에 있다는 것만으로 지각의 대상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사물 그 자체만으로 무엇인가 정신적 소유물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사물이란 인간이라는 유기체에 의해 여러 가지의 작용이 발생하게 됨을 의미한다. 사물에 대한 의식을 통하여 인간은 그 스스로 그 작용을 형성하고 의식의 소유물로 표현하는 것이다. 예술이란 감각과 지각이라는 능력의 소유자에 의해 수용하게 되는 것이다.
본래 사물이란 존재하는 세계이고 인간은 지각하고 표상하는 세계로 양자 간은 대립적 관계를 설정하게 된다, 결국 사물과 인간의 관계는 “아는 것”과 “알려진 것”이라는 두 가지 종류의 것을 보는 입장이며 한편으로는 “아는 것”과 “알려진 것”이라는 이분성이 하나로 통일되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현실에 관한 우리의 총괄적인 의식의 소유가 실제로는 지각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인식할 수 있게 되었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인식은 인간이 현실에 관한 여러 가지 정신적인 관계의 전모를 파악하는 역할을 완수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결국 추상적인 사고라고 하는 고차원적인 장(場)에서 나타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사물의 절대적 존재성에 관한 의문은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술가의 고도로 발전된 추상적 사고의 소산이라는 것이다. 작가 유석규의 작품은 사물의 절대적 존재성에 관한 의문에 대한 물음을 통해 사물과 인간, 대상과 이미지의 재현에 대한 스스로의 작업에 대한 철학적 물음을 던지면서 자신만의 독특한 작품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유석규는 대학 졸업 직후에는 그림을 그린다는 일에 깊은 회의감을 느끼던 시기가 있었음을 고백하고 있다. 많은 젊은 작가들이 이와 같은 고민을 대부분 겪게 되는데, 이러한 상태에서 유석규는 주로 이미지 생산에 대한 거부의 의미로 그림을 지우거나, 미술시스템 자체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의 작업을 하면서 이 시기를 지나고 있었다. 기법적으로 볼 때 그의 작업은 사포나 흰색물감으로 다른 사람의 그림을 ‘지우는 작업’들과 화면의 일정부분을 가리는 ‘블랙스크린’ 시리즈가 등장하는데 이것들은 사진과 비디오 평면회화까지 다양한 매체로 이루어졌다, 이 시기의 작품에서 그의 회화에 대한 부정적 생각의 단면을 잘 읽을 수 있다. 회화와 영상매체로 구분할 수 있는 두 시리즈는 내용적인 연관이 없기 때문에 얼핏 보면 관련이 없어 보이지만, 이미지 생산과 유통에 관한 문제 그리고 미술시스템 자체를 비평하는 점에서 같은 선상에 있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첫 번째 작품으로 다른 사람의 작품을 토대로 한 작품 시리즈는 ‘회화를 사적인 표현의 공간이 아니라 다른 사람(대상)을 대면하는 공간으로 전용’하여 조금 다르게 접근하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접근 방식이야말로 다른 회화 작업들과 차이를 만들 수 있는 획기적인 방법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 이와 같이 유석규는 자신의 그림을 통하여 그림의 기준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고 이러한 회화에 대한 물음을 통하여 다른 작가들의 작품과 차별화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결국 그의 작품은 작품 안에 두 명의 작가가 있게 된다. 이 시리즈 작품들은 전작을 그렸던 사람과 자신이 어떤 형태로든 함께 존재하게 되는데 이 점이 관객과 작가 자신의 위상의 수평적 설정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 같다.
그의 최근작들은 단절과 죽음, 공존과 배치되는 근대적 집적과 내재적 폭력 그리고 잠재된 위험을 징후적으로 드러내고자 함을 볼 수 있다. ‘로드킬(청계가는 길)’ 시리즈와 ‘1인 시위’ 작품이 그 예라 할 수 있는데, 여기서 작가는 시대의 담론의 승리자로서 속도 이데올로기의 상징물인 직선도로를 소재로 하여 인간에게는 편리와 공간의 연결을 제공하지만 결과적으로 직선도로는 폭력적 직선이 되어 단절과 죽음을 촉발시키고 있음을 적시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최근작들은 그 위에 그렸다는 것 외에 전작과 아무런 관련이 없을 뿐만 아니라 전작과 나중에 덧 그려진 이미지는 몽타주적으로 결합하고 있을 뿐이었다. 두 결합이 어떤 텍스트를 형성할지는 어쩌면 작가의 몫이 아니라 회화 스스로 만들어지는 자율성이나 작품 밖의 문제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그의 이러한 생각은 데리다가 제시한 차연의 개념과 몽타주의 속성과도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어 보인다, 그것은 유석규의 작품에서 조형적 또는 텍스트의 해체가 이루어지고 부분체들이 파편화되어 분리과정을 거치면서 코기토, 로고스, 구조의 순환과 작용의 현존성이 붕괴되어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서 상호 텍스트성에 대한 노골적 수용과 자기반영적 태도는 선택이라기보다는 필연적인 고백으로 보인다. 유석규의 작품에서 그러한 일련의 시도는 일종의 즐거움의 공간을 도출함으로써 ‘수평적 대면’을 도모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미학적 입장에서 볼 때 ‘언어적인 것’과 ‘시각적인 것’ 간의 이분법이 불가피하게 발생되게 된다. 현대미술에서 회화는 몽타주를 이용한 기표의 충돌로 발생하는 상징적 권위에 대한 도전이라는 관점에서 종종 해석되고 있는데 유석규의 경우에도 언어적 요소는 ‘기의’(signifié)로, 시각적인 요소는 ‘도상적 기표‘로 구분할 수 있지만 결국 융합되고 중첩되어 하나의 작품으로 결정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유석규는 그의 그림에서 이미지에 대해 양가적인 태도를 보이는 일련의 작업은 회화를 사적 표현의 공간보다는 타자와 대면하는 공간으로 전용(轉用)하려는 시도라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 그의 회화의 가장 독특한 특징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일반적으로 그림은 흰 캔버스 위에서 시작하지만, 이 작업들은 빈 화면 위에서 새로이 만들어진 작업들이 아닌 버려진 그림들, 다른 작가들이 건네준 그림, 그리고 너무 낯설게 느껴지는 작가 자신의 오래된 그림과 같이 이미 존재하는 대상들을 토대로 이루어진 것들이다. 이 시리즈 통해 회화에 대한 조금 다른 제안과 함께 전통적인 작가적 위상에 개입하여 미학적 경험의 차이를 구축하고, 작가와 관람객 그리고 작가와 작품의 상호관계를 보다 수평적으로 재구성하려는 전략을 엿볼 수 있다.
유석규의 작품에서 전작들은 물리적 견지에서 그림의 지칭물로서 배경의 풍경으로 잘못 인식하기 쉽다. 그러나 이것은 자세히 보면 기호체계의 기본적 특성을 제시해주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그것은 독립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연쇄적 고리 안에서 상호 간에 관련이 있어 보이기도 하는 모호성을 갖게 하는데 이러한 모호성이 그의 작품의 중요한 또 하나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지워져버린 전작의 이미지는 독특하게 소리 없는 사물로서 ‘한 때 존재해왔던’ 이미지의 시간만을 증언하게 되는데 그 자체의 시간과 역사는 풍부할지 모르지만 정확하지 않은 모호함이 있으며 심지어 속임수가 있어 보인다. 여기서 하나의 공간 구조에서 두 개의 이미지를 읽는 것은 중복 결정된 의미의 모호성을 더 두드러지게 하는 반대급부를 갖게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기법은 기표와 기의 사이에 있는 교차점에 의해 강조되는 의미를 생산하고 있는 영화에서 종종 적용되고 있는데, 기의는 기표로서의 기능성 뒤에 숨게 됨으로써 공간의 간격보다 시간의 간격을 더 분명하게 인식시키는 효과를 갖게 된다.
결론적으로 언급하자면, 유석규의 작품에서 제공되는 이미지의 잠재적인 모호성은 연속적인 하나의 이미지, 통시적인 축을 따르는 또 다른 이미지의 중복적 표현처럼, 이미지와 이미지의 콤비네이션에 의해 통합성을 같게 하는 영화의 경우처럼 오히려 모호성이 제거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는 ‘다른 사람의 그림을 토대로 하는 시리즈’ 작품은 그 스스로 ‘소극적 개입’과 ‘적극적 개입’으로 구분하며, 지우기 기법에 의한 작품들을 ‘소극적 개입’이라 말하고 있으나 그의 초기 작품으로 보이는 「과일이 있는 정물」과 근작으로 보이는 「책이 있는 정물」을 비교해 볼 때, 전작의 지우기 작업이 적극적인 경우가 모호성의 확대에 따라 오히려 물리적 리얼리티가 강화되고 상대적으로 관객이 개입할 여지가 많아지게 됨을 보게 된다. 그러나 최근 작 「화분」과 「산」에서 볼 수 있듯이 화면이 전작의 지우기 작업에서 덧칠하기로 변하면서 작품의 형식이 변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가 ‘적극적 개입’으로 분류하고 있는 근작들 「청계천 가는 길」과 「1인 시위」는 단순히 사건 현장의 기록이라기보다 작가의 개입으로, 「별이 된 연인」은 이미지가 기호적으로 변하면서 오히려 회화성을 회복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최근작 「가드레일」과 「White castle」에서 볼 수 있는 근대적 집적은 자본의 욕망과 맞닿아 있는 도시적 개념으로 타협과 공존보다는 효율과 이기를 지향한다고 할 수 있는데, 작품 「근대적 집적에 관하여」는 죽음에 직면한 개(犬)를 통하여 한국사회의 기저에 깔린 왜곡된 집적에 관한 모순된 인상을 표현하고자 하고 있다. 예를 들자면, 원자력 발전소를 그린 「White castle」은 바닷가에서 마치 하얀 성처럼 보이지만 이 대상에 내재되어 있는 욕망과 무시무시한 위험은 아이러니 하게 아름다운 주변 경관과 멋지게 어울리는 시각적 모순을 표현하고 있다.
이렇듯 유석규는 문명에 의한 사회적 모순과 왜곡된 현실의 이중적 현상을 새로운 관점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매우 고단한 작업을 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러나 이차원 회화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자 핸디캡이라 할 수 있는 평면구조에서 발생되는 회화의 모호성과 평면성에 대한 집요한 그의 회화적 해석은 오히려 그의 회화에서 지각과 표상의 이중적 기호로 재미있게 기록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김재관//
장소 : 갤러리 양산
일시 : 2021. 09. 28 – 10. 30.
추PD의 아틀리에 / www.artv.kr / charmbit@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