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민환 글//
● 1. 三徑就荒, 뜰 안 세 갈래 작은 길에 잡초 무성하나, / 松菊猶存… 소나무와 국화는 아직도 꿋꿋하다… / 撫孤松而盤桓 외로운 소나무를 어루만지며 서성거린다 ● 동진(東晋) 시대 은일(隱逸)의 삶을 살고자 한 도연명(陶淵明)이 읊은 「귀거래사(歸去來辭)」의 한 구절이다. 허리 한번 굽히는 것이 그렇게도 힘든 일이었던가? 도연명은 팽택현(彭澤縣)의 지사(知事)로 근무하던 때 오두미(五斗米: 적은 봉급) 때문에 향리의 소인에게 허리를 굽히는 일이 죽어도 싫었다. 이에 ‘귀거래’를 읊으면서 벼슬을 버리고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오는데, 가족 이외에 그를 맞이하는 것이 있었다. 국화와 소나무였다. ‘오상고절(傲霜孤節)’의 국화를 유달리 좋아했던 도연명이 우의(寓意)적으로 자신을 표현하고자 한 또 다른 자연물은 소나무였다. 동양에는 식물의 생태적 속성을 인간의 덕성과 동일시하는 비덕(比德=以物比德)의 사유가 있다. ●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歳寒然後知松柏之後凋)” 공자의 말이다. 군자의 진면목은 ‘진실로 궁한 시절에도 절개를 지킨다(固窮節)’라는 것에 있다. 추운 날씨는 시련을 상징한다. 추운 계절에도 여전히 푸름을 간직하고 있는 소나무의 생태적 속성을 인간의 덕성과 동일시하면서 인간의 바람직한 삶과 인간상을 말하고자 한다. 도연명은 온갖 풍상(風霜)속에서 세류(世流)에 휩쓸리지 않고 홀로 고고함을 지키고 있는 소나무를 쓰다듬으면서 자신과 동일시하는 물아일체(物我一體)적 삶을 보여주었다. ‘오상고절’의 국화나 ‘낙락장송(落落長松)’으로 말해지는 소나무는 바로 ‘고궁절’을 실천하고자 한 도연명 자신이었다.
- 박정연 작가가 선택한 소나무도 일단은 비덕 차원의 사의(寫意)적 소나무다. 하지만 곳곳에서 반전을 꾀한다. 얽히고설킨 삶의 질곡 속에서 방황하다가 때론 초연한 듯한, 달관한 듯한 양면성을 드러내는 소나무는 작가 자신이다. 그런데 작가의 세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은 작가 자신에게만 머무르지 않는다. ● 황금소나무는 작가의 트레이드마크다. 많은 세월의 풍상을 겪고 상처를 안고 있는 ‘고궁절’의 상징인 소나무에게 권위와 신성함 그리고 부귀를 상징하는 황금색은 어울리지 않는다. 작가는 그 황금색을 통해 소나무에 새로운 이미지를 부여한다. ● 이제 ‘고궁절’의 상징으로서의 소나무는 황금색의 화려한 색채, 풍부한 감정의 옷을 입고 새로 태어났다. 황금색은 소나무 내면의 강인함과 덕성이 외재적으로 드러남이다. 내면으로 온축된 정감의 아름다음을 외적인 문채의 밝음으로 드러내고자 함이다. 황금색에는 온갖 풍상을 겪고 난 이후의 삶에 대한 달관(達觀)과 체관(諦觀) 그리고 승화(昇華)된 감정이 아울러 담겨 있다. 후덕재물(厚德載物)의 포용성, 넉넉함, 풍요로움이 화려한 빛의 미학으로 탄생하고 있다.
- 작가는 황금소나무를 통해 차물서정(借物抒情)을 통한 정경교융(情景交融)의 미학을 보여주고자 한다. 이에 온갖 풍상을 겪은 소나무도 있지만, 진정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피가 흐르고 감정이 교류하는 소나무로서, 비덕 차원의 우리 곁에 멀리 있던 고고한 소나무를 자신의 평범한 일상적 삶의 공간에 끌어들였다. ‘낙락장송’ 식으로 홀로 그 한 몸을 온전히 보전하는 ‘독선기신(獨善其身)’의 꼿꼿한 소나무가 아니고, 희노애락을 그대로 표현하는 소나무, 사랑에 취하고 사랑을 갈망하는 소나무, 가족의 함께 하는 삶이 편안함을 느끼고 아울러 타인의 체취를 그리워하는 소나무, 인간미 넘치고 살냄새가 물씬 풍기는 소나무로 전환시켰다. ● 이성의 눈으로 본 소나무가 아닌 따뜻한 마음과 감성으로 관조한 소나무, 아니 내면의 기(氣)로 느낀 소통의 소나무로 전환시켰다. 전통적 화풍을 연결해 굳이 말한다면, 고아한 백매(白梅)를 통해 우아함을 담아내기보다는 농염하면서 감각적인 홍매(紅梅)를 그린 격이다. ‘부부’, ‘가족’, ‘육남매’, ‘연인’, ‘people’, ‘자화상’ 등의 주제를 통해 작가 자신과 관계망을 맺고 있는 다양한 인간상을 자신이 살아온 삶의 역정과 주변의 삶을 소나무 형상을 통해 담아내고자 한 것이 그것이다. ● 작가가 특히 강조하는 것은 뿌리다. 겉으로 보면 각개의 소나무는 따로따로 별개의 존재인 것 같지만 그 뿌리를 보면 서로 얽혀 별개가 아님을 보여준다. 이제 작가는 더 나아가 눈에 보이는 세계가 전부가 아닌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세계’에 대한 성찰을 함께 요구한다.
- 소나무 홀씨가 어쩌다 생존이 불가능할 것 같은 얼음장 같은 바위에 뿌리를 내렸다. 살고자 하는 강한 의지는 놀라운 생명력을 보여주면서 바위를 뚫어버렸다. ‘삶이란 이런 것이야’ 하면서 바위 속을 뚫고 지나간, 과장된 듯한 불사지사(不似之似) 형상의 소나무 뿌리는 충격적이다. 그런 척박한 환경속에서 사랑을 맺고 서로를 감싸주고 보듬어주는 부부소나무에는 음과 양이 교직(交織)하는 미학을 보여준다. ● 원대 예찬(倪瓚)이 소나무, 잣나무 등 여섯 그루 나무의 꼿꼿한 형상을 통해 [육군자도(六君子圖)]를 그렸다면 작가는 ‘육남매’를 그렸다. 여섯 그루 소나무는 얽히고설킨 뿌리를 통해 별개의 존재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하나임을 보여준다. 가지와 가지의 연결을 통한 끈끈한 가족애를 보여주며 오순도순 모여 군무(群舞)하는 듯한 가족소나무도 마찬가지다. 뿌리는 물론 가지도 나와 타자를 연결해주는 관계망의 상징이다. 교직미학이 적절하게 표현되고 있다. ● 파격적 발묵(潑墨)을 통한 방일(放逸)한 붓놀림에 선미(禪味)가 듬뿍 담긴 광태(狂態)적 소나무는 도량(道場: bodhi-mandala)의 소나무로 전환된다. 광태적 발묵에 온갖 번뇌를 불태우는 듯, 제거하는 듯, 흩뿌리는 듯 광기마저 보인다. 그 광기에는 도리어 허허로운 선열(禪悅)이 담겨 있다. 필묵(筆墨)의 유희를 통해 아집(我執)에 사로잡힌 나를 버리고 있다. 아울러 농밀(濃密)함과 간소(簡疏)함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형상과 용이 꿈틀거리는 듯한 초초(草草)한 붓놀림에 불란지란(不亂之亂)과 불사지사(不似之似)의 일기(逸氣) 맛이 담겨 있다. ● 압권은 연인의 구애를 짐짓 거부하는 듯 하지만 ‘솔잎부채’로 가리면서 온몸으로 연인의 입맞춤을 받아들이는, 부부의 사랑과 또 다른 수줍은 사랑방정식을 보여주는 연인소나무다. 이전 소나무 형상에서는 볼 수 없는 작가의 독예(獨詣) 경지의 창의성이 담긴 ‘사랑받는 소나무’다. 이제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의 ‘남성성이 강조되는 애로틱한 [키스]’가 있다면 박정연 연인소나무의 ‘밀고 당기는 수줍은 키스’가 있음도 기억해야 한다.
- 이처럼 작가의 이야기는 먼데 있지 않다. “진리는 멀리 있지 않다(道不遠人)”라고나 할까? 작가는 바로 인간이 몸을 서로 부딪치면서 사는 감정이 교류하는 삶의 현장에 주목한다. ● 청대 화가 금농(金農)은 “누구나 다 비슷하게 그리는 것은 홀로 자신만의 경지를 창안하는 것만 못하다(同能不如獨詣)”라는 말을 한다. 천연의 정취(天趣)가 비동(飛動)하는 광대(光大)한 황금소나무는 천기(天機)가 자발(自發)하고 성령(性靈)이 충만된 무자기(無自欺)의 소나무이면서, 잃어버렸던 자신을 되찾는 독예 경지의 환아(還我)의 소나무이기도 하다. 즉 작가의 영부(靈府)에서 나온 육감적이면서도 살냄새 나는 독예 경지의 사의적 황금소나무는 작가 자신이면서 또 우리이기도 하다.//조민환//
장소 : 부산경찰청 로비
일시 : 2021. 06. 21. – 07. 30.
추PD의 아틀리에 / www.artv.kr / charmbit@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