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상진 작품//
임상진은 부처를 그린다. 목불이나 철물보다는 석불을 그린다.
석불은 석재 특유의 요철을 가지고 있다. 요철 탓에 석불은 석불답다.
석불을 석불답게 해주는 것이 요철이다. 요철은 석불의 표면 현상이지만, 석불을 그림으로 옮겨 그리는 과정에서 표면 현상은 그림의 이면으로 잠수한다. 바탕질감을 통해 요철효과를 조성하는 것인데, 여기서 작가는 전통적인 방법을 차용한다. 세간에서 미끌도박으로 알려진 재료며 기법이다. 석회와 모래와 해초를 삶아 기와와 기와 사이에 바르는 모르타르와 같은 일종의 접착제를 만들어 화면에 덧바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위에 그림을 그리면 미세한 요철을 옷처럼 입고 있는 부처가 오롯해진다.
때론 풍경도 그리고 수더분한 막사발도 그리지만, 작가는 대개 그리고 시종 부처를 그린다. 그 일관된 관심이며 과정은 사실은 자기라는 진정한 실체를 향한 일편단심의 여로였고 과정이었다. 그런 점에서 작가의 그림은 부처의 얼굴을 한 십우도의 다른 한 버전으로도 볼 수가 있겠다. 불교에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는 말이 있다. 색이 공이고 공이 색이라는 말이다. 색을 색으로 공을 공으로 인식하는 것은 다만 마음이 불러일으킨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색은 색이 아니고 공은 공이 아니라는 말이다. 감각적 실재에 미혹하지 말라는 주문이며, 혜안으로 감각적 실재를 돌파하라는 주문일 것이다. 당신이 보기에 작가의 화면은 부처로 보이는가, 작가로 보이는가, 아님 아예 그림으로 보이는가, 작가의 그림은 이런 자기반성적인 물음 앞에 서게 만든다.//고충환//
//송광연 작품//
송광연의 그림에는 몇 겹의 레이어들이 중첩되어 있다. 그것은 이질적인 시간과 공간, 과거와 현재, 현대와 전통, 현대 사회의 레디메이드 이미지와 전통사회의 주술적 이미지, 납작한 평면적 처리와 입체적이고 촉각적인 질감으로 이루어진 이미지가 교차 혹은 충돌 하는 식이다. 그것들은 주어진 평면 안에서 부분적으로 점유되면서 펼쳐진다. 우선 인상적인 것은 단색의 배경화면이 펼쳐지다가 그 위로 불현듯 강렬하고 뚜렷한 라인과 입체적인 처리로 올라온 모란꽃과 나비의 형상이 출현한다. 복잡한 도시의 풍경이 단색조의 배경으로 깔리거나 매혹적인 여성의 뒷모습이 어두운 후경을 뒤로 하고 출현하거나 또는 그 반대로 환한 바탕 면에 자리하고 있다. 또는 익숙한 앤디워홀의 작품 속 인물이나 진부한 도상이 되어버린 체 게바라와 같은 사진 이미지가 단색 화면위에 그려져 있다. 생각해보면 작가가 배경에 위치시킨 대부분의 이미지들은 현대인들의 삶을 반영하는 매개들이거나 현대 사회의 시대적 상황을 암시하는 상징들인 편이다. 그 이미지들은 기존 팝아트의 작품에서 차용한 것들이기도 하고 매스미디어를 통해 반복적으로 받아들이는 기성 이미지를 수용한 것이다. 아마도 작가에게 이 이미지들은 자신의 작업에 끌어들일 수 있는 손쉬운 레디메이드이미지이자 자신이 동시대를 읽어내는 기호로서 인지할 수 있는 단서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수많은 이미지들을 받아들이면서 산다. 그 이미지들은 우리들의 인식과 사유를 규정짓기도 하고 모종의 가치관을 형성시키는 동시에 삶에 대한 감수성을 형성하는 요인들이다. 오늘날 이미지 없는 삶은 가능하지 않다. 문제는 그 이미지를 어떻게 읽어낼 것인가 하는 것이다.
작가의 의도는 대중소비사회를 사는 오늘날 현대인들의 삶을 후경으로 그려 넣고 그 위에 전통사회에서 가능했던 민화 이미지를 연결해서 여전히 꿈과 희망, 간절한 기복적 소망을 잃지 말고 살아가기를 원하는 제스처를 이런 식의 구성으로 구현하고 있다고 보여 진다. 어찌 보면 민화야말로 당대의 팝 적인 이미지다. 기층서민들이 간절히 희구하던 생의 소망을 진솔하게 표명했던 이미지들이 민화라고 불리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당대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전하는 그림들과는 다른 성질의 것이었을 것이다. 물론 민화 안에는 지배계급이 요구하는 이데올로기를 내재화하고 그들과 같은 신분상승과 영화와 부귀에 대한 욕망을 드리우고 있지만 동시에 특정 이념, 가치관에 사로잡히기 보다는 가장 인간적인 생의 욕망이 가장 우선되고 있다는 점이 눈에 주목된다. 그래서 모든 종교와 모든 신들이 민화 안으로 호명되고 혼재되어 있다. 그 안에서 부귀영화와 무병장수, 다손다남과 부부금슬과 같은 원초적이고 더없이 기본적인 삶의 욕망을 철저하게 추구해나갔던 그림이 바로 민화다. 또한 그것을 그린 그림들은 자유자재하고 솔직하고 소박한 미감으로, 신비한 영성적 힘으로 넘쳐난다.
송광연은 민화 중에서도 모란과 나비 그림만을 빼내어 자신의 그림 위에 부분적으로 시술하고 있다. 옛날에는 신혼 방이나 부부의 침실에는 반드시 화조모란병풍을 둘러쳤다고 한다. 부부 화합하여 굶지 말고 살라는 소박한 축원이 모란이 들어간 것이 화조모란도다. 사실 모란과 나비는 같이 등장하진 않는다. 선덕여왕이 당 태종이 보낸 모란 그림에 나비가 없는 것을 보고 그 꽃에 향기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는 기록이 『삼국유사』 선덕왕지기삼사조에 나온다. 본래 꽃은 여자에 나비는 남자에 비유되며 남녀의 깊은 정을 암시하기도 하며 특히 호랑나비과의 나비는 아름다운 몸 색깔을 가진 종류로 길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나비는 꽃을 좋아하는 동물로서 통상 민화에서 꽃그림에는 반드시 나비가 들어간다.
송광연은 배경에 흐릿하게 그린 그림위로 부분적으로 민화에서 차용한 모란꽃과 나비를 그려 넣었다. 그러나 그것은 흡사 캔버스 천에 실제 자수를 해놓은 것과 같은 착시를 일으킨다. 그러니까 작가는 마치 수를 놓은 듯이 섬세하고 치밀하게 물감과 미디어를 섞어서 자수와 같은 질감효과를 만들어놓은 것이다. 오랜 공정과 시간, 노동이 요구되는 이 제작은 그만큼 간절한 희구와 기원을 바라는 치성적인 행위와 동일한, 그것을 실현하는 절실한 방법론이 된다. (그 방법론이 좀더 정교하고 치밀하게 전개될 필요는 있다고 본다) 작가는 이러한 제작 행위를 통해 인간적인 꿈과 희망을 그림 안에 불어넣고자 한다. 그것 또한 다분히 주술적인 행위가 된다.
동시에 그것은 평면 위에 촉각적이고 입체적 효과를 부풀려 낸다. 그러자 납작한 평면성을 강조한 후경과 분리되어 두드러진 질감과 색채가 유난히 강조되어 돌출되어 다가온다. 모란과 나비로 상징되는 기복적 의미를 두드러지게 강조해주는 역할을 하는 동시에 단조로울 수 있는 평면의 화면에 활력적인 포인트를 안기는 것이다. 동시에 그것은 현대인들이 망실한 혹은 잃고 지내는 꿈과 희망을 선사하고자 하는 배려로 읽힌다. 작가는 민화에서 추구했던 가장 인간적인 소망을 동시대인들에게 새삼 환기시켜주거나 안겨주고 싶다는 욕망을 드러낸다. 그런 의도가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그림이 바로 해골그림이다. 씩 웃고 있는 듯한 해골의 텅 빈 눈과 콧구멍에는 모란꽃이 가득 채워져 있다. 해골은 이른바 바니타스 정물화나 메멘토모리를 드러내는 그림에 흔하게 등장하는 도상이다. 가지런한 치아에는 모란꽃 한 송이를 물고 있기도 하다. 컴컴하고 깊은 배경을 뒤로 하고 커다란 해골 두상이 가득 찬 화면에 화려한 색실로 수놓아진 자수와도 같은 강렬한 채색 그림이 환하게 다가오고 또한 모란꽃을 직접 수놓는 듯이 색실 하나를 물고 날아다니는 나비의 매치는 죽음과 소멸로 망실되는 인간의 유한한 육체와 그럼에도 그 한계 안에서 언제나 꿈과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적극 추구하고자 하는 강한 생의 욕망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도상에 해당한다. 나로서는 이 작품이 작가의 의도를 가장 선명하게 전하고 있는 효과적인 작품의 예라고 본다. 미완성으로 보이는 여인의 뒷모습을 모란꽃으로 채워나가는 현재진형현인 그림, 마치 모란꽃 문신을 시술하고 있는 듯한 그림 역시 해골 그림 다음으로 매력적인 예다. 암시적으로 그려진 인물상과 등에 모란꽃 본을 떠놓은 듯한 선들, 그리고 그것을 조금씩 채워나가는 진행형의 그림은 화려한 소망과 꿈을 키우며 살고자 하는 인간 내면의 욕망을 외화하고 있는 예다. 옷이자 피부가 되고 있는 모란꽃이자 부귀영화와 무병장수에 대한 염원을 자신의 살에 날카로운 바늘에 찔리면서도 수놓는 모습인데 이는 우리가 이 비루한 일상에서 행복과 유토피아를 또한 얼마나 절실히 갈구하며 살고 있는가 하는 것을 아프게 깨닫게 해주는 편이다.//박영택//
장소 : 갤러리 무아
일시 : 2021. 04. 19. – 05.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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