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서영展(예술지구p)_20200916

//전시 서문//
인간은 끊임없는 사유를 통해 공간(空間)의 개념을 확장시켜 왔다. 마거릿 버트하임은 ‘공간의 역사’를 통해 “완벽한 세계는 ‘천국의 문’ 뒤가 아닌, ‘.com’이나 ‘.net’이라는 꼬리표가 붙은 전자 통로 뒤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인간은 현실과 비현실이 아닌 현실과 가상현실로 대응케 했고, 제 3의 공간에서 제 4의 공간으로 확장되게 했다. 투영된 현실에 부가 정보를 더해 증강현실과 혼합현실을 만들었다. 현실은 공간을 확장하게 하며 확장된 공간은 또 다른 사건을 만들어낸다. 그럼 예술이라는 세계에서 전시장은 사건의 장소(場所)일까? 캔버스의 확장된 공간을 진열하는 곳, 아니면 현실과 가상현실이 혼합된 또 다른 공간일까?

인상주의 대표화가 클로드 모네는 1892년, 루앙 대성당 건너편에 있는 포목점 위층에 작업실을 마련했다. 이곳에서 일조량에 따라 흰색, 황금색, 갈색, 푸른색, 오렌지색 등으로 보이는 성당의 모습을 그렸다. 햇빛과 날씨에 따른 색채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그림들이다. 시간과 날씨의 변화가 모네의 작업에 영향을 주었다면 이 곳, 포목점 위층 작업실은 모네에게 무엇이었을까? 역사적인 작품을 만들 최적의 장소, 루앙 대성당이 잘 보이는 위치였으며 빛과 색으로 환원시켜주는 주체로서의 역할은 분명하다. 그러나 공간으로 접근 할 때면 다른 의미를 갖는다.

공간은 직접적인 경험, 심리학적 의미, 철학적 의미, 물리학적 입장, 수학적 입장 등 다양한 개념들로 풀이가 된다. 일반적으로 상하, 좌우, 전후 3방향으로 퍼져있는 빈곳, 또는 그것을 추상화한 의미의 개념으로 풀이 한다. 추상적인 공간에서 시작하여 공간에 대한 정보가 늘어가고 의미를 부여하게 되면 그 공간이 장소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장소는 공간에 놓인 하나의 물체와 그것을 지각하는 인간과의 상호관계에 의해서 형성된다. 공간은 의미가 부여될 수 있는 곳이며, 그러한 곳이 실제로 의미가 부여되고 인간화되었을 때 장소가 되므로 공간은 인간의 시각태도에 의해 자극할 때 심리적으로 반영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모네는 작업실 창문틀 안으로 비친 성당의 일부만을 인지(認知)하고 보이는 것으로만 공간을 한정 지었다. 이때 모네의 루앙 대성당은 빛으로 가득 찬 순간의 2차원 평면이다. 루앙 대성당은 시간과 공간에 의해 규정되어 있는 감각적 대상으로 보아졌기 때문이다. 창틀이라는 프레임 안으로만 보이는 성당은 분명 장소이었으나 모네는 창틀 안으로 보이는 공간의 일부를 선택하여 캔버스라는 2차원의 평면으로 옮겨 공간을 제한해 버린다. 여기에서 모네의 루앙 대성당에 대한 인지된 시각은 공간 또는 장소의 개념은 중요치 않다. 시간에 따라 움직이는 빛이 중요했고 그 빛으로 2차원 공간인 캔버스에서 색으로 환원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모네가 작업실에서 보이는 성당의 모습을 바라보며 시간의 겹을 더하려 했다면, 최서영은 공간과 공간의 전이(轉移)를 꾀하려 한다. 작가는 공간에서 사건의 장소로의 접근을 시도하려 한다. 공간을 인지하는 과정에서는 주변 공간에 대한 자기의 위치와 움직임을 인식하고 대응하는 균형감각을 필요로 한다. 후각, 청각, 시각 등과 같은 요소에 의하여 우리는 공간에 대해 인지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럴 때 인지된 공간은 사건을 담는 장소가 된다.

작가의 작품은 공간에서 장소로, 다시 장소에서 공간으로, 공간에서 캔버스로, 캔버스 속에서 다시 다른 공간으로 시선을 이동시키려 한다. 예술에서는 장소가 갖는 사건, 이슈(issue) 보다는 자아에 의한 공간정보가 생산되기를 원한다. 작가의 그림 역시 장소 보다는 공간의 개념이 우선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공간에 작품의 이야기를 밀어 넣고 있다고 해야 할까.

모네는 종교, 전쟁, 화재 등 사건화 된 장소인 루앙 대성당을 화면에 옮겨 빛과 색의 환상이 된 2차원 공간을 만들었다면, 작가는 초를 밝혀 연기를 피우고 촛농이 흐르는 시간을 자신만의 사건으로 만들었다. 사각 프레임이 아닌 요철되고 변형된 캔버스를 제작한다. 촛농이 흐르는 모습, 촛불을 피워 피어나는 연기를 현현(顯現)하여 사진을 찍는다. 재현된 사진을 보며 변형 캔버스에 물감으로 새롭게 연출을 한다. 연출된 촛농과 연기는 실재와 닮지 않았다. 촛불은 보이지 않고 일렁이는 연기만 보인다. 작가가 만든 제 3의 장소이기에 꼭 현실과 닮을 필요가 없다. 새로운 사건은 이 사건이 유발되는 현실공간 속의 현실물건이 아니다. 캔버스 위의 공간이며 사건이기 때문이다. 캔버스 위 장소를, 즉 물건들을 끌어드려 자신만의 사건으로 가득 찬 공간, 그러나 물건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는 것이 특징이다.

캔버스 위 촛농, 촛불에 일렁이는 연기, 여러 개의 변형된 캔버스 등 단순한 물체들을 전시장이라는 공간에 밀어 넣어 사건을 연출하듯 진열되어 있다. 미묘하고 복잡하다. 분명한 것은 작가는 이런 캔버스의 촛농, 연기가 있는 공간, 즉 캔버스 공간 속의 공간과 전시장이라는 장소는 분리시키고 있다. 작가는 “만들어진 공간이 매번 다른 공간을 만나며 색다른 의미들을 축적”해 나간다고 말하며 전시장을 공간이 아닌 다른 장소로 제시 한다. 그리고 이 장소를 시각적 공간으로 이동시키고 싶어 한다. 어쩌면 연출된 장소가 현실공간으로의 이동일지도 모른다. 컴퓨터 오락은 현실에서 가상공간으로 진입하게 한다. 우리에게 왜 가상공간 진입, 즉 오락을 왜 해야 하는지 알려주지 않듯, 작가는 촛농과 연기에 관한 사건은 말해주지 않는다. 그러기에 변형된 캔버스 형태, 촛농, 연기 등이 매개된 캔버스 속 공간과 변형된 캔버스들의 나열된 전시공간, 이 공간에 작가가 부여하고 싶은 혼합현실이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예술지구_P에서 답을 찾을 수가 있으리라.//구본호(동대문문화재단 대표이사)//

장소 : 예술지구p
일시 : 2020. 09. 16. – 09.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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