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소개/
태인 개인전 ‘본질로의 회귀 Return to the Essence’
환경이란 주체의 의지와 관계없이 형성된 것이어서 인생에 걸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동시에 그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쉽게 말해주지 않는 속성도 가지고 있다. 이 얄궂은 것을 우리는 흔히 ‘운명’이라 부르지만 사실은 우리가 그 굴레를 인식함으로서 그 안에서 진정한 주체로 서려는 노력의 시간을 갖게 하려는 것이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탐구하려는 모든 자세를 우리는 ‘예술’이라 부른다. 예술의 모든 장르는 그러나 그 진정성을 완벽하게 구현해낼 수 없다는 한계도 인정한다. 그 추상적 목표의 끝은 다른 말로 ‘본질’이라 하겠지만, 한편으로는 ‘본(本)’이라는 말이 스스로 이야기하고 있듯이 ‘뿌리’에 대한 이야기다. 그 뿌리는 각자 생각하는 인생의 환경에 대한 인식과 서사, 그리고 관조를 넘어 깊이 개입되는 대상으로서의 오브제로 풀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조형예술 매체 이론의 주목할 만한 학자인 볼프강 울리히Wolfgang Ullrich는 그의 저서 ‘예술이란 무엇인가 Was war Kunst?’에서 당대 미술가들은 편견 없이 동의를 했지만 대학의 미술사학과에서는 지난한 과정을 거친 후에야 수용되었다는 ‘예술 의지’에 대해 설명하며 이를 끌어들인 주요 학자로서 알로이스 리글Alois Riegl과 빌헬름 보링어Wilhelm Worringer를 소개한 바 있다. 먼저 리글은 작가의 능력과 철저히 대비시킨 의지가 ‘내면적’이고 외적 요소와 싸움을 벌인다고 함으로써 “이 개념이 인류학적으로 상존하는 요소로서의 지위를 부여했다는 중요하다.”고 평가했으며, “예술 의지는 개개인의 의지를 벗어난 것”이라고 부연했다. 그것은 “예술을 창조하는 생각”이라는 초기의 표현을 수정한 것이며 “미학적 충동”이라는 단어에 더 부합하는 “인간의 모든 의지”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울리히에 따르면 리글의 논문 ‘자연이 만든 작품과 예술작품'(1901)은 인간이 지닌 예술 의지의 발전을 자연이 만든 작품이 지닌 “우주와 결합된” 동시에 “고립된” 형상의 이중성과 결합시켰다. 그리고 보링어는 논문 ‘추상과 감정이입'(1906)을 통해 ‘예술 의지’는 “형식 의지로 태어나고,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내적 요구”로 좀 더 자세하게 정의했다. 그리고 “능력은 의지의 결과로 생겨나는 부착적인 현상”이라고 함으로써, 추상화된 순수 ‘예술 의지’와 그의 개인적 의견 표명의 형식을 명확하게 구분하지 못했던 리글의 한계를 극복하였다.
물론 미술사학의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논리의 역할에는 시대나 문화를 넘어 의지와 능력의 가치를 재평가하게 된 점도 중요하다. 그러나 필자가 여기서 굳이 ‘예술 의지’를 상술한 이유는 그것이 보링어에 의해 세분화된 “추상을 향한 충동”과 “감정이입에 대한 충동”이 태인 작가의 작품에서 결합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를 정리하면, “인간은 외부 세계에 대해 특정한 신뢰 관계를 형성하며 자신이 인지한 것을 모방하는 일에서 만족감을 얻는” 동시에 “외부 세계의 현상으로 인해 생긴 내적 불안이 예술적 창조의 뿌리로서 두려움”을 이야기하며 “인간이 엄청나게 혼란스런 세계상과 직면했을 때 휴식을 얻을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들려는 위대한 시도”로서 ‘추상화’를 시도한다는 것이다. 여기서의 ‘추상화(抽象化)’는 흔히 극사실화(極寫實畫)와 대척점에 놓이는 장르(抽象畵)가 아닌 과정으로서 앞서 말한 자연, 즉 “개별적이고 고립된 대상”을 “확인해서 붙잡고, 그것의 윤곽을 명백하게 파악하려는 요구, 다시 말해 그것들을 더욱 안정된 형식으로 생생하게 그려내려는 요구”인 것이다.
“돌아가신 어머니와 흙으로 빚은 도자기를 통해 인간은 결국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을 깨달았다. 아름다운 날들은 과거를 기억하는 현재와 꿈꾸는 미래에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각각의 바다를 지닌 존재다. 바다의 푸른 빛깔을 지닌 청자는 우리가 살아가는 날들처럼 균열을 머금고 있지만 아름답다. 자신의 몸을 태우고 있는 촛불은 인간의 간절한 염원을 표현하였다. 촛불의 희생은 나를 바쳐 너를 이롭게 하는 이타적인 행위다. 스스로 빛나지 못하는 달은 햇빛을 머금고 빛난다. 어쩌면 우리가 삶을 영위하는 세상은 태양이기보다 달에 가깝다.”
앞은 이번 연작에 대한 태인 작가의 첫 작업 노트 주요 부분이다. 극사실화를 그려온 태인 작가는 자신의 뿌리가 부모님이 업으로 삼으셨던 도자기에 담겨 있음을 잊지 않고 있으며, 그 본질로의 회귀에 대한 노력을 이번 전시로 보여주고자 한다. 여기서는 그 어렵다는 극사실주의(hyperrealism)에 대해 잠시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이는 회화사에서 근대를 호령했던 사실주의(realism)가 카메라의 등장으로 심각한 타격을 입어갈 즈음 인상주의(impressionism), 초현실주의(surrealism), 추상주의(abstractionism), 팝아트(pop art) 등으로의 우회하거나 타협을 시도한 여러 갈래의 사조 속에서 오히려 ‘정면승부’를 펼쳐 실제보다 더 실제 같은 느낌, 즉 고도의 손맛으로 빛의 기계적 포착을 이겨내 온 장르이다. 따라서 극사실화풍을 정교하게 지켜내기 위한 노력은 그 자체로도 자신이 진정한 ‘화가’로서 살아가고자 하는 극기의 몸부림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도 시간과 기술을 건 초집중의 수행과도 같은 작업을 하고 있는 태인 작가는 자신의 뿌리인 부모님이 생전에 업으로 삼으셨던 도자기를 새로운 차원 안에 체화하는 작업으로서 그림을 그린다. 본래는 구형 기반의 입체를 띤, 그리고 구면 위에 앉는 빛의 왜곡과 디테일이 상당한 장식, 색을 다시 평면에 재현해내는 노력이다. 도자기는 빚어내고 고열로 구워내며 과감히 부수어 없어지는 과정을 통해 세상에 살아남는 치열함을 보여주기도 하며, 세상에서 가장 달을 닮은 오브제이기도 하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작가는 본질인 동시에 매체로 인식되는 세 가지의 소재로서 도자기, 달, 촛불을 그리는 작업을 통해 개인적 차원의 표현인 동시에 인간이 보편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은유를 시도한다. 그렇게 작품은 “Ceramic Story”라는 하나의 제목 아래 수 십 개의 넘버링으로 쌓여나간다. 앞서 2008년부터 2015년까지 각자의 대상을 제목으로 하여 “병 연작(Bottle Series)”로 묶었던 작업들은 현대사회가 가진 ‘줄서기’의 모습을 자본주의 문화상품이 도열한 모습을 극사실화로써 형상화한 것이라면, 이번 연작은 사실상 ‘달’이라는 하나의 “개별적이고 고립된 대상”을 ‘도자기’와 ‘촛불’로 반영(reflection)함으로써 세 개의 대상, 즉 객체가 주체로서의 작가의 ‘예술 의지’와 능력을 만나 ‘본질로 회귀’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는 달빛이 직관적으로 구현하는 바와 같이 그 의미나 타당성이 시간을 초월하는 ‘영원’이다.
물론 어떤 미학은 ‘반영’의 가장 중요한 오브제로서 응당 수면이나 거울을 지목하곤 하지만, 백남준이 “달은 가장 오래된 TV”라 한 것처럼, 달은 우리에게 가장 가까이 떠있는 별이자 둥긂의 미학을 상기시키는 강력한 매체로서 은유적 해석에 약간의 다양성을 허용한다. 눈부시지 않을 정도의 명료한 반사광을 매일 밤 받고, 또한 사유를 위한 최적의 조명으로 활용하는 우리 인간에게 달은 이미 실재하는 동시에 가상적인 차원이라 하더라도 충분히 하나의 준거가 되는 이상향을 형상화하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많은 문학에서 달은 범접할 수 없는 세계인 동시에 고상한 인간형의 근원으로 상징되어 왔고, 과학적으로도 우리가 보고 있는 빛은 수억 년 전 출발한 반사광이었다고 하니 우리가 시간을 초월하여 세상을 대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중요한 관점을 담고 있는 그 무엇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불에 달구어지고 빛을 올려다보며 사유하는 극기와 사유의 존재이면서도 흔들리는 촛불처럼 위태로운 개개인일 수밖에 없다. 도자기로부터 달을 보는 태인 작가는 본 전시를 통해 도자기, 달, 그리고 촛불을 통해 우리가 본질로 회귀해가려는 주체로서의 의지와 동시에 던져진 현존재로서의 실존성을 보여주는 ‘예술 의지’의 매개자 역할을 한다. 이 전시를 통해 감상자들은 작가가 거는 그림으로서의 대화에 참여하여 인간 보편의 ‘예술 의지’와 그것을 능력으로 파생하여 ‘뿌리’라는 자연의 원초적 윤곽을 역설적으로 추상화하려는 극사실 기법의 작가가 보여주는 ‘예술 의지’를 만남으로써 각자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태인 작가의 작업은 개인적 차원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인간이 보편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메타포이기도 하며, 예술가로서 ‘본질에 대한 회귀 의지’를 보여주는 것은 일방적인 선언이라기보다는 감상 대중에 대한 하나의 제안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를 통해 전시장을 찾은 감상자들이 서로 독립적일 수 있는 오브제와 자연물, 그리고 특정 대상에 대한 의미를 통합적으로 연계하여 볼 수 있는 사유의 기쁨을 공유하고 각자의 삶을 지탱하는 시각적이거나 미학적인 모티브를 찾을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는 작가의 말로 이번 전시 서문의 결론을 갈음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배민영(예술평론가)//
장소 : 오션 갤러리
일시 : 2020. 09. 08. – 09.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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