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에 짓눌린 속세와 달리 산사의 아침은 평화롭고 넉넉했다. 지난 21일 오전 10시, 경남 양산시 통도사 서운암. 산사를 안은 듯 품은 영축산의 푸르름은 그 생명의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하는 듯했고, 숲속에서 들려오는 뭇 새소리는 자연의 죽비소리처럼 듣는 이의 귀를 쫑긋거리게 했다.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 사찰 중 불보 사찰인 통도사의 성파 방장(方丈) 스님이 계시는 서운암으로 가는 길. 영축산이 뿜는 산 기운을 음미하며 느릿느릿 가는 길에 공작 한 마리가 낯선 이를 맞는다. 갑자기 그 화려한 날개를 부챗살처럼 쫙 펼치는 바람에 순간 멈칫했지만, 평소 보기 힘든 광경에 한참이나 공작과 마주 서서 대거리(?)했다. 이윽고 왼쪽 숲속으로 난 길을 따라 조금 더 가니 회색 털실 모자를 쓴 성파 스님이 미리 나와 반갑게 맞아 준다. 온화한 미소가 초면인데도 방문객을 편안하게 한다.
“오던 길에 공작의 환대를 받았습니다. 아름다운 날개를 활짝 펼치는 귀한 모습을 모처럼 잘 구경했습니다.” 공작 이야기로 말문을 텄다. “원래 모두 5마리가 있었는데, 담비의 공격으로 3마리가 희생되고, 이제 2마리만 남았다”라고 했다. 스님이 거처하는 방으로 옮겨 본격적인 이야기를 이어 갔다.
Q. 불기 2564년 ‘부처님 오신 날’ 봉축식이 30일 열립니다. 현대인에게 부처님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A. “2500여 년 전이라고 하면 오래된 것 같지만, 지금과 많이 떨어졌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인간의 삶은 계속 연결돼 이어져 왔기 때문이다. 연결이 안 됐으면 격차가 있어 오래됐다고 할 수 있지만, 연결이 돼 있어 지금과 시간을 따질 게 없다. 시대상과 삶은 달라졌지만, 진리는 변함없이 우리와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Q. 진리가 곁에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A. “그러니까 부처님 말씀을 잘 듣고 새겨야 한다. 진리는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늘 우리와 함께하고 있다. 따라서 일상생활에 별도로 접목할 필요가 없다. 이미 우리와 접목된 것인데, 평소 이를 알아채느냐, 못 알아채느냐의 문제가 있을 뿐이다.”
Q. 사찰에 오면 더 좋은 방법을 알게 될까요.
A. “부처님의 8만 4000 법문이 모두 진리에 이르는 이정표다. 길을 모르고 헤매는 것보다 가르쳐 주는 길로 간다면 쉽고 빠르게 갈 수 있지 않겠나. 그래서 스님의 법문을 들으면서 공부하는 것이다. 그런 다음 일상 속에서 몸소 행동해야 한다. 이를 제시한 것이 팔만대장경의 내용이다.”
Q. 코로나19로 요즘 많은 사람이 힘들어합니다.
A. “산문에서 구체적인 코로나19의 치료법에 대해서는 뭐라고 언급할 수 없지만, 인간의 자만 문제는 짚어봐야 한다. 뭐든지 ‘하면 된다’는 생각에 취해 자연에 순응할 줄을 모른다. 예전에는 달님도 믿고, 해님도 믿고, 산신도 믿었다. 어리석어서 그런 게 아니다. 나를 살 수 있게끔 해주는 자연환경 자체를 감사하게 생각한 것이다. 이를 미신이라고 치부하는 것 자체가 잘못됐다. 내가 소중하듯이, 내 주위의 모든 것도 다 소중하다. 이런 자연을 너무 무시하면 안 된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여러 신을 믿은 것이다. 꼭 신이 있어서라기보다 내가 마음을 그렇게 먹는 것 자체가 하심(下心)이다. 상대를 존중하는 자세다. 이를 과학적으로만 판단해서 안 좋게 보면 곤란하다. 현대 세계가 아무리 달나라를 가고, 별세계를 가더라도 인간 밖에 있는 것을 무시하면 안 된다. 이는 자기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다.”
Q.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면서 종교에 대한 시각이 바뀌고 있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A. “종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면 그런 현상이 올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또 종교인 자체도 그것에 맹종하느냐, 아니냐에 따라 종교의 가치가 다르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런 부분들은 말을 하지 않아도 모두 알고 있기 때문에, 달리 말할 것은 없다. 모두 스스로 알고 있는 문제다.”
Q. 스님께서는 도자기, 민화, 글씨, 옻 공예 등 많은 분야에서 예술적 성취를 이뤘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A. “여러 가지를 했는데, 사실 하나도 제대로 한 게 없다. 하나도 옳은 게 없다. 한 가지를 한평생에 걸쳐 전념해도 될까 말까 한 데, (여러 가지를 해서) 잘 될 수 없다. 그래서 옳은 게 하나도 없다.”
Q. 예술과 수행은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A. “나는 꼭 예술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를 하지 않는다. 수행 따로 있고, 예술이 따로 있어서 하나가 다른 하나의 방편이 된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연결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그래서 어떤 목표를 세워 놓고 하지 않는다. 일상생활 속에서는 길을 정해 놓고 이를 따라가는 것이 정상이라고 한다면, 나는 길 없는 산속에서 이리도 가보고, 저리도 가보고 하면서 길 없는 길을 헤매는 것이다.”
Q. 도자기, 민화, 글씨, 옻 공예 등이 스님에게 모든 같은 것입니까, 다른 것입니까.
A. “다르면서도 같다. 도자기나 그림, 옻 공예처럼 밖으로 나타나는 모습은 다르다. 하지만 한 사람이, 한 솜씨가 하는 것이니까 모두 한 가지라고 할 수 있다.”
Q. 스님께서도 작업이 잘 안 돼 짜증이 날 때가 있습니까.
A. “맘대로 안 된다고 짜증을 내면 이는 승부욕과 관계되는 것이다. 하는 일에 대해 미리 답을 내지 않는다. 아예 승부욕을 갖지 않으면 맘대로 안 된다고 짜증 날 일도 없다. 결과보다도 일하는 자체에 최선의 노력을 하는 것이 재미다. 결과는 잘 나올 수도 있고 안 나올 수도 있으니까, 결과는 결과대로 맡기고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노력하면 된다.”
Q. 현재 100만 권 도서 모으기 운동을 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A. “30만 권쯤 모였는데, 상한선은 없다. 앞으로 몇백만 권이 될지 모르지만, 계속 수집할 계획이다. 요즘엔 스마트폰이 있어서 책이 필요 없는 시대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책은 아무리 말해도 소중하다. 지금 우리는 동시대에 살고 있어도 연령별로 생각이 다르다. 70, 80대 노교수들의 책에 대한 생각은 지금의 젊은 교수들과는 다르다. 당시 노교수들은 끼니를 굶어 가면서도 책을 사려고 했다. 책이 얼마나 귀중한지 몰랐다. 오로지 책을 사서 공부해 목적을 이뤄야 한다는 마음으로 살아온 세대이다. 책은 분신이나 마찬가지였다.”
Q. 왜 하필이면 사찰에서 도서 모으기 운동을….
A. “농부가 논밭이 없으면 안 되는 것처럼, 책은 학자에게 논밭이나 마찬가지다. 그것으로 연구하고 가르치고 또 먹고살았다. 그런 책이지만, 지금은 도서관에서조차 받아주지 않는다고 한다. 이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고 들었다. 이거는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우리나라에 등록된 도서관이 3000곳이 넘는다고 하지만, 역시 운영 등 문제로 책을 받아 줄 형편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많은 책을 모두 버릴 수밖에 없는데, 이건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결국, 활용할 수 있는 땅을 보유하고 있는 사찰이 나설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됐다. 이런 일은 땅이 있고, 스님이 있는 사찰이 국가적인 차원에서 꼭 나서야 할 일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앞으로 이것보다 더 큰 일이 없다. 현재는 코로나19 때문에 조금 주춤한 상황이지만, 어느 정도 안정되면 언론이나 대학에도 공문을 보내 정식 운동으로 시작하려 한다.”
Q. 그 많은 도서를 어떻게 활용할 계획인지….
A. “가칭 ‘세계도서문화보존회’를 구상하고 있다. 요즘은 세계화 시대여서 우리나라에 있는 책만 모아도 전 세계에서 출판된 책을 모두 구할 수 있다. 일단 현재는 수집하는 것이 목적이다. 보관 장소나 비용을 일일이 생각하면 이런 일은 밀고 나갈 수가 없다. 일단 일을 시작해 놓으면, 누군가는 이어서 계속하게 돼 있다. 모아 놓은 장서는 분류 작업을 거쳐 컴퓨터로 쉽게 찾아볼 수 있도록 할 것이다. 통도사는 종교인이 아니라도 많은 관광객이 찾는 곳인 만큼 이 도서를 활용하면 통도사 전체가, 아니 영축산 전체가 거대한 도서관이 되는 것이다.”
Q. 사찰과 일반 도서관의 기능 양립이 어떻게 가능한지요.
A. “집 없는 도서관, 땅 자체가 도서관이라고 생각하면 쉽다. 수백만 권의 도서를 모아 놓은 다음, 통도사는 물론 영축산 곳곳에 수만 개의 의자를 설치해 거대한 도서관으로 만드는 것이다. 숲속에서 아이, 어른은 물론 가족들끼리, 연인들끼리 와서 책을 보고 또 한편으로는 휴식을 취하면서 정신적인 안식을 얻는다면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을 것이다. 내가 있는 동안에는 이를 실현하지 못할지라도 방향만은 꼭 정해 두려고 한다.”
Q. 갈수록 독서 열기가 떨어지고 있는데, 어떤 효과가 있을까요.
A. “계절의 변화처럼, 시류 역시 바뀔 수밖에 없다. 독서의 바람이 불 때가 온다. 그럴 때를 대비해야 한다. 효과가 없다고 생각하지 말고, 앞으로 이런 운동을 해야 한다. 요즘은 독서도 갇힌 공간에서는 하지 않으려고 한다. 바람도 불고, 새도 울고, 꽃도 피는 자연 속에서 하고 싶어 한다. 아이들과 놀면서 부담 없이 독서하고 싶어 한다. 계곡의 물소리, 새 소리와 어우러지는 독서는 마음을 잡는 고삐라고 할 수 있다. 앞으로 정신적인 문제를 치유하는 중요한 실마리가 될 수 있다. 다른 나라에서 하지 않고 있을 때 우리가 먼저 시작한다면 통도사는 물론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 높은 문화 수준을 갖게 된다.”
스님의 책 모으기 운동은 단순한 도서 수집 차원이 아니라 사찰의 역할과 인간의 정신 문제로까지 이어지는 큰 그림과 연결돼 있었다. 이야기를 마칠 즈음, 올 추석 때 완성을 목표로 3년째 작업 중인 실물 크기의 거대한 옻칠 ‘반구대 암각화’와 ‘천전리 각석’ 창작품의 마무리 손질에다 방장 업무까지 해야 하는 성파 스님의 일과가 궁금했다. “어떻게 시간을 쪼개고 있습니까”라는 물음에 스님의 심심한 대답이 되돌아왔다. “쪼개는 게 따로 있나. 나날이 그냥 부딪히면서 넘어가는 것이지….”//2020년 5월 27일 부산일보 보도, 곽명섭 논설위원//
장소 : 통도사 성보박물관
일시 : 2020. 05. 29. – 06.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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