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소개글//
빨간, 노란, 하얀 들꽃들은 서로 겨루듯 수직으로 뻗어나갔다. 들길 끝자락엔 무성히 자란 방죽의 풀들이 마치 호위병처럼 까칠하게 통과의례를 치르듯 가는 바람에도 이리저리 늘 과장되게 흔들렸다.
그 경사진 풀숲엔 꼬불꼬불 좁은 길이 나 있었는데 거기만 오르면 확 트인 정경이 펼쳐졌다. 화이트 사파이어(sapphire)처럼 영롱한 물빛을 튕기며 유유히 흐르는 강물이, 비 온 뒤 굳어버린 움푹 패인 소달구지 자국 강둑길엔 일찍 학교를 마친 반소매 교복의 아이들 몇이 재잘거리며 귀가하고 있었다.
숲은 언제나 각(角)을 세우진 않았다. 캄캄한 어둠 여름 폭풍우가 몰려올 때,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길 잃은 새끼 양을 찾아 마을 사람들이 손전등을 들고 맨 먼저 찾아 나선 곳은, 길 다란 방죽 아래 융단처럼 펼쳐진 들풀 숲이었다. 그런 때면 풀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새끼를 안전히 감싸 바람을 막아주고 있는 놀라운 광경을 보여주곤 했던 것이다.
비가 그치고 물안개가 조금씩 형체도 없는 공기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연극무대가 오르듯 서서히 아침이 그 자리에 점점이 빛을 드리우면 맨 먼저 막 잠에서 깬 뽀송한 얼굴의 꽃들은 이리저리 고개를 치켜들었다. 알록달록 여러 음표가 앙증맞게 매달려 화음이 끝날 때까지 긴장을 놓지 못하게 하는 아이의 학예회 발표처럼 키 큰 나무들 아래서 조금씩은 꼼지락거리며 질서 속에서 평화로웠다.
“이 꽃 이름은 뭐예요?” “응, 이건 민들레고 달맞이꽃은 얼마 있으면 피어나지. 이건 접시꽃나무, 요건 잘 모르겠네.” 아빠가 친절하게 대답하는 동안 아이는 벌써 엄지와 검지를 오므렸다 펴며 나비를 좇다말고 나무 아래에 서서 뭔가를 자꾸만 쳐다보고 있었다. 아하, 지난 여름 매미를 처음 본 아이는 밤늦도록 누이의 공책에 매미를 그리다 잠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렇게 성장한 소년은 아버지가 늘 육중한 짐을 얹고 장터에 나가는 자전거를 살며시 꺼내 황토가 섞여 울긋불긋한 띠처럼 이어진 긴 강둑길을 미래의 화려한 비상(飛上)을 꿈꾸며 이마에 땀이 흐르는 줄도 모르며 페달을 밟았다. 그런 저녁은 어둠 내린 그 방죽 숲에 홀로앉아 저기 멀리 하나 둘 불 켜지는 마을을 한참 바라보다 늦은 시간 들어가기도 했다. 衆鳥同枝宿(중조동지숙: 뭇 새들 한 가지서 잠을 자고는)/ 天明各自飛(천명각자비: 날 밝자 제각각 날아가누나) <작자미상, 이수광 ‘지봉유설’에 나오는 작품>
새는, 부산스런 날개 짓이 고별(告別) 인사였던가. 부대끼며 살아 더욱 그리움이 컸을까. 한 마리가, 부비며 자던 가지 초록 잎 푸르른 달빛 내려앉은 야심한 시각 귀환하면 정(情)은 깊은 밤 훠이훠이 되살아 돌아왔다. 그리고 거칠 것 없이 독하게 견뎌 솟아오르는 저 들꽃도 그런 밤엔 못내 훌쩍이며 고백록을 펼쳐 보이는 것이었다.//권동철 문화전문 기자 kdc@asiae.co.kr//
장소 : 갤러리 아이링
일시 : 2020. 03. 31. – 04.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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