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철 (민주공원 큐레이터)
“191023_반찬점 / 가지 가지 많은 날엔 가지를 다듬어. 가지 콧등 내음이 잠을 깨울 거야. 가지를 가지 가지 나누다 보면 머리가 말끔해지지. 참기름은 두르는 거야. 참기름 두른 가지 가지는 별빛을 두른 고래처럼 빛이 나. 이제 간장으로 간을 맞추어야지. 다진 마늘 내음이 바람에 스치우지? 아. 오늘은 깨가 없구나. 그렇다면 꾀를 내어야겠어. 오늘 반찬점은 꾀를 내는 것으로 마무리. 이제 반찬으로 점을 치고 있어. 나는 점성술사랑 연금술사랑 마법사랑 닮아 가고 있어. 인샬라~ 아미타불~ 아멘~”(글쓴이의 페이스북 2019년 10월 타임라인 참조)
반찬을 하지 않은 날은 꿀꿀하다. 부엌에 가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부엌에 가지 않은 날은 새벽시장에 가지 않은 날이다. 새벽에 숲에 가지 않은 날은 새벽시장에 가지 않은 날이다. 화가는 그림을 그리고 나는 글을 쓴다. 글 쓰는 나는 ‘숲길걷기-새벽장보기-반찬만들기-글쓰기’로 이루어져 있다. 숲길, 새벽, 반찬, 글은 온몸으로 만나는 시간이고 공간이고 재료들이다. 발로 쓰고 손으로 쓰고 때론 숨결로 쓴다. 글쓰는 일은 갖가지 몸들이 세상의 몸들과 만나 빚어내는 반찬이다. 우리의 아궁이는 이어져 있다.
은세계의 인류학
‘은세계’라 부르고 싶었다. 1970년에 태어나 1989년 미술대학을 가고, 졸업 후 1997년에 첫 개인전을 열고, 살림을 차려 아이를 키우다가, 다시 2007년 두 번째 개인전을 열며 짬짬이 열여섯 번 개인전을 치른 쉰 살의 작가. 간간이 붓을 놓을 수밖에 없던 때도 있었겠지만 삼십 년을 끊임없이 그려온 작가의 여정에 제 이름자 하나를 담아 ‘은세계’라고 부르고 싶었다.
예술가는 세상의 틈을 보는 이다. 낯선 눈으로 바라보고 날선 말로 그려내는 이다. 틈 사이를 얼기설기 엮어 그물을 짜는 이다. 그들이 세상에 던진 그물 사이로 세계의 낯선 꼴이 몸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리하여 예술가는 세계를 만드는 이다. ‘은세계’는 작가 윤은숙이 제 온몸을 던져 30년 동안 쌓아놓은 제 아궁이이다. 아궁이를 들여다본다. 아궁이는 흙과 불과 바람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대목에서 펑크(funk) 그룹 ‘Earth, Wind & Fire’ 형아들이 부른 ‘September‘를 잠깐 들으며 아궁이 바다로 풍덩~~~. 윤은숙이라는 집은 ’아궁이-고래-굴뚝‘으로 이어지는 미적 고리를 거쳐 드러나는 세계이다. 출렁이는 굴뚝과 일렁이는 고래와 꿈틀거리는 아궁이가 따로 또 같이 빚어내는 목숨이다.
출렁이는 깃 : ‘없음’의 있음
은세계에서 굴뚝으로 피워 올리는 꼴들은 갖가지다. 나무, 숲, 집, 길의 형상들. 빛, 바람의 기운들. 그 사이에 가로놓인 사람들. 생활의 언저리에서 만날 수 있는 익숙한 형상, 기운, 사람을 고요히 들여다보는 시간이 오래도록 이어졌다. 형상의 거죽 보다는 뼈를 가만히 만져보고, 기운들이 움직이는 길에 몸을 실어 보았고, 거기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쓰다듬어 보았다. 형상, 기운, 사람이 만나 빚어내는 꼴들을 오래도록 지켜보고 있었다. 현재에는 과거가 깃들어 있다. 과거에 잊었거나 잊으려고 했거나 잊었다고 여겼던 것들이 현재라는 시간의 굴레 위에서 되살아났다. 2007년 두 번째 개인전부터 2010년 세 번째 개인전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주제들은 생활세계의 질료들을 낯선 눈으로 가다듬어 보고 알아차리는 여정을 담고 있다.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고, 숨어 있던 것들이 드러나고, 없던 것들이 나타나는 순간, 세상은 이제 예술세계 안으로 들어온다.
일렁이는 꿈 : ‘없음’의 찾음
왜 피어오르는지 알 수 없었다. 어디서부터 피어오르는지 알 수 없었다. 궁금했다. 눈을 내 안으로 돌려 내 안의 소리를 듣고 싶었다. 내 안의 소리를 들으려 하자 내 바깥의 소리가 함께 울리고 있었다. 나를 사이에 두고 안과 밖의 소리가 어렴풋이 이어지는 길을 따라가 볼 수 있었다. 몸을 던져, 보이지 않고 알 수 없고 어디로 이어져 있는지도 모르는 고래 속 길을 더듬어 보았다. 처음 만나는 낯선 결과 깔을 그려내고 싶었다. 그림의 꼴을 뚜렷이 그리기 보다는 그림의 결을 살리고 깔을 입히며 내 소리의 길을 찾고 싶었다. 2011년부터 2013년 동안 작가는 나뭇잎에 물감을 묻혀서 색을 칠하거나 물감을 흘려보며 결과 깔을 찾아보려 했다. 나뭇잎에 물감을 묻혀 흩뿌리는 작업은 붓에 물감을 묻혀 칠하는 행위와는 사뭇 다르다. 나뭇잎은 그리는 이와 한 몸이 되어 움직인다. 생각한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이 그림틀에 그려낸다. 무의식의 마음이 예술세계의 몸을 직조한다. 삶 또한 그렇지 아니한가. 생활세계의 질료가 예술세계 안으로 들어와 세계의 목숨으로서 제 몸매를 갖추어가는 과정은 놀랍다.
꿈틀거리는 틀 : ‘없음’의 자리
아궁이는 본디 그 자리에 있었다. 아궁이는 본디 이야기를 품고 있다. 본디 이야기는 본풀이이다. 본풀이는 이야기의 이야기이다. 이야기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밝히는 이야기이다. 이야기의 바닥, 이야기의 바다, 이야기의 바탕에 도사리고 있다. 전라남도 바닷가에서는 바다를 ‘바닥’이라 한다. 이야기를 사이에 두고 바닥, 바다, 바탕을 하나의 말이라고 우기고 싶다. 태초에 이야기가 있었다. 이야기는 세계의 바탕이다. 이야기로 말미암아 세계가 있다. 은세계는 예술세계에서 잊혀졌거나, 짐짓 모른 체 했거나, 일부러 따돌렸던 세계를 불러내었다. 바닥에 도사리고 있었으나 숨죽이고 있었던 세계, 꿈틀거리는 꿈의 틀을 불러낸 것이다. 2014년부터 2016년까지 예술창작공간의 미술기획자로 잠깐 일을 하던 시기를 거쳐, 작가는 바닥의 바탕을 치고 은세계의 형상과 기운과 사람들을 쏟아내고 있다. 형상들은 결을 갖추고 있고, 기운은 장단을 타고 있으며, 사람들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이들이 빚어내는 소리는 별들이 제 꼬리를 이끌고 우주를 헤엄치는 음악에 가깝다. 음악은 귀를 담아야 들린다. 귀로 만져야 보인다. 귀는 손이고 귀는 눈이다. 당신의 귀를 잡아끄는 낯선 은세계의 문턱을 넘고 싶지 않은가?
작가 윤은숙은 은세계를 불러 일으켰다. 네 발로 엎드려 있던 세계를 불러 일으켜 두 발로 서게 했다. 두 발로 서면 눈길이 달라진다. 위아래 앞뒤를 자유롭게 볼 수 있다. 하늘을 바라보며 겅충겅충 춤 출 수 있다. 앞발이었던 손이 자유로워 서로 안을 수 있다. 함께 손을 잡고 걸을 수 있다. 은세계는 함께 노래하고 춤추고 사랑하는 세계이다. 부디 예술이 그러했으면 좋겠다. 우리의 예술은 이어져 있다.//신용철//
//신뢰할 만한 풍경에 관하여//
- 윤은숙 개인전, ‘너머 깃든’
정재운
작품 ‘충만의 숲'(162.2×224.2cm_Acrylic on canvas_2019) 앞에 서서 부상하고 가라앉는 갖가지 느낌들을 들여다봅니다. 개중 가장 오랫동안 필자의 마음을 붙드는 걸 떼어내 확인하니 ‘신뢰’더군요. 알다시피 신뢰하다(rely)의 어원은 ‘단단히 묶다’라는 라틴어 ‘religo’에서 왔다지요. 작품을 통해 신뢰라는 어휘를 떠올렸다는 것은 작품(작가)이 수용자와의 어정쩡한 거리를 바투 묶어버렸다는 말일 겁니다. 이번 전시 전까지, 몇 차례 그녀의 작품을 만난 적 있습니다. 그 몇 번의 만남이 날 꽁꽁 묶어버렸나 보죠. 항복하듯 신뢰의 끈을 잠시 느슨하게 풀고, 작품을 톺아봅니다. 구체를 이루고 있는 초록의 군집이 화폭의 가운데에서 오로라에 휩싸여 있습니다. 지구라는 작은 별이 태양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공전하듯, 윤은숙이 창조한 이 구체 역시 저 홀로 떠 있는 게 아니라 화폭 밖으로 비집고 나온 보이지 않는 끈에 의해 뭇 별과 별들의, 다른 작품과 작품들 속의 상(想)과 상들과 만나고 있으리란 생각을 해봅니다. 물론, 이 같은 읽기에 함부로 신빙성을 부여할 수는 없습니다. 신뢰성(reliability)이 사실 여부, 참 거짓을 떠나 안정된 일관성의 세계에 속한 언어라면, 신빙성(credibility)은 정확한 참을 의미하는 존재론적 개념의 언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신뢰라는 말에서 느껴지는 기대와 믿음의 향기가 신빙성이란 말에는 들어있지 않지요. 당신이 그녀의 작품에서 허공에 뜬 풀무더기만 보았다면, 어서, 이편으로 건너오시라 말하고 싶습니다. 이제부터 필자는 신빙성 없는, 그러나 신뢰로 가득 찬 세계의 언어로 윤은숙의 작품을 읽기 시작할 거니까요.
그렇지만 말예요,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라는 의문부터 채워 그 신뢰의 기준쯤은 마련해야할 것 같습니다. 이럴 땐 뭔가 거창한 것에 기대기 쉬운데, 어디 그녀의 작품이 그러하냐고요. ‘생명의 흔적'(112×145.5cm_Acrylic on canvas_2019)에는 그야말로 작은 생명에 관한 서사가 무궁무진하게 들어있습니다. 작품을 마주한 이들은 객관이 배제된 세계에서, 오롯이 주관적 자아가 불어넣은 숨결이 약동하는 서사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이 갖가지 이야기들에서 우리는 저마다 재구성한 사실(reality)과 진리(truth)를 사후적으로 추인해갈 텐데, 이 과정에서 ‘객관’이 라틴어 오부젝툼(obiectum)에서 왔다는 사실을 상기하는 것은 우리가 마련하려는 신뢰의 기준에 퍽 중요한 누빔점을 제공하는 듯합니다. 건너편(의식 안)으로 ‘던져버린 표상’이라는 어원을 통해 객관이란 데카르트와 로크를 거치기 전까진 의식 바깥의 인식 대상으로 설정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던 것이 칸트와 피히테를 통하여 근대적 자아가 확립되면서 주관적 자아는 객관적 대상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주관과 객관이 분리되자, 우리는 주관적 자아가 아닌 모든 걸 객관적 대상으로 인식하기 시작했죠. 네. 근대가 낳은 합리주의나 법과 기술, 제도 따위는 모두 이 객관을 토대로 합니다. 이쯤 작품 하나를 더 들여다볼까 합니다. ‘기억을 불러 일으켜'(162.2×130cm_Acrylic on canvas_2019), (53×45cm_Acrylic on canvas_2019)에는 만면에 평화가 흐르는 머리 하나가 있습니다. 흡사 불상을 떠올리게 하는 이 고요한 얼굴엔 외부로 향하는 창(눈)을 닫(감)음으로 내면을 향해 활짝 열려있습니다. 그의 내면에는 울창한 자연이 담겨있군요. 그렇다면 숨이 붙어있는 모든 것을 조화롭게 품고 있는 저 자연(이데아)은 주관의 세계에 있는 것인가요. 객관의 세계에 존재하는 걸까요. 윤은숙의 작품들은 주관적 자아로부터 벗어난 객관의 역사, 즉 인식의 역사를 역행하려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녀가 캔버스로 옮기어낸 것은 마음이 실재를 구성하는 세계입니다. 그렇다고 의식 바깥에 존재하는 객관과의 균형을 포기한 위장된 평화도 아닙니다. 저는 기표 아래의 기의가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세계에서 최소한의 누빔점도 마련하지 못하고 결국 정신증에 걸려버린 작가 몇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 작업의 결과물을 싸잡아 좋다 나쁘다, 로 갈음할 수는 없겠지요. 개중엔 더러 뛰어난 감각으로 우리에게 시각적 충격과 고차원의 개념을 선사하는 이들도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작업에서 온화하고 포용적인 평화를 찾아볼 수 없음도 분명한 사실이지요. 윤은숙이 확보한 주관과 객관의 균형추가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더듬어 짐작해봅니다.
작가의 탁월한 균제미는 단순히 관념적인 차원에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작품 ‘우연한 밭에'(116.8×182cm_Acrylic on canvas_2019)를 처음 만난 것은 지난여름, 올해로 3회째를 맞는 ‘노동미술 展’에서입니다. 차별, 멸시, 편견으로 얼룩진 노동의 존재를 번듯한 것으로 바꾸어내려는 작품들을 면면이 만난다는 설렘의 가장 앞자리에서 윤은숙의 작품을 마주했습니다. 데칼코마니를 떠올리게 하듯 마주보는 두 얼굴 역시 그녀의 다른 작품들처럼 다양한 의미지형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노동이란 주제에 대입해보면 이렇게 읽을 수 있겠지요. 작가에게 있어 노동이란 마주보는 것이다, 라고 말입니다. ‘마주본다’는 것은 서로가 서로의 심연을 대면하는 행위이며, 행위 너머를 갈망하고 가닿으려는 의지의 형상화일 것입니다. 측면을 보이고 있는 두 얼굴은 이번에도 눈을 감았네요. 시각의 불완전성을 극기하는 과정에서 커다래진 귀는 날개처럼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귀는 구멍이 뚫리지 않은 걸로 보아 외부의 소리보다 내면의 소리에 특화되어 있나봅니다. 자, 그렇다면 이들의 눈은 언제쯤 뜨일 수 있을까요? 너무 엉뚱한 상상인가요? 그들의 귀를 덮은 깃털은 언제쯤 다 날아갈까요? 추측건대 그리 오랜 세월이 남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푸릇푸릇한 대지 위에 피어난 진달래가 보이지요? 새로운 세계의 도래를 예감케 하는 봄바람이 작가의 붓 든 손가락 사이로 지나가는 듯합니다. 네. 윤은숙이 지닌 추는 시간의 더께가 내려앉아 그만한 무게를 만들었군요.
시간의 흐름은 주관과 객관의 경계를, 내면과 외면의 경계를 흐리마리 지우죠. 보편이라 여겼던 도덕 준칙도 시간에 따라 알량해지고, 시대에 따라 요구받는 역할과 상의 변화는 그 폭을 어림잡기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만약, 인간의 삶이 바위처럼 단단해 흔들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작품을 찾을 이유도, 창조할 이유도 없을 것입니다. 이즈음 윤은숙은 마침내 시간의 마모에 대해 깨달은 것처럼 보입니다. ‘빛을 품다'(45×53cm_Acrylic on canvas_2019)와 ‘빛나는 순간'(45×53cm_Acrylic on canvas_2019), 그리고 ‘춤추게 하다'(72.7×60.6cm_Acrylic on canvas_2019)에는 이전 작품들에서 볼 수 없었던 촘촘한 가로선이 인상적입니다. 이 변화를 알아차리자마자 필자는 영화 ‘토탈 리콜'(Total Recall, 1990)을 떠올렸습니다. 이 옛날영화 속에선 텔레포트(Teleport, 순간이동)로 꿈과 현실, 과거와 현재 사이를 오갑니다. 이때, 존재는 잔영을 남기지요. 위의 세 작품은 공통적으로 생의 만개한 순간을 담고 있습니다. 이 순간은 모든 것을 옛날로 수렴시키고야마는 시간에 의해 사라질 찰나입니다. 옛날은 언젠가 현재였던 모든 시간이며, 매우 광활한 시간이지요. 그러나 동시에 기억의 영외지에 있는 시간까지 뭉뚱그려 옛날이라 부르긴 어렵습니다. 작가는 기억 속으로 빨려 들어갈 존재의 흩어지는 시간성을 화폭에 담기 위해 이 결(가로선)을 하나하나 그려 넣었을 것입니다. 그럼으로 작가가 획득하고자한 것은 무엇일까요. 필자는 이 행위를 대상에 대한 끊임없는 재인식(recognition) 의지로 느꼈습니다. 이 의지는 저만의 인식체계를 세우는 일에 가닿으며, 그것은 체계에 속하는 대상이자 체계를 구상하는 주체이기도 한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에 도달하는 재귀적 행위입니다. 이 가위바위보의 순환행위는 외적 실재의 무게와 구조를 수동적으로 수용하지 않는 작가의 의지의 반영이며, 동시에 부조리하고 불가해한 면으로 가득 찬 세계 너머의 지향입니다. 윤은숙이 캔버스로 옮기어내려 한 것은 그 너머에 깃든, 신뢰할 만한 풍경이 아닐까요.//정재운//
장소 : 달리 미술관
일시 : 2019. 12. 02. – 12. 29.
추PD의 아틀리에 / www.artv.kr / charmbit@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