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호(미술평론가)//
꽃이란 회화에 있어서 오랫동안 미를 탐색하는 전통적 화제(畫題)였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미의 조건들이 다양하게 변화되어 왔을 뿐 아니라 많은 작가들이 더 이상 숭고, 미, 추미 등의 미적 범주론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테마에 천착해 오고 있다는 점에서, 작금에 꽃이라는 주제와 소재는 ‘관습 상징’만을 도모한다는 이유로 회화에서 멀어진 감이 없지 않다.
그러한 차원에서 컨템포러리의 시대에 여전히 꽃을 소재와 주제로 삼으면서도 그것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 전두인의 작업은 일견 무모해 보이기조차 하다. 현대 회화가 좀처럼 다루지 않는 꽃을 전면에 다루고 있는 것도 그러하지만, 얼핏 보면, 우리가 익히 보아 왔던 전형적인 정물화의 양상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화병 안에 고즈넉이 자리를 잡거나, 때로는 들판 위에 흐드러지게 요염한 자태를 뽐내면서 선보이는 강렬하고도 화려한 군화(群花)의 모습은 지극히 일반적이거나 전형적인 모습이다. 심지어 꽃들이 한 결 같이 주인공의 모습으로 화폭의 한 가운데 똬리를 틀고 있는 구도는 상투적이고 관습적이기 조차 하다.
그러나 이러한 관습적 상징은 화가 전두인이 오히려 적극적으로 의도하는 바이다. 지극한 익숙함이라는 ‘관습 상징’의 배면으로부터 작가가 장치해 놓은 ‘시각적 표상(表象)으로서의 알레고리’를 관객들이 발견해 주길 내심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잃어버린 꽃’이라는 일련의 테마는 ‘미, 아름다움, 화려함, 성숙’이라는 꽃과 관련한 익숙한 상징, 즉 ‘원형 상징(Archetypal Symbol)’의 의미적 상실과 관계한다. 작가는 꽃이 드러내는 원형 상징을 다시 한 번 비트는 알레고리(Allegory)의 전략을 통해서 이 상징의 ‘상투성, 관습성’을 ‘개인 상징’(Personal Symbol)으로 역전시키고자 한다.
보라! 암술과 수술 그리고 그것을 품고 있는 꽃잎이나 꽃받침과 같은 ‘화피(花被)’가 서로 만나는 요철(凹凸)의 조형성, 프랙탈(fractal) 구조처럼 반복 생산되는 미묘한 꽃잎들의 대칭적 형태와 유선형의 폼(form) 등은 곧잘 꽃을 모태(母胎)의 여성으로 상징하기도 한다. 또한 줄기와 꽃받침이 한 덩어리로 만들어내는 통일감, 가느다란 줄기 위에 풍성한 꽃이 얹힌 비례가 만들어내는 긴장감 그리고 저마다 다른 화려하고 선명한 색은 ‘부귀, 미, 하모니, 사랑, 재생’ 등 이미지로 풀어내는 여러 상징들을 이끌어 낸다. 이것 모두는 꽃을 테마로 한 전두인의 회화에서 우리가 읽어 낼 수 있는 휠러(P. Wheeler)의 관점에서의 관습적 상징(Conventional Symbol)이다. 반면에, ‘꽃’의 정수(精髓)이자 대표적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자연’은 원형 상징이라 하겠다.
화가 전두인의 작품 제명이자 테마인 ‘잃어버린 꽃’에서 ‘잃어버린’이라는 동사의 과거 완료를 드러내는 형용구는 그의 작품이 ‘잃어버린 이후’의 ‘지금, 이곳’의 시공간에서 ‘잃어버리기 이전’의 무엇을 찾는 일련의 과정임을 드러냄과 동시에 ‘잃어버린 이후’의 무엇에 대한 반성적 자각을 함께 담아낸다. 전자의 ‘무엇’이 ‘자연’이라고 하는 꽃의 원형 상징이라고 한다면, 후자의 ‘무엇’은 ‘순수, 이상 또는 동심’이라는 전두인만의 꽃에 대한 ‘개인 상징’이 된다. “꽃의 정체는 현대인의 정서에 대한 표상이자 초상이며 동시에 순수와 이상의 상징인 것이다. 또한 후기자본주의 사회에서 동심의 잃어버린 것에 대한 그리움으로부터 시작된 동경의 대상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고 전두인이 밝히고 있듯이 말이다.
꽃은 오랫동안 생성소멸(生成消滅))하는 자연을 표상하는 ‘원형 상징’으로 자리해 왔다. 그러나 전두인에게서 꽃이란, ‘잃어버린 꽃’이라는 작품명에서 살필 수 있는 것처럼, 레테(Lethe)의 강 저편에 두고 온 현대인의 순수, 이상 또는 동심으로 치환된다. 이처럼 그에게서 지극히 개인 상징으로 치환된 꽃의 의미는 그의 회화 곳곳에 상징과 암시를 매개로 하는 시각적 알레고리의 방식으로 배치되어 있다. 먼저 한 떨기 꽃을 담고 있는 화병의 표면에 새겨진 문양들에서 우리는 그의 알레고리 전략을 발견한다. 자유의 여신상, 100달러 지폐, 그리스 시대의 전투 장면, 전투기와 탱크 등 인간 문명의 폐해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이미지를 작가는 마치 상감 기법으로 새긴 전통 문양처럼 화병의 표면 위에 천연덕스럽게 배치해 놓고 있는데, 이러한 이미지들은 작가에게 있어 순수/이상을 상실하게 만든 주원인들이자, 순수/이상과 도무지 화해할 수 없는 것들이기도 하다.
벤야민(W. Benjamin)에 따르면 알레고리란 건설과 파괴, 미몽과 각성, 실재와 허구처럼 ‘화해할 수 없는(혹은 화해하지 않는) 대립항 속에서 생겨난 예술 형식’이다. 그러니까 앞서의 문양들은 화병 속에 ‘꽂힌 꽃들’이라는 이미지와 순수/이상과 같은 개념과 반립(反立)하면서도 일정한 긴장 관계를 형성하면서 알레고리의 순간을 창출한다. 정원의 군집화 뒤로 모습을 감추고 있는 피사의 탑이나 그리스 신전의 이미지들은 또한 어떠한가? 이들 역시 꽃과 대면한 반립과 긴장 관계를 통한 알레고리를 여실히 드러낸다. 한편, 화병 옆에 던져지고 있는 주사위나 큐빅의 이미지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것들은 주사위라는 ‘우연’과 큐빅에 대한 ‘이성’이 싸우면서 상징과 암시를 통해 만드는 시각적 알레고리의 대표적 이미지들이라 할 것이다.
알레고리가 그리스어 ‘다른(allos)’과 ‘말하기(agoreuo)’의 합성어 ‘알레고리아(allegoria)’로부터 유래했듯이, 그의 알레고리적 회화에서 다르게 말하기의 방식은 도처에서 나타난다. 특히 패널 위에 유리 조각들로 만들어진 부조의 건축적 형상이 바탕면의 꽃들과 뒤섞여 있는 작품들은 ‘잃어버린 꽃’이라는 주제를 극명하게 가시화하면서 알레고리의 미학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어두운 바탕색에 피어오른 꽃병과 군집화(群集花) 이미지는 그 위에 올라선 유리 건축의 투명성의 효과로 인해서 양자의 이미지를 뒤섞으면서 자연/인공이라는 반립의 긴장 관계를 만들어 낸다. 외곽을 높이 쌓아 올린 프레임의 육중함으로 인해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이러한 대립적 만남과 긴장 관계는 더욱 극대화된다.
비유에서 원관념을 떼어 버리고 보조 관념만을 남기고 사라지거나, 이미지 위에 잠시 머물다가 사라지는 상징과 달리, 알레고리는 이미지 위에 자신의 몸을 녹이고 상징이 떼어 버린 원관념을 소환시켜 보조 관념을 보듬어 안는다. 결국 전두인의 작품에서 ‘꽃’이라는 원관념이 화면상에 주요하게 등장하지만 정작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은 시각적 알레고리로서의 ‘순수/이상’이라는 보조 관념에 관한 것이다. 달리 말하면, 작가의 작업에서 주요하게 대두되는 창작의 화두는 꽃그림이라는 형식에 있지 않고 그것의 배면에 은밀하게 숨겨둔 “화려하게 치장되고 굴절되어 버린 현대인의 정서”라는 내용과 같은 것이다. 실제로 그의 작품에서 패널 위의 건축적 구조물은 유리 조각을 중첩시켜 쌓아 올려 만든 까닭에 뒤편으로부터 투영되는 꽃 이미지는 굴절되어 나타난다. 여기서 우리는 화려하게 치장되거나 굴절된 채 수용된 꽃의 원관념과 그것의 보조 관념(개인 상징이기도 한)인 ‘순수/이상’의 의미를 성찰하자는 작가의 회화적 제스처를 곱씹어 볼 필요가 있겠다. 따라서 꽃은 그의 회화 전면에 부상한 주요한 형식임에도 관객의 ‘회화 읽기’의 시간 동안 점차 사라지고 ‘순수/이상’의 메시지만 또렷이 떠올려지게 되는 것이다.
진부한 소재로 간주되어 온 꽃을 오늘날 시대에 주요한 미적 형식으로 가져와 자신의 독창적 회화를 개척하고 있는 전두인의 작업은 모더니즘 시대에 사멸한 알레고리의 미학을 의미심장하게 소환해 오늘날의 살아있는 미학으로 정초한다. 마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고 노래한 김춘수 시인의 시 ‘꽃’에서 나타난 ‘존재적 의미의 변환’처럼 말이다. 그래서 그의 ‘잃어버린 꽃’이라는 화두는 이제 상실로부터 존재의 의미로 나아간다고 하겠다.//김성호//
장소 : 갤러리 GL
일시 : 2019. 11. 16. – 11. 30.
추PD의 아틀리에 / www.artv.kr / charmbit@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