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기수의 구도추상(求道抽象)//
구도추상은 인간의 정신적인 면을 지향하는 구도적 시각 예술이다. 모든 종교에서 그러하듯 인간이 인간들에게 사랑과 기쁨을 행복으로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평온과 명상이다. 이 명상은 인간으로서의 진정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아름다움이며, 시각을 통한 정신적인 미학이다. 즉 종교와도 같은 것이다. 종교가 영적인 아름다움이라면 예술은 현세적인 만족이다. 종교가 죽음의 섭리를 알려주는 것이라면 예술을 행복을 가져다주는 신의 계시다. 그래서 훌륭한 예술품 앞에서 우리는 숙연해지는 것이고 더한 인간적인 아름다움으로 향하는 것이다. 즉 정신적인 자유와 조화로운 자연의 순리에 따라 시간을 넘어서는 정신적인 향유로 가공된 예술과 가공되지 않는 자연으로 이끌어진다.
구도추상은 인간 내의 무한히 잠재되어 있는 감성과 이성을 통해 한걸음 넘어선 우주 밖의 세상을 바라다보게 하는 것이고 더한 자유(liberté)가 있고 숭고(sublime)가 있고 아늑함과 고요함이 있는 상상(image)의 세계다. 그 어떤 것에 구애받지 않고 그 어떤 것에 집착하지 않는 영원을 향한 우리의 여정과 같은 것이다.
구도추상이 미술사에 전혀 지적된 바 없는 개념과 어떤 이즘(Isme)에도 거론되어 있지 않은 가장 인간적인 내면인데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소홀하게 되어 진 것은 종교가 이미 오랫동안 자리하고 있었고 동시에 다양한 예술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나는 구도추상으로 향하기까지의 인간으로서의 전정한 아픔과 몸부림이 예술로 승화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선으로, 색채로, 관념으로, 상징적인 종교적 의미 등으로 여러 가지 다양하게 납득이 되길 진심으로 바라는 것이다.
구도추상은 결국 하나의 구도적인 측면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인간이 진정 나아갈 의지와 사랑 그리고 힘든 인내와 고통에서의 진정한 구도(求道)적 제시다. 때때로 기쁨과 슬픔처럼 서로 대조를 이루면서 때때로 서로 조화를 가지면서 서로의 의미에 의해 한 곳으로 이어져 나가는 등불과 같은 영원한 동경으로 가는 길이다. 형이상학적인 추상이기 때문에 어떤 형상물은 나타나지 않지만 모든 것이 한 곳으로 향하는 것만은 분명하기 때문에 인생사에서 벌어지는 죽음과 탄생, 부귀와 영화 모든 것이 잔잔하게 펼쳐져 있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우리는 다시 눈을 감고 내일 아침을 위해 잠이 든다. 우리가 의지해야 할 곳도 의지해야 할 까닭도 없이 잠깐의 허무와 슬픔도 채 가시기 전에 다시 새로운 어둠이 군데군데 걸려 들어온다. 마치 행운의 여신이 영원히 따나는 것처럼… 자신의 존재가 초라해진다. 정신없이 음악을 듣고 거리를 돌아다니지만 손안에 들어오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허탈감뿐이다. 아무도 질문을 하지 않는, 정작 혼자만이 되어버린 곳에는 온통 허전함으로 가득 빛난다.
어두운 소식들을 매일매일 음성 높여 전달하는 문란한 도덕은 땅바닥에 떨어져 늦가을의 낙엽처럼 거리에 떨어져 뒹군다. 진실은 사라진지 오래고 오만과 부조리가 아름답게 포장되어 앞뒷집에서 들린다. 부를 쌓아 둔 이웃은 이웃대로 높은 담장을 쌓아 두고 가난한 이웃은 이웃대로 가시담장을 쌓는다. 종교도 예술도 이미 타협을 하다못해 물질적으로 온통 바깥세상에 나체로 쫒아 다닌다. 좋은 문화와 문명을 가지기 끊임없이 도전하는 숭고함은 이미 떠나고 고고한 죽음의 성스러운 아름다움마저 모든 이의 하나의 오락거리가 되어버린 채, 도덕(Morale)은 악마를 키워 내고 법(Loi)은 어린 천사를 가두어 버리고 일생을 바쳐 만들어 둔 신비의 예술은 한 상인에게 통째로 잡아먹혀 깊은 그늘로 숨어버린다. 영원한 것은 어느 곳에도 없고 무거운 허탈감만을 가득 가방에 채워 집으로 돌아온다. 어떤 사심도 없이 조용히 가슴을 가라앉혀야만 한다. 엄숙한 저녁을 맡기 위해 목욕을 하고 그리고 명상의 땅으로 인도되기 위해 선(善)으로 눈을 감아 보아야 한다. 구도를 인도하는 者는 없기에 스스로가 구도자가 되어야 한다. 외로운 산지기는 산에서 구도를 해야 하고 詩를 짓는 시인은 詩에서 구도를 해야 하고 그림을 만드는 者는 그림에서 예술의 구도자가 되어야 한다. 이제는 스스로가 진정한 구도자이기 때문이다.
구도(求道)는 어느 시대 어느 곳이든 시대적 말기에서 화려한 종말의 뒤에는 이곳으로 향한다. 분명 구도는 새로운 정신적인 삶을 어느 누구에게나 똑같이 영위하고자 하는 하나의 깊은 예술로써의 제시이다. 부조리에 가입하지 않고 부조리와 타협하지 않는 진솔하고 아름다운 마음으로 향하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은 늘 가난을 요구하고 작은 것으로 향해야 하며 맑다는 것은 그냥 쉽게 태어난 것이 아니라 분명한 정신적 고통과 좌절이 있고서야 이 순수함에 접근되는 것이다. 구도추상은 결코 멀지 않은 곳에 어느 누구에게나 가까이 있고 생로병사적인 상황을 정신 체험적으로부터 겸허함으로 구도하는 것이고 끊임없이 영원을 향해 쫓아가는 하나의 정신적인 승화다.//1994년 구도추상 중 발취//
장소 : 이젤 갤러리
일시 : 2019. 11. 18. – 11. 30.
추PD의 아틀리에 / www.artv.kr / charmbit@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