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의 변신에 대한 변//
작품은, 나비의 유충이 우화하듯, 서서히 바뀐다. 여름과 겨울의 풍경도 하루 밤 사이에 달라진 것이 아니잖은가 말이다. 고집하던 작업 스타일을 바꾸려고 하니 오랜 타성이 완강하게 저항했다. 선배의 페북에 실린 한 마디가 안주의 두꺼운 껍질을 깨고 돈오(頓悟)의 해방감을 주었다고 하면 지나친 호들갑일까. 나이 먹을수록 끊임없는 ‘자기부정’을 하지 않으면 발전이 없다…. 나만의 틀에 너무 오래 갇혀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내 낡은 의식을 연신 짓눌렀다. 요컨대, 자기부정이 이즈음 내 작업의 화두였던 셈이다.
20대부터 비구상을 강조한 대학에 진학해서, 회화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런 작업방식은 항상 새로운 시도가 있어 흥미로웠던 것 같다. 그런데 생각의 껍질을 깨보면 안에는 더 두꺼운 새로운 껍질이 양파처럼 도사리고 있는 탓에, 어느 순간 힘에 부쳐 그 안에서 안주하려고 하는 나를 발견하곤 했다.
추상인가? 구상인가? 살롱(아트페어) 작가가 될 것인가? 미술사에 길이 남는 박물관의 작가가 될 것인가? 돈 버는 사회인이 될 것이냐? 부족하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작가가 될 것이냐? 이런 거추장스러운 고민이 젊은 시절 지속적인 작업을 막은 걸림돌이 되었다.
예술고등학교에서의 후학 지도 역시 배운 만큼 사회에 환원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소신으로 몇 십 년을 보냈다. 변화되는 학생들을 보고 보람도 있었다. 그 시간이 낭비(?)라곤 할 수 없지만, 후유증은 남았다. 본래의 위치로 돌아와 다시 자리를 잡는 데도 많은 시간이 걸렸다. 예전보다 추진력이나 상상력이 무뎌진 탓이리라.
나의 고민
AI가 대중이 원하는 그림을 능숙하게 그려 내는 이때, 동굴벽화를 그린 원시미술가와 같은 방식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 온당한 일일까. 원본의 아우라가 사라지고 복사본과 원본의 구분이 없는 시대, 찍어내는 제품과 작품의 차별이 없는 우리 시대에 여전히 유화 붓은 유효한 도구일까.
생명을 다루는 의사는 국가의 면허가 필요하지만, 그림은 누구나 그리고 전시할 수 있다. 특별한 라이센스가 필요한 것도 아니다. 작품을 통해 대중의 정서를 함양하고 예술적 체험을 증진하며, 문화를 향유하게 하는 데 크게 기여하지는 못할지라도, 내가 만들어내는 ‘그림’이 관객의 정신을 피폐하게 하는 오염물질이어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규격화한 제품을 공장에서 찍어내듯 습관적으로 반복적인 작업을 하면, 작가인 나와 대중의 정서를 되레 황폐하게 하는 독극물은 아닐까?
피카소나 현대미술 작가들의 작품을 보고 “나도 할 수 있겠는데?” 하는 약간의 조소 섞인 일반인들의 반응을 접하면, 내가 계속 작업을 이어가야 하는 것인가 하는 앞뒤 없는 회의감이 밀려들 때도 있다. 그러나 여태껏 창작과 교육활동 외에 세속의 잡사에 헛된 탐욕을 부리지 않고 작업만 바라보고 살아왔다. 실로 아둔한 도정이었음을 부정할 방도가 없으나, 작업 앞에서 우직하고 정직한 길을 걸었기에 스스로 한심하기도 하고, 자랑스러운 것 또한 사실이다.
내가 생각하는 작품 감상법
미술 실기를 배우고 있거나 예전에 배운 적이 있는 사람들은 그림을 잘 그렸는가, 못 그렸는가를 기준의 중심에 놓고 테크닉을 주로 본다. 미술사 공부를 조금 한 사람들은 작품의 여러 문제를 찾아내는 것이 관심사이다. 전혀 문외한은 회화작품이 사진보다 더 디테일하게 대상을 표현한 것에 감탄한다. 개인이 아는 모든 것을 총동원하여 좋고, 나쁨의 판단을 한다. 자신이 아는 잣대의 색안경을 끼고 관람한다.
작품의 좋고 나쁨을 가르는 잣대는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이러한 정형화한 규준을 벗어나 ‘다름’과 ‘파격’의 영역을 받아들이면, 더 폭넓게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내가 추구하는 좋은 작품이란, 관람자가 전시회를 보고 자신의 생활이나 직업에서 새로운 창의적 영감을 주는 매개 역할을 하는 작품이다. 복잡한 도심을 벗어나 산 정상에 올랐을 때의 시원함, 쾌적함, 편안함을 맛볼 수 있는 작품 또한 좋은 작품의 부류에 속한다. 인문학 강의에서 문득 깨달음을 얻는 것과 흡사한 경험으로 인도하는 작품 역시 마찬가지다. 그리고 내용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뇌에서 평상시 사용하지 새로운 근육의 움직임을 느끼게 하거나, 작품을 보고 돌아서서 나갈 때 뭔가 뒤에 잔잔한 여운을 남기는 작품도 좋은 작품임이 분명하다고 하겠다.
여기서 작가의 의도는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일반 관객에서 가장 중요한 관건은, 그가 작품과 소통할 수 있는가 여부이다. 작가의 의도를 관람자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중세 기독교 미술이거나, 황실이나 귀족 후원자의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 데 봉사하는 작품이거나, 현대미술에서 마크 로스코와 같이 숭고미를 강조하는 작품이거나 모두 나름의 방식으로 관객과 소통한다. 아름다운 풍경이나 정물화를 본 관람자가 각자 개별적으로 느끼는 소통이거나, 사회적 맥락으로 연결되는 기호적 소통(예: 민중미술이나 위안부 소녀상)을 의도한 작품도 마찬가지다. 이처럼 작품 감상은 관객과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교감이 필요하다.
작품의 해석
작가 의도를 관람자가 파악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 주 내용인데, 가끔 표현에 중점을 두는 작가도 있다. 미술 평론가들의 화려한 미사여구로 작품이 더 돋보이는 작가들도 있고, 전혀 엉뚱한 해석으로 작가를 불편하게 만드는 경우도 많이 보았다. 그런데도 대부분 작가들은 평론가의 비평에 군말하지 않고 지나간다. 간혹 평론가의 말을 귓등으로 듣는 작가도 있다.
일반 관람자들은 현대미술이 어려워서 작가에게 질문하겠지만, 작가가 하나의 그림에 관해 설명하고 그 설명을 듣고서 작품을 이해한다면, 그 그림은 뭔가 잘못된 그림이 아닐까. 물론, 나는 작품에 대해 완벽한 설명이 가능하면 화가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미술은 언어로만 표현되지 못하는 조형적 요소가 있으므로 완벽하게 설명하는 것은 불가하다. 약간의 설명이 주어졌을 때 더 돋보이는 작품도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작품을 상징성의 잣대만으로 다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무런 정보 없는 작가의 작품을 해석할 길이 전혀 없을까? 내가 추천하는 한 가지 방법이 있다. 보통 작가들은 작품 명제에 제작 의도를 숨겨 놓는 버릇이 있다. 가끔 그것조차 허용하지 않는 작가들도 있지만, 다수의 작가는 그런 습관이 있는 것 같다. 그 명제와 작품을 연관 지어 조합해 보면 어느 정도 작품의 이해가 가능하다. 그밖에도, 그 작가가 작업해 온 과거의 작품들을 연결해서 살펴보면 훨씬 더 깊이 있는 이해가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예전에 어떤 전시장에 간 적이 있다. 그런데 전시장에 아무 작품도 없다. 텅 빈 캔버스가 아니라, 텅 빈 전시장이었다. 분명히 전시 오픈식이고 사람들도 많이 왔는데… 드디어 오픈식에서 그 작가가 말하기 시작했다. 발언이 제법 길었지만, 요약하면, ‘현대미술은 죽었다’는 것이었다. 오픈식장이 현대미술의 사망선고식장이었던 셈이다.
획기적인 생각이라 여러모로 깊이 생각하게 한 계기가 된 전시는 분명했다. 하지만, 뒤끝은 허전했다. 언어로만 작업 설명이 가능할까? 그건 문학이지 미술이 아니지 않을까. 영화 보러 갔는데 영화가 없다? 어떻게 해석을 할까? 현대 미술사에서 획기적 선언의 예도 많았지만, 실체(오브제)가 없었던 전시는 없었던 것 같다. 이 전시를 재해석한 나는, 설명만으로 끝나면 작품을 봐야 할 가치가 상실된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음악은 같은 곡이지만 들을 때마다 좋은 곡이 있다. 가요는 들을 때마다 추억을 소환하는 즐거움도 있다. 가사 없는 클래식 교향곡들도 지나치게 해설을 많이 들어서 식상해 질 수도 있지만 들을 때마다 다른 감정을 느끼게 한다. 근데 처음 듣는 째즈 음악 같은 경우도 일말의 설명이 없어도 곡이 귀를 즐겁게 해주는 음악도 있다. 아마 미술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요소들을 다 가지고 있을 것이다. 꽃 그림은 아무리 잘 그려도 실물의 향기와 느낌을 표현 못 한다. 하지만 실물은 아름다운 시기를 오래가지 못하지만, 작품은 가장 아름다울 때를 오래도록 간직하고 향유하게 한다. 현대미술의 좋은 점은 볼 때마다 다르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다.
나는 내 작품의 해석을 관람객에게 던져주고 싶다. 보는 이의 기분과 감정에 따라 다르게 보일 수 있는 것이 더 흥미롭기 때문이다.//작가의 변//
장소 : 이종현 오픈 스튜디오
일시 : 2019. 9. 2. – 9. 30.
추PD의 아틀리에 / www.artv.kr / charmbit@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