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의 변//
비어있음의 미학
비우는 것이
열반으로 가는 길이라 하지만
비어있는 공간에서
비우는 삶이 그리 녹녹치는 않습니다.
처음의 자리에서
원래의 모습으로 있어왔는데도
우리는 아직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무위에서 완성이 있다 합니다.
물고기처럼
바다 위의 갈매기처럼
비어있는 공간을 보았으면 합니다.
봄기운이 가시고
햇살이 짙어지는 즈음에
생경한 아름다움이 가득한
정광화 작가님의 공(空)의 세계로 초대합니다.//해운대 아트센터 김인옥//
//예유근 글//
세상의 모든 아침과 저녁, 잠 못 이루는 밤
예 유 근 (서양화가)
저녁 무렵 문득 올려다본 서편 하늘이 노을로 물들었을 때, 비 내리는 늦은 밤 골목길 구석 포장마차를 지날 때, 작업실에서 하릴없이 뱅뱅 돌고 있을 때, 서슴없이 전화를 할 수 있는 친구가 있는지요?
나에게 진정 나보다 더 나의 일을 걱정해주는 친구가 있을까? 아무 스스럼없이 대할 수 있는, 울고 싶을 때 함께 울어 줄 수 있는 친구가 몇 명이나 있는지요?
학식이 높은들, 재물이 많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살아가면서 마음을 터놓는 친구가 하나도 없다면 말입니다. ‘선여인교(善與人交)구이경지(久而敬之)ʼ, ʻ친구와 포도주는 오래될수록 좋다.ʼ는 말이 있지요. 이 상투적인 말이 어느 날 밤. 절실하게 느껴질 때는 그냥, 광화와 술자리를 합니다. 친구니까 그냥 편하게 광화라고 부르겠습니다.
사실 저에게는 많은 친구들이 있습니다. 동네, 학교친구, 사회에서 만난 많은 친구들이 있습니다만, 광화와의 인연은 생각하면 할수록 참으로 각별하네요! 고등학교시절부터 그림을 하면서 만났습니다. 다른 미술학원에서 수학하였지만 고교시절부터 미술부를 하면서 그림으로 교류한 친구입니다. 같은 서양화 전공이며, 청년작가회, 포인트현대미술회, 부산현대작가회 등의 현대미술그룹에서도 30여년 같이 활동하였습니다. 이상하리만치 직장마저도 오랫동안 서로 가까운 이웃의 예술고 미술부장교사로서 지냈습니다. 미술협회 부이사장을 역임한 것도 그렇고, 더구나 집도 구서동에 가까이 있다 보니 적적하면 자주 만납니다.
전시 글을 부탁받았을 때, 같은 작가로서 서로의 작업을 말이 아닌 글로 쓴다는 것이 부담스럽기는 합니다. 그러나 저에게 특별하고 각별한 친구가 교직을 마감한 후, 전업 작가로서 하는 첫 전시라서 글로써나마 진심으로 축하하고 싶고, 작업에 대한 기대를 안 할 수가 없네요.
광화에 대한 저의 생각 세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열정적이고 뜨거운 가슴의 소유자입니다.
불타는 감자! 제자들이 부르는 별명입니다. 이 뜨거운 감자의 맛을 한번 보고나면 자꾸 먹고 싶을 겁니다. 그래서 저는 일주일에 꼭 두 세 번은 맛을 봅니다. 뜨거운 감자 맛을 말입니다! 보십시요! 얼굴만 빨간 게 아닙니다. 얼굴처럼 그의 가슴도 뜨겁습니다. 부도덕하거나 불의를 보면 잘 참지 못하고, 잘못된 점을 지적 할 때는 선후배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큰 목소리로 질타하는 뜨거운 가슴의 소유자입니다. 아부도 잘 못하며 후배가 그런 모습을 보이면 싫어합니다. 물론 작품에의 열정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의 집사람은 다소 결벽해 보이기도하고, 잘 모르는 초면의 사람이 보면 목소리크고, 화난 것 같은 서방님을 부처님처럼 최고로 모시고 뒷바라지 하며 사시느라 고생이 많습니다. 불심이 깊어서 늘 절에 불공을 드리려 다닙니다. 절 가까운 창녕에 촌집을 구할 정도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광화의 뜨거운 열정은 집에 가면 차분해 보이기도 합니다.
둘째, 사실 광화는 급 반대로 치밀하게 계획하고, 차분하게 공부를 많이 하는, 차가운 머리를 가진 지성의 소유자입니다.
전시 작품제목을 한번 보십시요! 묘공-동위성이랍니다. 우리가 사는 시공간 속에서 무언가를 그린답니다. 어차피 공의 세계에서는 우리의 경계 너머에 있는 세계이지만 그래도 묘사하겠답니다. 더구나 잘 보십시오. 동위성이란 서로 다른 시공간을 하나의 절단된 단면을 통해서 즉, 회화의 절대평면을 통해서 삼라만상의 파편들을 보겠다는 것입니다. 화석화되어버린 그 자신의 기억의 형상, 우리가 잘 읽지도 못하는 시문, 초서 같은 문자향을 풍기면서 허공에다 그린답니다.
사실, 이 색계에서 동서양을 통하여 그 흔적을 지우며 드러나는 시간과 공간의 동위적인 절묘한 화법은, 서법이나 재료를 다루는 기법이 부족한 사람이 할 수 없는 독특한 기법입니다. 실제로 지금도 사서오경을 탐독하고, 유 불교사상에서 작품정신을 확립하는 데 많은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틈틈이 농담으로 돗자리 깔아서 남의 인생에 간섭하려고도 합니다. 사실 주변에서는 도통한 친구로 존경받으며, 제자들에게 사표로 모셔지고 있기도 합니다.
서체 배경에 깔려있는 형태 등에서 보이듯이 유 불교적 형상, 그리고 노장사상에도 관심이 많아서, 도교까지를 통합한 사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소 많은 형태소로 인해 좀 난해하고 혼란스러울 때도 있습니다마는 작업에 몰입하다보면 한꺼번에 많은 영감들이 몰려와서 밤잠 못 이룰 때가 많지 않습니까?
작품기법은 상감기법이나 목칠공예의 덧칠을 보는 것 같지만, 사실은 미리 계산된 이미지를 중첩하여 흘리면서 다층적으로 집적하여 그립니다. 물감이 적당한 겔 상태 일 때 두껍게 흘리면서 드리핑 합니다. 그 과정에서 형상들은 중첩되고, 드러남과 드러나지 않음을 안배하면서 마른 후의 물감을 마치 돌 속에 숨어있는 형상을 손으로 만지고 예측하며 찾아가듯이 갈아냅니다. 금석문이나 전각, 도자기는 대체로 파고 새겨 들어가지만, 반대로 물감 속에 가려있던 윤곽의 문양을 찾아 갈아냅니다. 갈아낸다는 것은, 지우고 없앤다는 뜻이며, 버려서 무소유하면 결국은 아무것도 남지 않는 공의 세계로 가겠지만, 오히려 전통적인 민화나 도교, 불교적형상위에 반야심경과 같은 불경이나 한문 등의 초서를 허공에 흘리면서 화면에 도달되는 의미의 과정을 음미합니다. 어떤 때는 기명절지화 같은 강열하고 선명한 형태나 색채를 내면서, 또는 서로 다른 이미지를 응물상형하면서 조심스레 화답하기도 합니다. 물론, 통에든 물감재질의 생경함을 은유적으로 보이기 위해 부드러운 색채로 혼재된 화면을 갈아내기를 반복하면서 모두를 일체화합니다.
현재의 작업에서 광화는, 왜 이러한 기법을 선택했으며, 무엇을 보며, 무엇을 말하려하는 걸까요?
한때 젊은 시절 여러 현대미술그룹 등에서 다양한 실험적 작품을 많이 하기도 했었지만, 특히 지속적으로 바이오아트라는 작업에 경도되어 있었던 기억을 합니다. 석사학위논문의 주제도 <바이오아트>이었으니까요. 그때의 작품은 다소 징그러운 생명체의 내장이나 현미경으로 들여다본 확대된 생물의 생물도감의 사진을 보는 것 같은 이미지가 많았습니다. 그것은 물질의 세계 깊숙이까지 들여다보려고 한 정황이 여실합니다. 그러다가 한학을 집중적으로 공부하면서는 관념의 산물인 초서로 된 시나 경전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전서나 예서체는 허공에서 흘려쓰기에는 적합하지 않아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갈아내려면 화면의 딱딱한 저항감을 느껴야 하는 체질은 공격적인 기법을 선택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십여 년 전의 작업 묘공은 미시적 세계에서 다소 벗어나, 혼재된 흘린 물감의 몰골과, 선과 색에서 점묘의 색맹검사 책에서 보듯이 글이나 꽃 등의 현실대상의 사물이 혼돈 속에서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반야바라밀다심경 등의 경전에서 주는 깊은 의미의 지각세계를 평면에 옮겨보려고 하는 시도가 보입니다. 오늘날의 우주양자이론은 끈고리이론까지 왔지만 그의 작업으로 봤을 때, 미시적 세계의 우주질서가 아직은 확실성이 없다는 것을 느끼면서 다시 현실세계의 실체를 깨달은 듯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작업이 상하좌우중앙이 명확합니다. 추론하자면, 공의 세계. 즉, 그의 시공간 세계의 경계는 애초부터 없는 것인데 물질의 시각세계인 이성적 회화세계에서 묘사를 하려니 형상이 생겼다가 사라지고, 드러났다가 없어지면서 일체화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부처의 형상이나, 민화, 맹호도 위에 중복되면서 혼재된 지우고 남은 문자의 흔적만이 그득해져 갑니다. 자꾸 그의 시선은, 읽고 해석하는 생각의 기호체계인 문자로 가는 재미가 솔솔한 듯합니다. 즉, 반야심경을 작업재료로 많이 쓰고 있는 사실만 보아도 그의 생각은 그림으로 도달할 수 없는 어려운 무경계의 실체의 단편을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무경계의 단면을 잘라서 보여주는 형이상학적이면서도 현대적인 시, 서, 화의 논리를 보여주는 새로운 기법의 문인화요, 새로운 불화나 탱화요, 새로운 금석학이라면 너무 거창한 해석일까요?
셋째, 뜨거운 가슴과, 차가운 머리를 표현하는 손이 뛰어납니다.
고등학교시절부터 묘사 잘하는 학생으로 이미 평판이 자자했습니다. 박재동, 신홍직 등 신화실 출신은 잘 알고 있죠. 황재형, 강형구 등이 인정하듯이 대학시절의 손 솜씨는 알아주었습니다. 묘사력이 필요한 그림이든, 입체적인 공간감이 필요한 조각이든, 자신만의 독특한 미학이나 화론으로 공격적으로 설명하기도 잘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 어려운 대입의 실기지도를 직접 정년까지 해온 사실만 보아도 광화만큼 자신의 손 솜씨에 자존심이 강한 작가는 드물지요. 단지 어려운 공의 세계를 손으로 표현하려다보니 그림이 어려워져 버린 것이지요. 그러나 청년시절부터 다양하게 해온 여러 실험적 작업의 깊이와 폭은 역시 그의 손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만날 때 마다 광화의 손을 보면, 늘 손톱사이에 물감의 색이 배여 있고, 손가락마다 소염진통제 살색의 파스가 많이 붙어있네요. 손가락도 잘 펴지 못하고 아파하는 모습을 보면, 참~ 그림이 뭐시라고… 가슴이 아픕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모든 일을 함께 할 수는 없지만 저는 웬만하면 광화가 가는 곳이면 손잡고 어디든 따라갑니다. 광화도 저를 따라 옵니다. 가끔 밤의 강남에 가다보면 적당히 좋지 않은 일도 같이 하기도 하지만, 만약 예유근이 부도덕하거나, 명분가진 일을 제대로 잘 처리 못하면 친구라도 가만두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강남까지 와서도 이러하니 힘들지만 저가 어찌 이런 친구를 옆에 두고 내 삶을 엉성하게 보낼 수 있겠습니까?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무작정 함께하다 보니 어언 성상 사십 여년 이상을 미술 강호에 같이 지내게 되었네요.
불타는 감자! 가끔 농으로 자신의 호로 사용하겠답니다. 술 즐길 酣, 붉을 紫를 쓰면서 말이죠. 불타지만 차가운 광화는 선배, 선생님들께 최선을 다해 모시고, 동료, 후배에게 깊은 사랑의 마음으로 언제나 천사대하 듯 하는 배려심이 보입니다. 더구나 제자, 학부모들에게도 존경받는 모습은, 사람이 한 종류의 음식으로 가장 오랫동안 먹고 살 수 있다는 감자 같습니다. 완전식품에 가까운 감자. 인류의 생존에 큰 기여를 한 감자. 나에겐 마음과 물질로 적극 지원하는 감자 같은 존재. 장족의 발전을 거듭하며 더욱 더 좋은 작업에 정진하고 있는 자랑스러운 친구 작가입니다.
나는 광화를 통해, 오늘 바라보는 아침으로 세계를 느낍니다. 세상의 모든 아침을 다 볼 수 없지만..//2017년 7월 7일 새벽 – 잠 못 이루는 밤에 -//
장소 : 해운대아트센터
일시 : 2019. 6. 18. – 6. 24.
추PD의 아틀리에 / www.artv.kr / abc@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