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원_관계 지형을 모색하는 내면 원형
김성호(미술평론가)
박태원의 작품 세계는 매스와 볼륨에 형상을 얹거나 침투시키고, 일련의 내러티브를 담아내는 조각적 장르가 기저를 이루고 있다. 그것은 자연/인간의 내면 원형으로부터 발원하는 형상으로 추상과 유기적 구상 사이를 물결처럼 횡단한다. 더불어 작가가 그 속에 담아내는 내러티브역시 인간/자연, 자아/타자 사이를 흐르는 물처럼 오간다. 이 모든 것은 그의 작품 제명에서 드러나듯이 ‘내면의 형상’, ‘결실’, ‘사랑’, ‘대화’로 이어지는 인간의 관계 지형에 대한 모색에 다름 아니다. 즉 개별적인 인간 주체가 대면하는 모든 타자와의 관계에 대한 진지한 조형적 성찰인 것이다. 자아라는 개별 인간 주체가 대면하는 피아(彼我), 타아(他我), 사물, 대상, 자연과 같은 모든 타자(他者)들은 작가 박태원의 작품 속으로 들어온다. 그것 모두는 박태원이 인간의 내면 형상으로부터 탐구하는 마술적 세계의 힘 때문에 가능해진다.
추상/구상의 조각체에 투사하는 일원적 마술 세계
그가 구현하는 마술적 세계란 무엇인가? 그것이 전자적 테크놀로지도 아닌 화강석, 대리석, 브론즈와 같은 전통적 조각 매체 안에 어떻게 구현될 수 있을까? 형식적인 면에서 그의 조각은, 약동하는 생명력을 표현하기 위해 근육 등 양감을 과장하거나 파괴하는 방식으로 로댕이 시도했던 해체적 조각 언어의 뿌리가 뻗어 나간 초현실주의적 구상과 해체적 추상 조각의 언저리에 맞닿아 있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그의 구상/추상 조각은 해체적 조합으로 야기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즉 내용적인 면에서 그의 조각에는 서구 모던의 ‘낯선 전치’(轉置, dépaysement)라는 분리/혼성과는 다른 질적 차원이 그리고 서구 컨템포러리의 ‘해체’(déconstruction)라는 파괴/혼성과는 다른 세계들이 가득하다. 그것은 분명코 이원계를 해체하는 동시대 서구적 세계관과는 다른 세계이다. 그런 까닭은 그의 조각이 해체 이전의 원형 탐구라는 동양의 일원적 세계로부터 발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그의 조각에는 인간이 자연, 사물과 더불어 모호한 정체의 덩어리로 뒤섞이면서 조화와 상응을 지향하는 일원적 세계가 곳곳에 배어 있다.
보라! 말라비틀어진 나뭇잎이 생명력을 지닌 모성의 자궁 형상으로 변환되고 있는 지점을, 꽃잎이 중력에 저항하기 위해 두 다리로 버티고 서 있는 인간 형상으로 치환되고 있는 지점을 말이다. 두 사람이 서로를 기대고 의지하면서 풀잎처럼 자라나고 있는 형상은 또 어떠한가? 여기에는 인간과 자연이, 인간과 사물이, 식물성과 동물성이 그리고 삶과 죽음이 한데 뒤섞여 있다. 어떠한가? 그의 작품은 애초의 세계가 원래 하나였다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그의 조각이 담고 있는 일치가 아니면서도 모순도 아닌 ‘불일이불이(不一而不二)’의 일원적 세계는 바로 조화와 상응으로 살아가는 세계이다. 그의 조각이 탐구하는 추상/구상 혹은 형상/비형상은 이처럼 인간 주체가 대면하고 있는 모든 타자들과의 조화와 상응 속에서 만나고 헤어짐을 거듭하는 일원적 마술 세계라는 소우주를 만들어 낸다.
내면의 형상 혹은 내면 원형
박태원 조각에 내재한 마술적 조형의 한 축이 ‘일원적 세계’로부터 발원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또 한 축은 ‘내면 원형에 대한 탐구’로부터 기인한 것이라고 하겠다. ‘본디의 꼴’, ‘본형(本形)’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이 원형(原形 archetype)은 외적 형상의 본원적 양태와 더불어 사고 관념의 근원적 유형을 동시에 지칭한다. 원형이나 고고학(archaeology)에서 동일하게 발견되는 접두어 ‘arch’가 ‘주요한(chief)’ 혹은 ‘제1의~’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듯이, 원형은 가장 근원적인 세계이다. 아울러 물질적 원형뿐만 아니라 정신적 원형의 세계를 함유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박태원 조각에 나타난 ‘원형’은 조각의 형식과 내용을 모두 포함하는 본유적 작품 세계를 지칭한다. 알집처럼 둥글둥글한 덩어리와 같은 형상이나 나뭇잎이나 꽃잎처럼 그것이 눌러지고 펼쳐지는 납작한 조각체와 같은 외적 형식은 그에게 있어 세잔(Paul Cézanne)의 구, 원추, 원기둥과 같은 형식적 원형의 또 다른 변주체이다. 아울러 그의 조각에서, 인간, 대상, 자연, 타자들이 만남과 헤어짐을 오가는 가운데 피어나는 관계 지형의 내러티브는 내용적 원형이라 할 것이다. 그것은 삶/죽음, 생성/소멸의 이원적 대립을 한 덩어리의 조형 언어로 조응시키면서 세상의 모든 존재를 애초에 대립하지 않는 하나의 존재라는 그물 안에 포획한다.
그런 면에서 필자의 작명인 ‘내면 원형’은 그 중에서 형식의 내부 안에 잠입하는 주제 의식에 방점을 찍는 용어로서 박태원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기에 유효한 키워드이다. 말라비틀어진 나뭇잎이 인간 주체가 자리한 주거의 공간으로 훌륭히 기능하거나 혹은 인간 자체로 변주하는 그의 ‘내면 형상’ 시리즈는 ‘내면 원형’이라는 주제 의식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대표적 작품들이다. 한 인간 형상이 다른 인간 형상과 등을 기대거나 포개어 맞닿아 있는 ‘사랑’ 또는 ‘염원’ 연작 역시 그러하다. 인간 주체가 대면하는 모든 타자와의 만남이 엉켜지고 포개지면서 응축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그의 작품에는 본질적으로는 타자 역시 주체에 다름 아니었음을 드러낸다. 외면은 주체와 타자로 변별되지만, 내면은 마치 여성 속 남성성이라는 ‘아니무스(animus)’와 남성 속 여성성이라는 ‘아니마(anima)’가 한 덩어리로 있는 주체적 원형이었음을 그의 작품은 지속적으로 말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내면 원형’은 박태원이라는 한 조각가(인간 주체)가 세계(모든 타자)를 대면하고 읽어 내는 방식이자 본질적인 조형 언어라 할 것이다.
에이시메트리(asymmetry)의 변주적 관계 지형
박태원은 자연의 유기적 형상을 ‘내면 원형’이라는 본질적인 조형 언어를 통해 조각체에 담아내면서, 대리석을 마치 종잇장처럼 얇게 다듬어 내는 놀라운 손의 감각과 기술을 선보인다. 때로는 ‘내면 형상’ 시리즈에서 질퍽한 점토의 이지러짐과 생성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뽑아 올린 브론즈 작품이나 반대로 ‘결실’ 시리즈에서 세련된 미감의 대리석과 브론즈 작품을 선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다양한 조형 언어는 몇몇 주제 의식의 범주 안에서 일관성의 선상으로부터 이끌어 낸 변주라 할 것이다. 특히 작품 속에서 그가 타자들을 만나게 하는 비대칭적 방식은 이러한 변주의 조형 언어가 된다. 꿈틀거리는 생명의 덩어리들이 어우러져 있는 ‘내면 형상’ 시리즈나 두 주체가 엇비슷한 모양새로 포개지고 상응하는 ‘사랑’ 또는 ‘염원’ 시리즈에서도 이러한 비대칭적 변주는 쉽게 찾아진다. 하물며 프랙털 이미지처럼 각 꽃잎들이 서로를 대칭적으로 만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결실’ 시리즈에서도 이러한 에이시메트리(asymmetry)라는 비대칭의 언어가 근간이 된 채 시메트리(symmetry)라는 대칭의 언어를 조율하고 있는 것을 어렵지 않게 살펴볼 수 있다. 꽃잎의 접혀지거나 처진 부분의 차이도 선명하지만, 아랫부분의 꽃잎은 심지어 인간의 다리 형상을 닮아있는 지지대를 지닌 채 직립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 면에서 우리는 박태원의 묵직하면서도 세련된 조각이 마술적 관계 지형을 펼쳐내는 까닭을 내면 원형의 일관된 주제 의식으로부터 발원하고 비대칭의 조형 형식으로 유목하는 ‘현재진행형의 변주적 조각’이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정의할 수 있겠다.//김성호//
장소 : 갤러리 GL
일시 : 2019. 6. 1. – 6.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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