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움-채움 운동의 조정자
이수(전시기획, 미술비평)
무엇인가가 비어있다는 것, 혹은 채워졌다는 것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빈 잔에 물을 채우면 주전자의 물은 비워진다. 현대의 공간은 복잡한 통신망과 다양한 건물들, 많은 사람들, 소음들로 채워져 있지만, 한편으로는 동물들이 멸종해가고 빙하와 숲이 사라져간다. 이처럼 인간의 입장에서 채워진다는 것은 또 다른 존재들에 입장에서는 무언가가 사라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렇게 비움과 채움은 언제나 함께 일어나지만, 우리는 목적에 따라 다르게 해석한다. 어떤 관점으로 보는가에 따라 그 관점에서 제외된 세계는 은폐되고 있기에, 우리가 보고 느끼는 세계는 전체 세계의 일부일 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가득 채워진 도시의 풍경은 인식의 지도 속에 전체적으로 그려볼 수 있지만, 처녀림에 난 동물들의 길은 어느 지도에도 기록할 수 없다. 그렇다고 처녀림과 같은 미지의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며 비워져 있다고 확언할 수도 없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 곳을 원시적 신화와 정령들로 가득 채우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공간들에 대한 지식의 공백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들을 몰아내지 않는 한 그 곳은 신비로운 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감각할 수 없고 있는지조차 확인할 수 없는 것들, 그러나 언젠가는 발견될 수 있는 가능성들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고 있다.
작가에게 하얀 캔버스란 이런 가능성의 영역이다. 신이 천지창조를 마음먹고 공백상태의 세계로 눈을 돌린 그 순간은 작가가 그림을 그리기 위해 캔버스를 잡는 그 순간과 같을 것이다. 그리고 신이 최초에 세상에 빛을 주었던 것처럼 작가는 작품이라는 작은 세계를 창조하기 위해 흰 화면과 마주한다. 곽은지 작가에게 흰 캔버스와 백색은 천지창조를 위한 빛과 같으며, 이 빛은 최초의 캔버스와 같이 세상을 창조할 공간이 드러나는 계기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동시에 빛은 무지라는 어둠이 품고 있는 신비를 가리는 베일이기도 하다. 베일은 가리는 역할을 하지만, 동시에 가릴 그 무엇이 ‘있음’을 폭로하기도 한다. 이처럼 빛이 있어 우리의 세상이 명백하게 드러나지만 그 명백함은 또 다른 무언가를 은폐하기도 하는 것이다.
작품에서 빛은 이렇게 가려진 무언가가 있음을 폭로하는 매개이자 아직 채워지지 않았음을 드러내는 상징이기도 하다. 작가는 빛을 통해서, 보이는 것 이면에 부유하는 미지의 세계와의 공존을 탐구한다. 인간의 시력은 빛을 통해 삶에 필요한 것들을 포착하지만, 자외선이나 적외선과 같은 영역을 포착하지는 못한다. 이처럼 우리가 감각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으며 앎 역시 그러하다. 인식이 감지하지 못하는 것들을 표현하는 것이 가능할리 없겠지만, 작가는 이러한 빛의 속성을 이용하여 우리가 감지하지 못하는 그 무언가를 어렴풋하게나마 감지하게 한다.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는 우리 감각의 한계 내에서 구축될 수밖에 없기에, 인간 감각을 넘어선 존재에게는 부족한 세계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완전한 세계란 우리의 감각을 뛰어넘어 공(空)으로 밖에 감지되지 않는 그 무언가도 공존하는 세계일 것이다.
곽은지 작가는 이런 세계에 백색의 베일을 씌운다. 백색으로 매개된 형상들은 서로에게 흡수되거나 통과하여 감각계에서는 마주할 수 없는 낯선 이미지들을 만들어 낸다. 그럼에도 화면 속에서는 매우 자연스럽게 느껴지는데, 이는 우리의 시각이 사물을 그 차제만으로 보지 않고 그것의 투명한 운동을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는 시선의 궤적을 따라 일어나는 운동을 화면에 표현하기 위해 형상들끼리 침투하고 겹치게 한다. 물체의 색이 표면에서 반사되는 빛이 아닌, 전체적 흐름 속에서 서로 어우러지며 운동하는 것으로 그려낸다. 각각의 색을 담은 빛깔들은 화면 속에서 서로 침투하고 간섭함으로써 비움과 채움의 상호관계 속에서 운동하며 공존하게 한다. 여기서 작가는 화면이라는 작은 세계에서 일어나는 빛의 운동에 균형을 맞추는 조정자 역할을 한다.
곽은지의 작품은 군더더기가 없다. 유화인데도 물감을 얇게 칠하거나 흘리는 기법을 사용했으며, 두꺼운 덧칠 없이 최소한의 터치만 사용하고, 심지어 칠하지 않은 채 남겨두기도 한다. 작품에 손을 많이 대지 않고도 완성도 있는 화면을 구성하는데, 이것은 세련된 감각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얇게 칠한 물감은 물체를 살포시 덮고 있는 빛이 만드는 색채를 표현하고 있으며, 물감이 칠해지지 않은 부분 혹은 흰 색이 칠해진 부분은 색(色) 너머의 공(空)을 만들어 낸다. 마치 네거티브 필름에 새겨진 형상처럼 색이 있어야 할 곳에 없기도 하고, 그 반대이기도 하다. 작가는 이렇게 비움과 채움이 순환하며 공존하는 세계를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곽은지는 ‘없음의 존재’라는 모순적이며 가볍지 않은 내용을 담담하고 조화롭게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없음은 어둠으로 표현되지만, 작가는 모든 것을 드러내는 빛(백색)-없음으로 상징하여 없음을 존재가능성으로 대체한다. 작가는 “내 작업의 근간은 세상 만물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이다. 하나를 덧붙이자면 ‘이면이 있다’는 것이다”라고 하여 보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님을 폭로하여 그 이면에 대해 사유하게 한다. 이면의 가능성에 대한 사색과 탐구,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성찰. 이것이 곽은지 작가가 작품을 통해 우리에게 제안하는 것이 아닐까?//이수//
//작가 노트//
우리는 때때로 완벽을 목표로 살아온다. 무결점. 완전함. 완성. 하지만 내가 가진 것은 그 목표에 대한 의심이자 태초의 본성에 대한 직시이다.
자연이 태초로 받은 것은 이가 빠진 원이다. 이가 빠진 그릇에 담긴 물은 흘러서 새로 물을 받을 공간을 비우고 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게 스스로를 유지한다. 인간이 태초로 받은 결핍을 채우기 위해 갈망하듯 모든 사물 또한 조화롭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한다. 아마도 태초의 본성이란 섞이고 싸우고 허물어지고 채우는 그 움직임이 아닐까. 그 속에서 굳이 완벽을 찾는다면 유동적인 그 현전성이 완벽에 가까울 것이다.
존재의 완벽함에 대한 의심으로 시작한 사유가 캔버스 화면 위에서 화면과 물감의 투쟁으로 이어지길 바란다. 판타지적인 풍경 속에서 도상 간의 권력이 투쟁을 하며 자리 잡아가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감상자들에게 공간의 유동성과 유기적인 관계를 보여준다. 이런 유동성을 보여주기 위해 때론 캔버스를 그대로 노출시키기도 하고 물감들을 흘리거나 지움을 반복함으로서 대상이 가지는 확고한 형태에 대한 의문을 던지고 있다.//작가노트//
– 장소 : 아트그라운드 hQ
– 일시 : 2018. 10. 13. – 10. 21.
추PD의 아틀리에 / www.artv.kr / abc@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