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다, 쓰다, 그리다’
장 루이 쁘와트방 Jean-Louis Poitevin
‘기억의 지층’
안봉균은 자신만의 매우 독창적인 작업방식과 기술로써 이미지와 텍스트 사이의 관계라는 예술의 중요한 문제를 다루는 작가이다. 충분히 뒤로 물러서서 작품을 바라보면 문자로 이루어진 배경, 즉 글자들 위로 어떤 이미지가 드러난다. 적어도 동물의 이미지가 주로 등장하는 작품들에서는 이미지가 아주 또렷한 형태로 표현되고 채색도 되어있어서 실제감 있어 보인다. 종종 그림 속의 형상은 문자로 이루어진 그림의 표면 위에 자신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의 작품들은 모델링 컴파운드를 바탕재료로 사용한다. 이 모델링 컴파운드라는 재료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대리석 분말이 바인더와 섞여 있는 이 재료는 스스로의 내부에 고대 그리스와 로마 혹은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거장들의 조각에 이르는 과거 명작들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거장 미켈란젤로가 카라라(Carrare)를 찾아 자신이 사용할 대리석 덩어리를 고르는 모습을 떠올려보라.
지구와 함께 생성된 암석은 태초부터 존재해 왔으므로 가장 오래된 재료인 셈이다. 당연히 예술의 역사에서도 가장 전통 있는 이 고귀한 재료가 바로 안봉균이 오늘날 사용하고 있는 재료이다. 말하자면 그는 인류 이전의 세계가 지닌 기억을 재료로써 작업을 하는 것이다.
안봉균은 이렇게 구축된 바탕화면 위에 글자를 기입하고 텍스트를 각인하여 인간을 사로잡고 있는 문명, 그 기억의 또 다른 형상을 작품의 표면 위로 드러나게 한다. 우리가 이 질료(돌가루)와 문자들 속에서 두 개의 커다란 기억의 지층이 서로 포개어지는 것을 보며 각각의 작품들 속에서 그것을 상기하듯이, 우리들 각자는 그러한 지층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다. 우리는 모두 이 별 지구와 그것이 간직한 문명의 자손들이기 때문이다.
‘몸짓’
작품의 배경을 주의 깊게 관찰하면 때로 문자들은 그려져 있기도 하고, 배경에 부착되어 있기도 하고, 각인되어 있기도 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안봉균의 작품은 그것의 종합적인 효과로서 인간이 ‘발명한’ 세 가지 중요한 몸짓을 보여준다.
무언가를 ‘덮어 가리는 몸짓’은 이미지를 드러내는 동시에 감춘다. 무언가를 ‘파고 들어가는 몸짓’은 이를 테면 벽과 같은 표면에 어떤 기호를 기입하는, 고대의 수많은 궁이나 사원에서 찾아볼 수 있는 심오한 몸짓을 상기시킨다. 표면을 다시 매끄럽게 만들기 위해 문자를 ‘연마해내는 몸짓’은 강력한 망각의 힘, 인간이 언제나 대항해 투쟁해 온 ‘시간’이라는 존재를 바로 떠올리도록 만든다.
이처럼 자신의 개인적인 기억에 지구의 기억과 문명의 기억을 더하여 안봉균은 자기 작품의 주제를 이끌어낸다.
‘발현’
안봉균에게 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손으로 하는 작업’은 화면 위에 색다른 무언가가 나타나도록 만든다. 사실 기호들로 채워진 그의 그림의 표면은 색채의 얼룩이나 채색된 부분으로 뒤덮여있다. 그러나 매끄럽게 연마하는 것처럼 그림의 표면으로부터 안쪽으로 파고들어 가는 기법은 이러한 방법이 아니었다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남아 있었을 어떤 것, 바로 ‘이미지’를 드러낸다.
손의 작업으로 태어난 이러한 이미지들은 우연히 살아남은 것이 아니다. 이미지는 우리가 그 이미지의 고유한 의미를 인정해야 한다 하더라도 종종 그 기저는 텍스트와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 이미지들은 우리에게 안봉균의 작업의도에 대한 지표들을 제공한다. 안봉균은 예전 작품에서 기도하는 손의 모습, 유명하거나 중요한 인물들의 모습, 과일, 꽃 혹은 익명의 사람들을 표현하기도 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 이미지들이 사진을 보듯 보는 그 즉시 식별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때문에 그 이미지들을 보기 위해서는 관람자 역시 작가의 손과 사유가 지나간 경로를 뒤쫓아 더듬어야 한다.
바로 그런 이유로 우리는 이미지가 발현의 성과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이제 안봉균의 작업을 자극하고 추동하는 힘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특정 종교의 믿음을 넘어서 그는 이 각각의 제스츄어들이 마치 끝없는 긴 기도의 순간과도 같다는 자세로 작업을 해나간다는 것이다.
‘이미지’
최근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이미지’라고 불릴 수 있는 소재들은 정밀한 데생과 채색으로 이루어진 회화적 요소들이다. 우리가 어딜 가나 스크린 화면을 통해 쉽게 볼 수 있는, 매우 선명해서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그런 이미지에 가까워지는 것처럼 보인다. 정밀하게 그려진 그림 속의 소재들은 곤충 등 작은 생명체들이다. 그것은 자연의 표현이며, 자연은 우리들 세계에 대한 문명의 지배와 주장에 대항할 힘의 일반적인 이름으로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인식되고 있다.
자연과 문명이라는 두 지층 사이의 편차는 최대치를 향해 가고 있다. 안봉균의 작품은 오직 성실한 예술가만이 알 수 있는 비밀을 드러내 조용히 보여준다.
이미지와 텍스트 사이에, 그림의 조용한 세계와 각인된 문자의 세계에서만이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 그것은 영원히 인간의 삶에 깃든 신비 그 자체를 말한다. 인간의 말은 기록과 표현, 묘사에 선행한다. 신의 비전을 보는 것뿐만 아니라 신의 목소리를 듣고자 했던 것처럼 언어 역시 인간의 생생한 한 부분이며 시각예술의 역사 속에서도 그것을 표현할 방법을 찾고자 한다.
안봉균의 작품 속의 이미지와 텍스트 사이에서 벌어진 것은, ‘말하기’ 즉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사람에게는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사실의 발견이다.
안봉균의 작품은 이렇게 대지 위의 인간이 처해 있는 상황을 말하고 있다. 즉 인간은 자연과 신비에 사로잡히고, 신에 경도되며, 스스로의 기억의 지층에 조차 포로로 사로잡히고 말지만, 때때로 이미지는 인간을 거기에서 구원해낸다는 것을..//미술평론가 장 루이 쁘와트방 Jean-Louis Poitevin//
– 장소 : 갤러리 마레
– 일시 : 2018. 10. 15. – 10. 30.
추PD의 아틀리에 / www.artv.kr / abc@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