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l`expérience)에 따른 현전(presence)의 환유(metonymy)
황의필(미술평론가, 홍익대학교 대학원 박사 과정 지도 교수)
현대 예술의 새로운 혁신은 모더니즘이 낳은 이성주의의 논리나 합리성 그리고 주체성에 따른 이원론의 거부를 받아들이는 일이다. 그런 만큼 오늘날 예술계에서는 일련의 문제 제기를 풀어내려는 의지가 심심찮게 엿보인다. 따라서 현대 예술의 행로가 무엇에 중점을 두는지 그리고 극복 대상이 무엇인지를 궁구하는 일은 지극히 바람직한 태도이다.
이러한 정황에 걸맞게 기술 복제 시대에서 추구하는 쟁점을 탐색하는 일은 하나의 담론이자 화두이기도 하다. 그런 차원에서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이 ‘기계 복제 시대의 예술 작품(Das Kunstwerk im Zeitalter Seiner Technischen Reproduzierbarkeit)’(1936)에서 강조하려던 ‘복제성’의 문제는 유일무이한 현존성과 관련된다. 여기에는 재생산이라는 일회성이 대기하는 탓에 원본성을 소실하기에 이른다. 이에 예술 작품의 재생산은 인체와 관련한 영혼의 에너지, 즉 영기(靈氣)를 떠나보낸다. 이른바 아우라(aura)상실이다. 이러한 문제 해결에 따른 고민은 어쩌면 현대 판화나 회화가 재점검해야 할 당위성일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현대 예술에서 생산은 재생과도 연계되는 기술이다. 말하자면 생산에서 재생으로 전환 양상을 띤다. 이를 두고 “생산 기술(techniques of production(combines, assemblages))에서 재생 기술(techniques of reproduction)로의 이행이라 할 만하다. 이에 재생으로 말미암아 대상이 지닌 원형의 존재를 멀리한다. 곧 존재에서 끌어내는 주체 창조에 따른 형상을 무너뜨린다. 이러한 대응 체제로 더글러스 크림프(Douglas Crimp, 1944-현재)는 “압수(confiscation), 인용(quotation), 발췌(excerptation), 집접(accumulation), 반복(repetition)”을 강조한다. (Douglas Crimp, October 13, Summer(essay), 1980, p. 53.)
이와 같은 정황에서는 분절이 발생하는데, 공간과 시간 경험(l`expérience)의 근원(origine)인 ‘차이(différence)’의 에크르튀르(écriture)이자 흔적(trace)의 직물(tissu)을 강조한 자크 데리다(Jacque, Derrida, 1930-2004)의 논법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Jacque Derrida, De La Grammatologie, Minuit, 1967, p. 96.) 응당 차이에는 사물의 무수한 표상이 자리한다. 어쩌면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가 ‘예술 작품의 근원(The Origin of the Work of Art)’(1936)에서 말하듯이 “모든 작품은 사물(Ding)이라는 측면(Dinghaft)을 갖기 때문에 이를 떠나면 작품은 존속할 수 없다.” 그에게서 사물은 곧 알레고리(Allegory)이자 표상의 다른 이름이다. 이처럼 차이로 향한 사물의 반복과 차용은 육체 에서 분출하는 감각(aistheton)이다. 이러한 감각은 “감관에 주어진 다양성의 통합(die Einheit einer Mannihfaltigkeit des in den Sinnen Gegeben)”으로써 사물이 상징으로 도출하기에 이른다. (Martin Heidegger, ‘The Origin of the Work of Art’, from Poetry, Language, Thought, Albert Hofstadter, trans., Harper & Row, 1971. 참조 인용.)
감각 도출은 알레고리(Allegory, 諷喩) 탄생을 예고한다. 알레고리는 은유(metaphor)와 환유(metonymy)를 잇는다. 은유와 환유는 기표(signifier)에 대용(substitution)하면서도 조합(combination)을 일삼는다. 문현경이 줄곧 사용하는 ‘마음에 담긴 이야기’와 ‘기억 공간’ 그리고 ‘사유’의 개념에서는 은유와 환유가 서서히 내비친다. 특히 삶의 이야기를 다루려는 그의 기억은 사물이라는 형상에 기표로서 대입과 결합의 효과를 고스란히 담아낸다.
이처럼 삶의 시간에 접근하는 그의 의도에서 담론의 순환(circulation)이 흐른다. 이는 귀속(attribution)이나 차용(appropriation)으로서 가치 부여(valorization)가 내재하는 공시(synchronic)와 통시(diachronic)를 동시에 받아들이는 처사이다. 이를테면 그의 창작에 드러나는 ‘그리움’, ‘희망’, ‘시간’의 관심은 상호성을 유발하기에 충분하다. 곧 현존으로서 과거의 시간과 공간이 흐름을 타는 상호 텍스트 논리를 수긍하는 상황이다. 그런즉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 1915-1980)가 상호 텍스트성 (Intertextualité)을 두고, “순환 추억(circular memory)”으로 간주한 관점을 수긍하려 매진한다. (Loland Barthes, Le Plaisir de texte, Leçon, Paris: Seuil, 1973.; Loland Barthes, The Pleasure of Text, Translated by Richard Miller With a Note on the Text by Richard, New York: Hill and Wang, 1975, p. 36.) 따라서 일명 상호 텍스트(inter-texte)라 불리는 경험의 순환성에는 체험(Erebnis)이라는 환각이 뒤따른다.
그가 이행하는 현대 판화나 회화의 표상에 내재한 강렬한 색감이나 여여(如如)로운 공감각에서는 삶의 정서를 다루는데, 곧 정신(morale) 인상이 흐른다. 이는 감각(sensible) 인상이 개입하면서 기호로 전환하는 국면이다. 이 모두에는 현재나 과거가 동시 사건에 따른 계기를 유지한다. 즉 상호 공감각과 표상을 동시에 확보하는데,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 1861-1947)가 “제시로서의 직접성(Presentational immediacy)”을 강조한 발언과 유사하다. (Alfred North Whitehead, Symbolism: Its Meaning and Effect, New York: The Macmillan Co., 1927, 1955. p. 16.)
이른바 외현으로 드러난 직접성은 현실 존재의 입장에서 지극히 객체(objectively)와 형상(formally)을 동시에 맞이한다. 대상이라는 객체, 즉 이미 전개한 과거 경험의 객체는 현재로서의 존재이니만큼 현실 도상을 추출하는 양상이다. 그런 이유로 그의 작품 ‘그리움’이라든지 ‘기억’, ‘추억’에서는 느껴지는(sentiri) 존재(esse)로 와 닿는다.
화면에는 파편화된 도형, 색감의 응축과 압축 그리고 도식의 중첩과 확산이 부유한다. 화면에 배회하는 기법이나 필법의 흔적에서는 드러나지 않지만, 지각이 일어날 즈음 예측과 파악의 사건이 동시에 발생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현전(presence) 현상은 필획에 따른 움직임이나 물질(물감)의 정착 효과, 채색의 양가성(ambivalence)이 대변한다.
무릇 화면에 배회하는 무수한 도상 구조는 겹침의 이면에 서린 또 다른 감춰짐의 반복이 인간 마음을 작용한다. 감춰짐에는 무의식이 끊임없이 내뿜어져 나온다. 이른바 무의식이 물질 원기(unconscious psychical energy depends)를 구조화(structuring)로 끌어낸다. 이러한 무의식은 하나의 ‘에고-슈퍼 에고(ego-super ego)’에서 점층으로 드러난다. 즉 무의식에는 물질(오브제, objects)로써 재현을 받아들이면서 상징 기능에 본능을 부여(investment)한다.
무의식(unconscious)이 낳은 본능 부여에 따른 재현은 잠복(latent)과 발산(manifest) 과정에서 일어나는 ‘전치(displacement)’로 이해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전치 현상은 문현경의 창작 행위에 고스란히 머물고 있다. 가령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순간에 따른 ‘사유’, ‘마음’의 의식이나 ‘속삭임’에서 잘 드러난다. 잠재된 과거 공간이 무의식의 순간 발현으로 물질이라는 오브제에 그대로 노출된다.
자고로 무의식에 따른 고유한 관계에서는 현실 존재를 외면할 수 없는 노릇이다. 더욱이 현실 존재는 그 무엇이라도 서로 포섭(entities) 관계인만큼 실재로서의 개별 사실이 존재하는 공재(togetherness)를 따른다. 이는 곧 ‘결합체(nexus)’인 셈이다. 이를테면 현란하면서도 엄숙한 내면이 엿보이는 그의 화면에서는 무의식에 따른 현실 존재의 공재가 하나의 결합체로서 끊임없이 살아 꿈틀거린다. 색면과 색면, 선묘와 선묘는 서로 관계 지향의 입장에서 파악(prehensions)에 따른 연장 속성을 띤다.
필경 연장은 관계의 다른 이름이기도 한다. 더불어 의식(consciously)은 무의식 분출의 계기이듯이 지각 양태(perceptive mode)와 연장 관계(extensive relations)를 유지한다. 물론 지각 양태에는 공간의 연장성(extensiveness)과 시간의 연장성이 공유 양상으로 동시성을 품는다. 그런 이유로 화이트헤드는 이러한 양태를 의식으로 이해하는데, “동시 세계(contemporary world)는 연장에 따른 광대한 관계(extensive relations)의 연속체(continuum)”로 파악이 가능하다. (Alfred North Whitehead, Process and Reality: An Essay in Cosmology, New York: The Macmillan Co., The Free Press, 1969, p. 76.) 곧 지각에는 현시로서 직접성(presentational immediacy)이 쉼 없이 흐르는 셈이다.
문현경은 현전에 근거한 무의식의 연장성을 심층 계기로 담아내려고 도모한다. 즉 동시 세계로서 연속체에 부응하는 입장이다. 그런 만큼 연장 관계에 따른 현시로서의 직접성이 지각 양태로는 어떻게 활성화하는지 기억 공간으로 펼치길 모색하고 있다.//황의필//
– 장소 : 갤러리 조이
– 일시 : 2018. 9. 22. – 9. 30.
추PD의 아틀리에 / www.artv.kr / abc@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