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노트//
나는 눈에 보이는 형상이 아닌, 순간적으로 사라져 버리는 것들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이전 작업에서는 기억, 꿈, 생각, 지식, 언어, 관계 같은 무형의 가치에 대한 소유욕을 주로 이야기했다. 이것은 내 존재의 본질을 깨닫게 하는 정체성이라 생각한다. 아무 것도 기억할 수 없는 나는 진정한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신적 가치를 책과 식물, 인체 형상으로 물리적 이미지화하여 추상적인 내면공간을 현실공간으로 꺼내어 놓았다. 또한, 앞서 말했던 정신적 가치에 대한 소유욕이 나의 과거를 상징한다면, 다가올 미래는 무소유와 물리학의 엔트로피 법칙을 연결 지어 생각했다. 이 두 가지 개념이 내 속에서 대립하고 공존하면서 현재를 이루고 있다. 의식과 무의식, 기억과 잊혀짐 사이 어딘가 쯤을 작품에 녹아내려 한다.
대학생 때 지독한 불면증에 시달렸다. 시끄러운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생각해 낸 것이 흰 색 페인트 통을 위에서 부어버리는 상상을 하는 것이었다. 흰 페인트가 모든 것을 하얗게 뒤덮을 때 쯤 겨우 잠이 들었었다. 그 이후부터 위에서 무언가가 직선으로 내려오는 이미지가 내게는 안정감 있게 느껴졌다. 흰색으로 뒤덮인 책은 기억과 존재가 잊혀지는 것을 상징하지만 아직 쓰여 지지 않은 미래와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다. 시끄럽게 날뛰는 내 안의 존재들을 덮어야만 새로운 아침을 맞을 수 있었던 것처럼. 그리고 머릿속이 흰색으로 다 물들면 잠이 들었듯이, 흰색으로 칠해진 오브제는 현실(의식)에서 꿈(무의식의 반영) 속으로 들어가는 과정이다. 본래의 색을 지우고 하얗게 물들이는 작업은 본인의 깊은 내면 이야기를 최대한 끌어내는 일종의 의식 같다.
부산 보수동 책방골목은 힘들고 가슴 아팠던 역사적 장소에서 지금은 하나의 관광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누군가에겐 무심히 지나쳐가는 장소이겠지만 내겐 어릴 적 추억이 담긴 공간이기도 하다. 세대 간의 연결고리인 헌책방에서는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는 기분이다. 책 모서리가 여기저기 접히고 얼룩진 흔적들, 쌓인 먼지, 사람 냄새 가득한 곳. 이곳은 잊혀 진 과거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며칠 동안 밤샘하면서 읽었을 누군가의 열정이, 소중한 사람에게 선물 받았던 추억이 묻어난 책들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차곡차곡 빼곡하게 쌓여있다. 책의 처음 주인은 누구였을까? 어떤 사람들 손을 스쳐갔을까? 하는 궁금증. 이 책으로 하여금 더 성장할 수 있었을까, 그래서 인생이 바뀌었을까. 혼자서 이리저리 추측해본다.//작가 노트//
– 장소 : 부산프랑스문화원 아트스페이스
– 일시 : 2018. 9. 13. – 10.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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