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자들 혹은 삶을 위한 신전
김영민
인간의 개별적인 삶은 –사물을 포함하여- 모든 죽은 것들 위에 건설된다. 지금 사는 사람은 시공간 안에서 사는 마지막 산자이다. 아마도, 인생이 숭고하다면 숭고할 수 있는 것은 현재의 삶이 앞서 죽은 모든 것 위에 세워지고 ‘영위’되고 있으며, 곧 죽은 자들의 대열에 합류하여 마지막 죽은 자가 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 위에 내일의 사람이 산다. 그래서 삶은 자못 종교적이고 오늘을 사는 사람들은 어제까지의 사람들을 ‘표상하거나 재현하거나 현상(present 혹은 represent)’한다. 인생은 간혹 제사이며, 발리 사람들처럼 각각의 신전을 마음속에 품는다. 원래 예술은 제사라든가 각자의 신전의 장식으로 혹은 그 자체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인간 개별의 명예를 인간이라는 종의 존엄이 대신하고 가치가 숫자로 표기되기 시작하면서 너무 멀리 벗어나 예술이 ‘그냥’ 예술이 되었지만, 여전히 예술은 오늘 사는 사람들이 어제 산 사람과 내일 살 사람들을 이어주는 제물이자 제사의 기록이고 그 자체로써 신전이다.
‘남겨진’ 물건은 되돌아오지 않는 어제의 흔적이자 표상이다. 흔적에 의미를 부여하면 표상이 되고 표상으로 모자라면 그것을 재현하기도 한다. 나라끼리 약속할 때, 손바닥 뒤집듯 하지 말라고 넣은 조항인 불가역적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이다. 표상은 불가역해서 생기는 인간의 창의적인 활동이다. 황주리의 이번 전시는 이런 사물들과 그가 만들어낸 사물의 표상에 관한 이야기인 듯싶다. 원고지에서 시작하여 안경, 망치, 의자, 여행지의 엽서나 편지 그리고 사진에 이르기까지 어제의 물건들 혹은 애초의 용도에서 벗어나 있는 사물들에 가필을 하거나 무언가 붙이거나 심지어는 장소를 바꿈으로써 새로운 맥락을 만든다. 그러면 원래의 용도는 폐기되는 것이 아니라 (망치는 눈이 달렸으나 여전히 망치이다) 그 위에 새로운 맥락이 추가되거나 첨부된다. 과거의(애초의) 용도가 반영된 현재의 사물로 생명을 부여받는다. 환생했으니 어제의 것은 아니겠지만, 어제가 영 사라진 것은 아니다.
어제의 사물에 오늘을 기록했으니, 내일이 오면 중의적인 표상이 될 것이다. 밤사이에 이중의 흔적이 되어 내일을 맞을 것이다. 이 흔적은 어제 죽은 사물의 흔적이자, 오늘 작가의 개별적인 삶의 발자국이다. 그러나 어제의 사물에 가필 ‘정도’를 해서 어제와 오늘을 이어주는 역할에 그치지는 않는다. 예를 들면, 작가가 어디에나 그려’대’는 눈은 작가가 어제의 사물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환생을 도모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흡사 크레용을 처음 잡은 아이가 자기 자신에게 처음으로 유입된 상징적인 도상을 도처에 그려 넣듯이 작가의 사물들은 일단 눈으로 자신이 의지를 가진 존재임을 드러낸다. 혹은 환생을 알린다. 일종의 의지의 ‘지향’이다. 난 ‘본다’. 그래서 ‘살아있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간혹 눈이 마주칠 때, 그(더 이상 사물이 아닌)의 표정을 살핀다. 코와 입 그리고 목이나 팔처럼 보이는 무엇을 찾아내어 총체적인 그의 표정과 형상을 살피게 된다. 다행히 대부분의 눈 달린 사물은 유머러스하고 유쾌하여 보는 이를 우울에 빠뜨리거나 겁박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작가는 너무도 적극적으로, 그러나 자연스럽고 쉬운 방식으로 사물을 살려내고 표정과 목소리를 만들어낸다. 작가의 특장이다.
삶은 운명적으로 죽음들 위에 서있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분리할 수도 없다. 삶이 아무리 애써 무시하고 신경 쓰지 않으려 해도 삶과 죽음은 한 몸이며 삶의 이면은 죽음이고 죽음으로 인해 생겨난 ‘것’이 삶이다. 역설적이게도 사멸, 무화 등의 국면이 죽음에 부여되어 이면의 삶은 좀 더 화사하고 유쾌하고 종종 재미지다. 이면에서 벗어날 수 없는 한 몸이지만 이면이 감당해 주는 몫으로 인해서 좀 더 가벼울 수 있다. 죽음은 삶을 지탱하는 힘이다. 종종 그의 그림자로 우울하지만 동거할 수밖에 없으며 죽음은 삶을 보호한다. 삶은 시간을 통해서 죽음의 편린을 대하고 죽어서 주위에서 ‘없어진’ 존재들을 통해서 그것이 무엇인지 가늠하고 죽음의 국면을 가볍게 하고 준비한다. 작가의 화사하고 재기발랄한 그리고 음악에 가까운 생동감 있는 그림들은 삶이 죽음 위에 쌓은 세월이라는 것을 외화(外華)한다.
황주리의 그림을 볼 때마다, 타고난 작가라고 생각했다.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의 수월성, 이미지의 배열을 통한 새로운 맥락의 구성, 고구마를 캘 때처럼 줄줄이 딸려 나오는 의미의 연쇄들…게다가 그것들을 처리하는 놀랄 만큼 쉬운 방식들을 보면서 늘 즐거웠다. 원고지의 칸을 창살삼아 인간들을 가두고 실존의 무거운 에너지를 화면 안에 가득 채웠던 시절의 작품을 젊음의 권리이자 의무로 여겼던 지난 시기와 근래의 유쾌하고 수다스러운 게다가 따듯한 작품 간의 관계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그러나 유한한 인간의 사회적 삶과 관계들 그리고 시간적 연쇄와 그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 남겨진 어제를 오늘에 살려내어 표상을 만들고 가꾸어 내는 작업이 막스 베버식의 직업(소명)으로써의 예술가에게 부여된 것이라면 황주리의 작업은 그것을 수행하는 일련의 과정 속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인간이라는 것 그리고 그들의 ‘사물’을 공시적인 방식으로 표상하여 오늘의 범위를 어제의 일부와 내일을 일부로 까지 확장하려는 시도를 하는 것은 아닌지…, 혹은 작가의 재기와 유쾌함 이면에 삶과 한 몸인 죽음에 대한 통찰들이 쌓여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닿은 순간 작품에 대한 연대기적인 혹은 통시적인 이해정도는 한 듯싶다. 그것은 ‘유한한 인간의 확장된 현재를 위한 제례’이며 밝음은 죽음에 대한 예의이자 경배이다.//김영민//
//작가 노트//
사물의 꿈, 상상적 오브제 한 개의 사물은 그 실용을 다하면서 골동이 되거나 폐기된다. 지금 이 순간이 기억이 되거나 잊히는 것처럼. 그렇게 모든 사물은 시간이 흘러 유적이 된다. 모든 시간이 모여 역사가 되듯. 하다못해 수공업으로 만든 의자가 아니라 이케아 같은 현대의 대량생산품조차 그 때 그 시절을 기억하게 하는 유적으로 남는다. 그 실용적 물건이 실용성의 수명을 다하고 창고에 넣어질 때, 그 일차적 ‘사라짐’ 위에 나는 그림을 그린다. 그 사물에 생명을 불어넣어 추억을 간직한 다른 사물로 다시 태어나게 한다. 이른바 추억의 고고학이다.
내 최초의 오브제는 원고지였다. 어릴 적 낙서도 하고 비행기도 접던, 아버지가 출판사를 경영하신 덕분에 집안에 가장 흔하게 널려있던 사물인 원고지는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추억의 종이가 되었다. 아니 한컴 오피스 안에서 그 원고의 길이를 가늠하게 하는 모니터 속의 도구일 뿐이다. 80년대 초만 해도 원고지는 글을 쓰는 특별한 용지였다. 그곳에 그림을 그린 나의 작업은 80년대의 일상을 원고지 칸칸에 그려 넣은 ‘추억제’ 라는 제목의 작품으로 남았다. 지극히 개인적인 시각으로 바라본 80년대의, 개인적인 동시에 사회적인 작업 ‘추억제’는 때로 암호처럼 낯선 상징으로 그려져 있어 나 자신 판독이 불가능하기도 하다.
그 뒤로 일상의 모든 사물이 내겐 캔버스가 되었다. 안경, 돌, 그림엽서, 사용하던 식기와 접시, 심지어는 내가 가질 수 없는 세상의 모든 물건들과 풍경들을 사진 이미지로 소유하기 까지, 내게 오브제는 이 세상 끝까지 확대될 캔버스다.//작가 노트//
– 장소 : 가나아트 부산
– 일시 : 2018. 9. 13. – 10. 14.
추PD의 아틀리에 / www.artv.kr / abc@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