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하게 어두운-공포가 어둠을 잠식할 때
김웅기(미술비평, 협동조합 아트플러그 이사장)
세밀하게 유화로 산수화를 그리던 김춘재가 홀연히 검은 색을 바탕으로 한 가물가물하고 침침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수묵채색과 결별하고 유화로 굳이 ‘강산’이 ‘무진’한 난개발도를 그리기 시작한 이면에는 동양화/한국화라는 특수 범주 속에서 해 오던 그림 그리기에 대한 답답한 짜증과 묵묵한 항변이 깔려있다는 것은 새삼스럽게 상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동양화든 서양화든 그림은 그림일 뿐이라는 자명성의 확립은 매체와 소재의 폭을 넓혀주었을 뿐만 아니라 확장된 세계가 초래하는 불안감도 심화시켰다. 2015년경에 갑자기 어두운 밤풍경에 몰입하기 시작한 것은 김춘재 스스로가 주체로서 자신을 보다 직접적으로 맞닥뜨리게 된 어떤 계기가 있었을 터다. 아마도 내면의 깊은 어떤 지점, 무의식이라는 심연이 불러일으키는 낯설음과 불안이 아티스트로 살아가는 막막한 현실과 중첩되면서 생겨난 게 아닐까 싶다.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느끼고 있는 무력함과 예술가로서 살아가야만 하는 막막한 현실 때문에 상한 자존심을 대상으로 어두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예술가의 주체에 대한 어두운 내면과 무의식에 대한 논평이야 흔하디흔한 예술의 클리셰 이지만, 김춘재가 그 어두움을 회화적으로 대하는 방식은 녹녹하지가 않다. 어두움을 검정으로 전통적으로 표현하는 수묵에 대한 약속과 합의는 이미 제도화되어 더 이상 우려먹을 여지가 그다지 남아있지 않은 상태에서, 김춘재는 새로운 묵색에 대한 감각적 탐구를 강박적으로 밀고 나가고 있으며 그 일단의 시작을 알려는 채 여물지 않은 선언을 이번 ‘찬란하게 어두운’展에 선보이고 있다.
어두움과 밝음의 문제는 색의 문제가 아니라 공간의 문제고 범주의 문제다. 그러나 정작 본격적인 문제가 되는 것은 빛과 어둠 자체가 다른 계열의 범주라는 것이다. 흔히 발하듯 어둠은 빛의 결여고 빛은 어둠의 부재라고 인식하지만, 이는 명백하게 오류다. 빛은 입자가 존재하는 실재지만 어둠은 실재가 아닌 채로 존재한다. 어둠 속에서는 빛을 밝힐 수 있지만, 빛 속에서는 어둠을 작동할 수가 없다. 빛은 우리가 조작하고 통제가 가능하지만 어둠은 불가능하다. 이 통제 불가능성 때문에 어둠은 막막한 것이고 미지의 세계이며 무한의 존재가 되고, 모든 상상의 원천이 된다. 달리 노자가 “검고도 검은 것이 만상의 신비한 문이다”고 했을까! 서양의 영지주의자들이나 윌리엄 블레이크와 예이츠 같은 낭만주의 시인들에게도 어둠은 어두움의 빛을 뜻하는 “원초적 어둠(Primordial Darkness)”이라고 부르면서 빛을 낳고 만물을 생성시키는 우주의 근원으로 보았다. 이렇게 개념적 범주로서만 존재하는 어둠을 절대적 검정으로 예술적으로 실체화시킨 말레비치가 영지주의적 영향 속에 있었던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
정작 놀라운 일은 영국의 서리 나노시스템즈(Surrey Nanosystems)라는 기업이 머리카락의 십 만분의 일에 크기인 탄소나노입자를 개발하여 어두운 입자를 생성시켜서 어둠을 빛처럼 통제 가능한 실재로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이 반타블랙입자는 99.965%의 빛을 흡수함으로써 완벽한 검정색을 만들어 낼 수가 있게 되었고, 이 반타블랙을 색으로 사용하게 되면 평면에 칠한 검정색 자체가 하나의 블랙홀 같은 공간처럼 보여서 평면성자체가 공간적인 환영을 불러일으켜 기존 모더니스트들의 예술적 전제마저 뒤집어버렸다. 말레비치의 절대주의란 예술적 이념이 마침내 과학으로 실현되어서 절대블랙이라는 실재로 사용되는 현실 속에서 김춘재는 해체되어버린 어둠과 빛에 대한 비대칭적 관계성을 대칭적으로 재구성하여 밝음으로 어둠을 표현해야 하는 분열적 상황에서 어둠을 찬란하게 표현해야만 하는 것이다.//김웅기//
– 장소 : 서린 스페이스
– 일시 : 2018. 8. 16. – 9.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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