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와 화면 그리고 시간
추상이란 가시적인 형식을 띠지만 비가시적인 것에 대한 작가의 내면적 현상이다. 그것은 “자신이 자기 자신을 직접 느끼는 자기감응의 방식으로 체험”한다는 것이다. 살아 있다는 것의 느낌을 타자를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드러나는 방식으로 사물보기와 그리기를 행위라는 직접성으로 접근하여 내면화한다는 말이다. 정보로 뒤얽힌 세태에서 이향연의 작업은 이런 체험, 진지하게 자신이 무엇인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하는 낡은 질문을 새롭게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직접성은 정보의 나열이 아니라 체험이라는 몸의 감각을 요구한다.
화면에는 선과 면, 색상이 분방하게 자신을 드러내면서 물감이 칠해지고 그것이 흘러내린, 붓이나 나이프, 스쿼시가 누르고 지나간 자국들로 뒤덮여 있다. 화면은 형상의 구축보다 행위의 장(場)으로서 그곳에 있다는 인상이 강하다. 흰색이 붉은 색 옆에 대담하게 자리를 잡고, 노랑과 파랑이 대비되듯 배치되고 그 위로 숫자와 선들이 분방하고 거침없이 지난다. 드로잉에서 보이는 즉발성의 선과 면, 색과 미완의 형태들이 다투듯 화면을 장악하고 이완시키려 한다. 화면 안에서 색상과 선들을 지각한다는 의식이 들기도 전에 빨강이 노랑을 만나고, 그 옆으로 초록과 분홍이 밀려든다. 면은 고정되지 못하고 미끄러지듯 표면에서 산개한다. 그만큼 속도감을 갖는 요인들이 주요한 동력이 되고 있다.
색이 색을 덮는다. 먼저 칠한 색과 뒤에 올린 색이 층위가 생기면서 두 색이 혼색되어 새로운 색상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칠하는 행위성이 더 드러난다. 그 행위는 행위의 선후가 아니라 지금의 행위로만 드러남으로 시간의 층위가 선형적 상태에서 현재 진행형으로 바뀐다. 더구나 화면을 구성하는 방법으로 붓과 나이프, 스쿼시, 연필, 목탄, 콘데, 오일초크 등이 다양하게 선과 면을 자유롭게 덧붙이고 지나간다. 선들은 화면을 깊이 파고들기보다 평면에서 자유롭게 미끄러지고 횡단한다. 그것은 앞 행위의 소거, 먼저 한 행위와 형상들이 뒤의 행위와 형상들에 의해 부정되고 앞과 뒤에 하는 행위를 어긋나게 한다. 시간적 순차성 대신 행위의 현재성이 두드러진다. 이런 현재성은 넓은 면적의 색 면이 던지는 정태성을 자극하고 화면 전체를 운동의 네트워크로 유인한다. 물감층이 두텁게 묻어있는 화면은 촉감적 이미지로 현재성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 행위를 붙잡으려는 미세한 움직임들이 유기적인 구조를 만들어 보인다. 이렇게 일견되는 화면은 거칠다. 그녀의 화면은 정제된 감성의 절제라기보다 분출하는 감성의 지점에서 통제와 방기의 양면성을 보여준다.
그녀의 작업을 보면서 시간에의 탐색이 아니라면 이런 작업이 가능할까. 그런 생각이 먼저 든다. 그러나 그녀가 보여주는 이미지들은 형식이나 시도에서 그리 새롭거나 생경한 만남을 주지 않는다. 익숙한 이미지들이다. 새롭게 시도하는 실험으로서 추상이 아니라 도리어 전형적인 색면추상 형식을 차용하고 있다. 그래서 감성적인 직접성이나 그리기의 절박성보다 의도적인 탐색과 이성적인 작업으로서 접근하고 자신의 작업을 이해하고자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면에서 그녀의 작업은 새삼스럽게 비재현의 형식이 주는 이미지들의 시간성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의 경향에서 흔히 목격하게 되는 기존 작업들의 차용과 함께 그녀의 작업에서 다가오는 촉감적인 이미지에 주목하게 된다. 구상에서 추상에로 이전되는 의식의 층위들과 색 면과 선들 그리고 이들을 구축하는 흔적들의 층위에서 생성되는 의미들을 엿보게 된다.
이런 분방한 인상의 배후에 구조적인 견고함이랄까, 화면을 지탱하는 구조적인 사유의 지도를 보이는 지점도 없지 않다. 통제와 방기의 양면성이 이런 인상의 요인들로 작동할 것이다. 기하학적 형태감과 그 형태감을 부정하는 이중성의 배후에 있는 의식의 자장들에서 확인되는 것이다. 사각형의 캔버스 안에 사각형의 구조가 주조를 이루고 있다. 그 구조들은 정적이고 신지학적 인상도 없지 않다. 모더니즘의 이념에서 지적하는 장르의 순수성이나 조형성에서 후기모더니즘의 개인적인 은밀한 심리적 개진으로의 전환을 염두에 둔다면 작가의 이중적인 충동 혹은 학습과 감성이라는 이중성의 충돌 경험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제시하는 작업은 일반적인 이해에 기반을 두는 모더니즘적 안목만을 요구하지 않는다. 일견되는 인상에서 몬드리안이나 칸딘스키를 떠올리게 되고 그들의 신지학적 관심을 떠올리는 것도 그녀의 작업이 주는 이런 인상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화면을 구성하는 그리드의 규범이나 구성의 기반에는 바넷 뉴먼, 마크 로스코 등의 영향도 읽을 수 있다. 말하자면 몬드리안의 기하학적 추상으로서 정태성을, 잭슨폴록의 액션페인팅의 분방함을, 로스코의 색감으로 정서를 전달하려는 비가시적인 것에의 주목은 서로를 잠식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작업으로 수렴하려는 스타일로 읽히는 부분이다. 그래서 그녀의 작업이 추상이라는 새로운 영역의 개발이나 시도가 아니라 기존하고 있는 경향, 양식 혹은 영향을 차용하고 있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녀에게 콤플렉스로 작용하는 것 같지는 않다. 도리어 의식적인 이해나 지식으로서 활용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며, 창의적인 시도나 무리한 실험보다 기존하는 영향이나 이미지의 채용을 통해 현대적인 의미를 탐색하려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굳이 그런 영향을 소급해서 분석하거나 언급할 이유는 없을 것 같다. 그것은 일반화된 추상의 이해에 기반을 둔 것일 뿐 아니라 가까이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방법으로 그 한계를 건너가고자 하는 의지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작품의 영향을 따지는 연원은 때로 작품 읽기에 불편하다. 학습의 흔적을 찾고 그런 영향을 확인하는 그런 확인은 그녀에게서 이미 지나간 것으로 봐야 한다. 그녀는 사각형을 기반으로 한 구성에서 붓이나 스쿼시, 나이프들이 만드는 부정확한 면의 구성으로 이들 사각형의 구성에 대항하고 있다. 그것은 자신에게 끼친 영향에 대한 저항이기도 하며, 바넷 뉴먼, 마크 로스코, 몬드리안의 차용이 이곳에서 내재화의 과정을 겪는다. 사각형의 구조에 사선이, 곡선이 첨가되면서 두 힘 사이의 긴장과 균형, 움직임을 만들어낸다. 곡선이나 사선으로 화면 전체를 비껴가게 배치할 때, 난삽한 화면이 일시에 정지되는 듯, 화면의 모든 요인들은 그곳에 본래 있었던 것처럼 변한다. 물론 그런 인상은 순간적이다. 그러나 그런 구조야말로 화면을 통제하는 기제로 작동한다. 이런 특징 때문에 영향의 연원들을 호명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각형으로 압축되는 화면의 구조는 면을 이루는 가장자리에서 흐트러지고 거친 마티에르와 다양한 재료의 사용으로 기하학적인 정태적 구조의 연관을 느슨하게 만든다. 색 면을 이루는 사각형의 경계는 형성과정으로, 미완의 방형으로 주어져 시간성에 더 주목하게 한다. 그것은 사각형으로 사각형을 부정하고 촉감과 마티에로 평면성을 부정하는 것과 연계되면서 독특한 시간성과 촉감적 이미지를 얻어낸다. 드로잉 성격이 강한 선이 화면을 중첩의 효과로 구성하는 것도 미완의 이미지를 다시 부정하는 이중적 장치의 하나이다.
그녀의 화면구축에서 드러나는 이런 장치들은 고정된, 규정된 완성의 이미지에 대한 거부이며, 화면을 행위의 상태로 두겠다는 의지이다. 말하자면 화면을 완성의 지점으로 완결되는 장(場)이 아니라 행위가 계속되는, 행위성이 주요하게 작동하게 하는 그런 장으로서 보아내려 한다. 그리고 그 행위는 언제나 시간의 현재성을 드러내게 된다.
칠하기, 그리기로 바탕을 형성하고 그 위를 오일초크가 지나고 목탄이 지난다. 붓이 지나면서 그것들은 형상이나 재료, 행위의 병치보다 앞에 생성된 이미지의 구축을 부정한다. 마르기 전의 물감은 그 위로 지나는 나이프로 인해 섞인다. 그것은 재료의 혼합이 아니라 시간의 중첩, 혼성이다. 행위를 현재화 하는 작업이다. 중첩과 혼성으로 서로를 지우거나 서로의 흔적을 드러내는 색이나 면은 색을 향한 움직임, 움직임을 유발하는 행위로서 화면이지만 서로 구별하기 힘들다. 혼재된 움직임이다. 그리고 이렇게 형성된 화면은 거칠고 촉감적이다. 거친 촉감은 화면의 비형상이 주는 애매함, 비재현의 난삽함에 현실적 직접성이라는 의외의 만남을 준다. 촉감은 현재적이며 비확정적 시간, 임의성, 우연성으로 화면을 개방시킨다. 그 촉감이 그의 화면의 형식이자 내용이다. 그리고 보는 이로 하여금 지금, 펼쳐지는 행위성에 주목하게 한다. 그것은 언제나 형상 이전의 가능성으로 주어진다. 그만의 독특한 시간의 층위, 시간 층위의 혼재로서 현재를 읽게 하는 특성이다. 그 현재는 의미가 아니라 의미화 되기 이전의, 어떤 형상이 구성되기 이전의, 이미지가 구축되기 이전의 사태로 보이게 한다. 시간을 서사를 만드는 속성으로만 이해하지 않는다면 현재라는 순간의 직관과 서사라는 서술적 속성이 상충되지 않는 지점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시간성이 기존하는 추상작업들과 변별력이 크지 않으면서도 기존하는 추상작업에 대한 포스트 모더니즘적 접근과 이해로 의미의 지평을 새롭게 열어준다. 그림은 우리의 시선을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으로 전환시켜주는 특이한 현상이지 않은가. 그리고 보이는 것을 가로질러 보이지 않는 데로 나아가게 하는 추상회화의 현상의 효과를 이해할 수 있듯이 그녀의 작업 역시 이른바 색면추상미술이 보여주는 작품 너머의 영역으로 인도하는 통로가 된다. 그녀에게서 읽히는 선행학습이 있다면 아마 이런 점이 될 것이다.
그녀의 작업은 외부 자극이 아니라 자기가 자기의 대상이 되는 과정으로, 내부적 충동, 자기행위의 자기인식에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이 시대의 존재감으로, 느낌으로 다가오지 않는가. 포스트모더니즘의 기류의 시대성에 불구하고 만화나 삽화, 변태적이고 말초적인 것에 사로잡혀 있는 세태에서 볼 때 그녀의 화면은 진지하다. 이미지 과잉의 시대에 보는 것조차 힘들게 하고 무엇을 보는지 하는 인식조차 소비되는 시대에,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의 관점으로만 자신을 나타내는 추상회화의 “비-대상의 현전을 체험” 하게 하는 그녀의 사유는 분명 이 지점에서 돋보인다. 그러나 그녀가 그 자신의 세계를 더 밀어붙이려는 의지가 있다면 지금 보다 더 큰 화면을 구사하려는 충동과 구사해야 하는 당위적 질문들에 부닥쳐야 할 것이고, 바넷 뉴먼의 ‘지금’이나 ‘여기’라는 시간과 공간에 대해 보다 진지한 이해가 있기를 요청해 본다. 가로 폭 5미터에 달하는 <숭고한 영웅>을 1미터 앞에서 보기를 요구한 바넷 뉴먼의 태도에 대한 천착이야말로 어쩌면 그녀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지점일 것이다.//강선학//
– 장소 : 갤러리 서린 스페이스
– 일시 : 2018. 6. 18. – 6. 23.
추PD의 아틀리에 / www.artv.kr / abc@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