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봉규//
김미지 작가의 그림은,
김미지씨를 처음 보았을 때, 참 맑고 깨끗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니나 다를까, 김미지는 수채화로 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것도 자신과 참 잘 어울리는 참새를 주로…참새 외에도 김미지의 주요 소재는 꽃이다. 자목련, 벚꽃, 피라칸사스, 동백, 모란 등.
참새의 참은 진(眞)의 뜻이다. 진짜 새라는 뜻일 것이다. 물론 가짜 새가 있을까마는 그만큼 귀한 새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할 것이다. 마치 진달래를 ‘참꽃’이라 하고 ‘참깨’가 있는 것처럼. 마오쩌둥과 참새의 유명한 일화가 있다. 곡식을 먹는 참새가 미운 마오가 대대적인 소탕령을 내리니, 이내 참새는 중국에서 씨가 말리는 사태가 벌어졌다. 참새가 사라지자 곡식은 벌레 먹고, 병들고, 메뚜기 떼가 창궐해 수십만 명이 굶어 죽은 참사 말이다. 마오는 참새의 ‘참’을 망각했기에 이런 끔찍한 일이 벌이진 게 아니겠는가! 그래서인지 산림청에서 조류(鳥類)를 관찰할 때, 발견되는 새의 크기를 참새와 비교하는 ‘자’의 역할을 한다고 하여 일명‘자새’라고도 불린다 한다.
참새는 작지만 당차고 예쁘다. 혼자서 놀지 않는다. 모여서 논다. 쌀가마 위에 쪼르르 몰려와 모이를 쪼는 그림은, 금방이라도 워이~ 워이~ 하며 참새 떼를 쫓을 호통이 들려오는 듯 정겹다. 꽃 핀 자목련에도 여럿이 날아가 앉고 풀숲으로 떼를 지어 몰려간다. 무슨 할 말들이 그리 많은지, 짹짹 시끄럽도록 지저귄다.
중국 참새는 ‘챠챠’ 울고, 일본 참새는‘쥬쥬’ 운다지만 김미지의 참새는 분명‘짹짹’ 남에서나 북에 가나 우리말로 울 것이다. 피라칸사스 빨간 열매에 떼 지어 날아온 참새 떼들은 분명 조선말로 “짹짹, 여기 맛있는 게 아주 많다. 빨리 와서 먹짱!”하고 재잘 될 것이다. 참새는 전 세계적으로 분포해 산다고 하지만, 김미지가 그린 참새와 꽃들을 보면 우리 새만 같고 우리 꽃만 같다. 그리고 ‘짹짹’하고 우리말로만 울 것 같다.//화가 임봉규//
//작가노트//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사랑스런 작은 참새는 우리들의 이야기 삶의 정서가 담겨 있다. 꽃과 나무, 아름다운 자연 그 속에서 꿈과 사랑, 그리움, 쉼을 노래한다. 저의 작품이 보는 사람의 심성을 참 정겹게 포옹해주며 평화롭고, 사랑과 행복을 느끼게 해주길 바랍니다.
//최석권//
몽향(夢饗) – 꿈의 잔치
새는 영물이다.
인간의 저쪽과 이쪽을 이어주는 전령으로서의 신비가 있다. 그 새의 본 모습으로 삼족오(三足烏)가 있는데, 아득한 옛적부터 우리네 조상들이 숭배하던 새이기도 하다. 만물의 으뜸인 태양을 누구도 똑바로 보지 못 하는바, 끝내 그 속을 거슬러 보면 다리가 셋 달린 검은 까마귀가 들어앉아 있다. 그것이 오늘날의 과학으로 태양의 흑점이라고 한다. 우리 옛사람들은 그 흑점조차 과학의 이전부터 알고 있었고 숭배의 대상으로까지 여겼던 것이다. 그 흑점이 꼭 다리가 셋 달린 까마귀로 보였고 그것이 삼족오의 유래다. 그렇게 탄생된 삼족오는 태양에서 분화한 정령으로서의 신(神)이 되어 양(陽)의 주체가 되었던 것이다. 원효의 일심과 일체유심조처럼 그 흑점의 삼족오는 태양신으로서의 유구한 역사를 거치는 동안 우리 민족이 태양의 후예라는 천손(天孫)사상을 굳건히 하게 되었던 동기가 되기도 했던 것이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새는 하늘과 땅을 잇는 영물이자 메신저다.
참새의 한자(漢字)인 참새 작(雀)을 보면 작은(少) 새(隹)라는 뜻이다. 더 풀어보면 작은 새가 땅에 내려 와있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적을 소, 어릴 소 자가 하늘을 보고 있고, 새 추 자가 아래에 서서 땅으로 향한 것이 그것이다). 그렇다. 참새는 가장 작은 새의 하나이면서 가장 낮은 곳에 거하는 하늘의 영물이다. 그것은 바로 가장 작고 가장 낮은 우리들 민초(民草)와 닮아있다(민초는 인내천의 하늘이 작고 낮은 모습으로 땅에 거한 것이다). 그 참새가 집채만 한(그들에겐) 쌀가마니에 앉았다. 정확히는 스물한 마리가 이미 내려앉았고 마지막 한 마리가 내려앉는 중이다. 칠(七)은 이승과 저승의 한 주기다. 사람이 죽어서 저승에 가면 칠일(七日)을 한 주기로 살아온 한평생을 저울에 올려서 심판하거나 정화한다. 그렇게 도합 일곱 번의 정화를 거쳐서 최종 결정이 내려지는데 그것이 칠칠(七七) 사십구일(四十九日)이고 사십구재(四十九齋)다. 그래서 이승에서 초상을 치르는 기간이 사십구일인 것이다.
반대로 사람으로 태어나는 새 생명이 이승에 안착하는 주기는 삼칠일(三七日)이다. <사십구일>보다 주기가 네 번이 줄어든 칠 일을 세 번 거친다는 의미다. 저승보다 사四의 주기가 짧은 것은 이제부터 채워나간다는 의미도 있는데, 여기에는 대삼합(大三合)의 큰 뜻이 숨어있다.
이 기간 동안은 말 그대로 금줄을 쳐서 부정을 막고 사기(邪氣)를 쫓아 산모와 아기의 안전과 안착을 돕는 조치를 한다. 흔히 아기가 엄지를 검지와 중지에 끼워서 주먹을 꼭 쥐고 있는 모습(욕을 하듯)을 볼 수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부정과 사기를 쳐내는 수인(手印)이자 결인(結印)인 것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래서 세상은 상징과 신비로 가득한 것이다. 물론 화백께서 의도했는지 아니했는지는 모르겠지만(아마도 직관이 시켰을 것이다. 예술가는 원래 영적인 메신저의 기운도 겸하니까 말이다), 어쨌든 스물한 마리의 참새가 그 금줄의 재료인 새끼줄의 쌀가마니에 앉아있다. 생각해보시라. 영계의 메신저인 참새가 스물한 마리의 스물한 주기(이십일일 = 삼칠일)로 금줄에 쌓인 쌀가마니에 앉은 모습을 말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려앉고 있는 스물두 번째의 저 한 마리가 화룡점정이겠다. 바로 삼칠일의 금줄이 풀리는 신호이니까 말이다. 그래서 이 그림이 밝고 더할 수 없이 아름다우면서도 신비한 것이다.일찍이 제나라 환공의 관자가 그의 목민 편에서 말했다. “창름(곳간)이 차야 예절을 알 수 있고, 의식(옷과 음식)이 족해야 비로소 명예와 치욕을 안다”고 말이다.
그리고 맹자는 맹자, 양혜왕 편에서 말하기를, 항상하는 생산이 없으면 항상하는 마음도 없다(무항산이 무항심(無恒産而 無恒心)). 이라고 설파했는바, 일정한 경제적인 생산이 없으면 평정한 마음도 기대할 수 없다고 했듯이, 사람이 먹지 않고는 명예도 치욕도 한낱 공허한 메아리일 뿐인 것이고, 사람다움은 먼저 의식주가 해결되어야 가능하다는 말이다. 이런 사람다움에, 생명다움에 저 그림의 보화가 있는 것이리라.
그리고 그림에는 빛이 있다. 징표다. 밝아오는 동쪽의 환한 햇살에 서쪽의 짙은 명암이 너무도 절묘하다. 이런 동서의 오묘한 구도에 영적인 뜻까지 직관으로 함축된 작품세계가 신비롭다. 그것이 이 대작(60호)의 에너지를 분출하는 화백의 정신세계이기도 하겠다.
작금의 대한민국이 어디 그냥 됐겠는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민초들의 뼈와 살을 바쳐 이룩한 위대한 나라다. 그 대한민국은 지금 살 만한 나라가 됐지만, 여전히 우리 민초들은 춥고 배고프다. 그 춥고 주린 창자를 움켜쥐고서 그래도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으니, 저 쌀가마니가 열리는 날이 바로 인내천(人乃天)의 하늘 소식인, 참새(민초)들의 창름倉廩이 열리는 천국이겠다. 그래서 몽향(夢饗), 꿈의 잔치다.//초재 최석권//
– 장소 : 갤러리 란
– 일시 : 2018. 6. 1. – 6.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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