傳神寫照로 일궈 낸 전통의 顯現
-정헌칠의 동물화의 세계-
박옥생
1. 봄날 삽사리, 나비를 바라보다春日尨望蝶
고대로부터 동물그림은 그 동물의 본성에 기복적인 신앙을 담고 제의적인 성격으로 그려져 왔다. 고구려 벽화에서 단편적으로 드러나는 동물 이미지들이 우리에게 완상(玩賞)용으로 독립되고 본격화된 것은 고려시대이다. 이러한 감상용 그림들은 조선시대로 오면서 꽃과 새, 소, 말, 강아지 등의 영모화(翎毛畵)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정헌칠이 선보이는 동물화 또한 조선시대 동물화의 전통을 잇고 있다. 정헌칠이 주로 그리는 강아지는 한국 전통의 삽살개이다. 삽사리라고도 불리는 이 강아지는 액운을 방지하고 영험이 있는 것으로, 신라시대 이후 한반도에 길러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본성이 주인을 잘 따르고 충직하여 위기에 처한 주인을 구해내는 민담들이나, 조선시대후기 김두량의 작품들과 민화들에서 삽사리가 꾸준하게 등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우리 민족이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동물이었음이 분명하다.
정작가의 삽살개 그림은 세필로 정교하게 하나하나의 털을 심고, 털의 선을 통해 음영을 살려내고 운동감을 주고 있다. 나비나 잠자리를 쫒아 뛰놀거나, 꽃이 만개한 봄날에 어미와 새끼가 뒤섞여 노니는 삽사리의 모습은 마치 세상을 관조(觀照)하는 인간의 모습과 닮았다. 순수하고 천진난만한 이 향토성이 강한 삽사리의 모습과, 꽃과 풀들이 피었다 지는 모습들에서 변화하는 우주의 시간의 움직임이 포착된다. 그러나 그 움직임은 매우 찰나적이어서 순간적인 시간의 멈춤과 같은 무한의 고요함마저 들게 한다. 사실, 이것이 작가가 성실하게 터럭 한 올 한 올에 숨을 넣어 만들어낸 형상들이 획득한 정신성과 조형적 아름다움이기도 하다.
아마도 작가는 작은 동물의 세상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모습과 동일시(identification) 한 것으로 보인다. 동물에게 자신의 감정을 이입(移入)시키고 마치 삽사리가 작가인 듯 덤덤하고 성숙한 시선의 흐름들이 드러나고 있다. 사실, 작가가 주목한 것은 끈으로 묶여 살아야 하는 강아지들의 숙명과도 같은 운명이 인간의 운명과 교차된 듯 하다. 묶여짐은 자유의 구속이며, 인간 영혼을 옳아 매는 물컹하고 끈적한 덩어리의 욕망, 유한한 생명을 지닌 인간이기에 느끼는 희, 노, 애, 락과 같은 필연적 고통과 같은 인생살이를 둘러싸고 내재해 있는 슬픔들이다. 따라서 화면에서 삽사리와 관계를 맺고 있는 나비, 잠자리를 비롯한 날개달린 존재의 등장은 구속을 해방시키는 영원한 자유이고 기쁨으로써, 삽사리로 이입된 작가의 내면이 투영된 초월된 세계, 이상 세계로써의 형상인 것이다.
이러한 자유의 구속과 초월된 자유로의 희구에 관한 백미(白眉)는 ‘莊子’ 제물론에 나오는 호접몽(胡蝶夢)이다. 장주(莊周)는 꿈을 꾸었는데 날아다니는 나비가 장주였는지, 장주가 나비였는지 조금도 알지 못하였다 한다. 그것은 오롯한 즐거울 뿐이었다 한다. 이 장주가 나비가 되어 그것을 알지 못하고 지극한 즐거움만이 있는 것, 주객(主客)이 일체가 되어 나를 잊은 완전한 정신의 대자유의 상태, 즉 소요유(逍遙遊)의 경계인 것이다. 장자에서 구름을 타고 해나 달에 올라앉아 이 세상 밖에 나가 노닌다.(제물론), 홀로 천지의 정신과 오가며 위로는 조물주와 노닌다.(천하편)의 이러한 비유는 모두 절대 자유의 상태를 은유한 말이기도 하다. 즉, 봄날 삽사리가 나비를 바라보는 풍경은 작가가 설정한 완전한 정신의 대자유를 얻은 이상향으로서의 모습인 것이다. 사실 화가에게서 구속받지 않는 절대자유의 상태는 기교와 상상을 뛰어넘은 순간으로서의 자유, 초월된 세계로의 자유는 저 높은 미적 완성을 획득한 예술적 경지에 다다른 상태 인 것이다. 그것은 정헌칠이 꿈꾸는 인간의 세상이고 예술의 경지인지도 모르겠다.
2. 傳神寫照, 그 정신과 형체의 결합
이렇듯 작가는 우리민족과 함께한 삽사리를 구체적으로 보여줌으로써 한국 전통성의 환기를 불러일으킨다. 김두량의 1774년 삽사리를 그린 그림에는 “사립문을 밤에 지키는 것이 네 책임이거늘 어찌하여 낮에 또한 이와 같이 짓고 있느냐”의 영조가 쓴 제발(題跋)이 있다. 이처럼 조선시대 영 · 정조 기에는 동물화들이 많이 그려졌는데 그 가운데서도 김두량이 주로 그리던 토종 강아지였던 삽사리 그림들이 돋보인다. 정헌칠의 강아지 그림은 이러한 조선시대 후기에 일었던 사실적인 묘사의 동물화에 그 전통적 계승을 보인다. 영 · 정조 시대의 화화의 양상은 실학의 대두로 인하여, 실제의 모습을 보고 그린 듯 사실적인 묘사가 유행하였고, 조선중화사상과 같은 우리 것에 관한 새로운 인식적 전환이 일어남에 따라 풍속화들이 대거 그려졌다.
따라서 정헌칠의 강아지들 또한 이러한 조선후기에 두드러지게 표현되었던 동물화의 사실적인 털 묘사와 운동감이 강조되고 있다. 그리고 그 시작은 분명코 삽사리라는 우리의 강아지에 관한 재인식에서 출발하고 있다. 민족의 곁에서 오랜 시간을 함께해 온, 삽사리의 귀엽고 사랑스럽고 또한 믿음직하고 무한한 신뢰의 모습은 작가의 뛰어난 묘사력으로 인해 잘 드러나고 있다. 이는 형체를 통해 그 정신과 본질을 드러내는 전신사조(傳神寫照)의 미학을 보여주는 것이다. 전신사조는 그림에 있어 터럭 한 올까지도 사실적으로 그려내어 그 인물의 정신적인 높은 단계를 가시화하는 것으로, 이는 조선시대 인물화의 화론(畵論)으로써 주로 거론되었는데 윤두서의 ‘자화상’을 예로 들 수 있겠다.
곽약허(郭若虛, 北宋, 11세기)의 도화견문지(圖書見聞志)에 의하면 가축이나 짐승은 형태를 나누고 위치와 정신을 나타내어, 피부는 둥글게 하고 털은 자연스럽게 나온 것처럼 하며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동물의 성품이 나타나게 해야 한다고 한다. 이처럼 동물의 묘사는 그 세부의 형상을 사실적으로 드러내는데 있어 그 본질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작가는 핍진하고 집중화된 묘사로부터 한국 삽살개의 정신을 획득하는데 성공하고 있다. 이는 작가의 치밀하게 계산되고 정제된 필선들의 집합이 동체를 형성하고 근육들의 자유로운 움직임을 만들어내어, 강아지의 시선이 인간의 시선처럼 진정성 있는 감성의 흐름을 만들어내고 있다. 또한 이 탄력 있는 필선들과 구도의 흐름이 고도의 초탈, 달관의 경지에 이르는 정신의 상승을 보여준다.
개에게서 구속된 인간 단상의 참 모습을 본 작가는 완전한 정신의 대자유로서의 이상향으로써 발전해 가고 있다. 또한 그 이상향으로의 초월된 세계는 고도의 집중된 묘사하기의 과정을 거치면서 그 형상 속에서 대상의 본질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삽살개라는 우리가 잊고 지내 온 민족의 한 부분을 들춰내어 그 아름다움과 가치를 확대하고 각인시키며 인식의 환기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작가가 획득해낸 전신(傳神)의 미학 속에는 구속에의 해방이 존재하며 그 해방은 완전한 생명성의 복귀와 회복이 있다. 모던으로 자행되어진 서구식의 잘라내고 뜯어 붙인 어색한 현대의 모습들은 우리의 역사와 그리움을 가로막고 망각시키고 있다. 어쩌면 정헌칠의 작품 속에서 현대문명에 관한 반성의 어조가 엿보이는 것은 당연한건지도 모르겠다. 차분하게 긴 시간을 두고 완성시키는 섬세한 작가의 화면은 그 멀고 오랜 전통을 되새기고, 우리 것을 알고 기억하고 기념하는 새로운 문화의 지형을 그려내는 듯 하다. 사실, 이것은 작가가 이 맑고 천진하고 충직한 삽사리에게서 본받아야할 잃어버린 인간성에 관한 토로이고, 고향, 향토성과 같은 잃어버린 그리움의 회복에 관한 견고한 외침이기도 하다.(박옥생, 2011. 8)
– 장소 : 리빈 갤러리
– 일시 : 2018. 5. 4. – 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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