觀物聽心으로 追究한 寂音의 世界
정광화
한국화가 이민한은 “소리”라는 비가시적인 현상을 작품의 중요한 모티브로 다루고 있다.
소리는 음(音)과 성(聲)으로 나눌 수 있다. 성(聲)은 인간이나 동물의 목구멍을 통하여 나오는 소리를 말한다. 음(音)은 자연계의 여러 물질이 서로 부딪치거나 마찰에 의해서 나는 소리이다. 동양에서는 이 音을 궁,상,각,치,우 다섯 가지로 분류하여 그 음의 성격을 구분한다. 음은 본질적으로 동적인 활동에 의하여 형성된다. 즉 “물질과 물질이 부딪치거나 어떤 외부 작용에 의한 마찰, 혹은 물질 변화의 움직임을 통해서만 소리라는 존재가 들어난다”는 말이다. 소리는 본질적으로 형태가 없기 때문에 눈으로 볼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청각활동을 통하지 않더라도 소리를 느낄 수 있다. 나무의 흔들리는 모습에서 바람소리를 느낄 수 있고, 질주하는 자동차를 보면서 굉음을 느낄 수 있고, 무너지는 건물 파편을 보고 폭발음을 느낄 수 있다. 반대로 움직임이 전혀 없는 침묵의 공간에서는 소리가 없는 적막함을 느낀다.
이민한의 작품에서 보여 지는 “소리”는 두 가지 경향의 적음(寂音)이라 말 할 수 있다. 첫째는 해가 지고 어둠이 막 시작하는 저녁 무렵 바람 한 점 없는 호수의 고요한 정경에서 느낄 수 있는 침묵과 고요의 소리인 적음이다. 둘째는 빠르게 움직이는 공장의 기계음이나 떨어지는 폭포소리와 같은 굉음 한 가운데 서 있으면 어느 순간에 그 소리의 울림 속에 동화되어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하다. 이것도 적음이다.
폭포에 있는 새의 그림에서는 직선으로 길게 폭포를 배치하고 바위나 돌에 부딪쳐서 흩어지는 폭포수와 쏫아 지는 물살을 온몸으로 맞으며 서있는 한 마리 왜가리만 화면에 있다. 그저 담담한 일상적 풍경처럼 보인다. 그러나 폭포수의 굉음은 귓가에 울리는 듯 보이지만 물속에서 종족보존을 위해 세찬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는 수많은 물고기들의 생존의 몸부림 소리는 보이지 않는다. 또 그것에 시선을 집중하고 먹이사냥에 몰입하는 왜가리의 귀에는 더욱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즉 적음의 순간이다.
잔잔한 물을 그리고있는 작품들은 수많은 작은 점들이 모여서 윤슬이나 물의 파동의 모습을 담은 물가 풍경을 그려내고 있다. 점과 점으로 이어진 수면의 단조로움을 막기 위해 몇 줄기의 수초를 수직에 가까운 사선으로 그렸다. 물위에 떠있는 크고 작은 몇 개의 돌과 드문드문 뻣어 있는 수초 때문에 수면위에는 고요와 침묵만이 존재하는 허공이라 느껴진다. 넓은 빈 공간 구석에 숨조차 쉬지 않고 서있는 왜가리 한 마리가 있다. 물속을 주시하는 왜가리의 한 동작에 의해 곧 깨질 것 같지만 고요한 침묵만이 흐르고 있는 적음의 공간이다.
그가 왜 시공간적인 적음을 작품의 중요한 정신적 배경으로 선택했을까? 그것은 그가 말하는 관물청심(觀物聽心)이라는 말에서 설명이 된다.
관물(觀物)이란 물성의 본질을 본다는 말이다. 물성의 본질을 보려면 먼저 감정을 최대한으로 억제시켜서 무아(無我)나 몰아(沒我)의 정적인 상태가 되어야만 대상과 합일이 되고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 이렇게 될 때 관조(觀照)의 세계에 접어들게 되고 진정한 관물(觀物)이 이루어졌다 할 것이다.
청심(聽心)이란 마음의 소리를 듣는다는 뜻이다. 마음의 소리가 무엇인가? 마음의 소리란 생명의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울림을 말한다. 이 소리는 인간의 욕망과 이기심이 사라진 상태에서 들리는 가장 순수한 물성의 살아있는 생명력의 소리이다.
그는 역동적인 필력이나 발묵과 같은 호방한 먹의 사용은 억제하고 순수한 먹색을 고집한다. 대상의 속성을 쉽게 드러낼 수 있는 선묘를 배제하고 정적인 점묘법을 주로 사용한다. 그가 왜 연못이나 호수 같은 물, 해질 녘 언덕이나 숲속의 길과 나무 등을 은은한 먹빛의 점으로만 쌓아 올려 표현하고 있을까? 그것은 적음의 공간을 통하여 소리가 소멸된 “공의 세계의 무한성”을, 적음의 순간을 통하여 “자연 생명체의 살아 숨 쉬는 찰나”를 그려내고 싶어 하는 것 같다. 또 대상의 감각적인 칠정(七情:희노애락애오욕)의 색감은 억제하고 현(玄)의 세계를 구현할 수 있는 적묵의 점을 통하여 “물성의 본질을 극대화”하려는 목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므로 그의 작품에서 들려지는 소리는 “적멸한 공의 세계에서 느낄 수 있는 공명의 소리”이며 “삼라만상의 총체적인 생명체의 마음의 소리”이다. 그래서 어떤 개별적이고 잡다한 물성의 소리 보다 더 큰 울림으로 작품을 보는 감상자의 마음속에서 울려 퍼지는 것이다.
이민한의 작품 속에서 瞬間과 空間의 寂音이 들리는 것은 결코 우연한 현상이 아닐 것이다.//서양화가 정광화//
– 장소 : 해운아트갤러리
– 일시 : 2017. 12. 4. – 12. 10.
추PD의 아틀리에 / www.artv.kr / abc@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