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적 소통을 위한 조형언어의 탐구
임성훈 (미학)
예술작품의 존재방식에 대한 사유는 예술의 자율성과 예술의 사회, 문화적 소통가능성 그 사이 어딘가에 내재한 ‘긴장감’(tension)을 의미 있게 읽어내는 데서 출발한다. 작품의 존재방식은 근원적으로 작품 그 자체의 형식을 통해 드러남과 동시에 감상자의 문화적 지평을 통해, 즉 작품이 감상되고 이해되는 소통의 과정을 통해 포착된다. 달리 말하면, 예술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 자율적 형식이지만, 그 존재방식은 단지 그 자율적 형식에 대한 구조적 분석을 통해서만 파악되는 것은 아니며, 작품과 감상자 사이에 내재한 미적 문화의 소통 가능성을 통해서 비로소 전체적으로 조망된다. 여기에는 작품이냐 해석이냐를 따지는 단순한 이분법적 구분은 전혀 의미가 없으며, 예술 자체의 현존성과 그 예술이 어떻게 번역되고, 또한 소통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 더욱 중요하다. 이러한 물음에서 파생되는 미적 긴장감은 바로 예술의 존재방식에 대한 근원적 물음과 맞닿아 있다. 예술작품에 있어 그 존재방식의 층들은 단순히 구조적인 분석과 설명만으로 드러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감상자의 직관적 감수성과 이해의 지평 및 차이성이 함께 사유될 때 비로소 그 모습을 드러낸다. 작가의 조형적 세계, 예술 작품 그리고 감상자의 수용 미학은 서로 만나기도 하고 엇갈리기도 하고 때로는 상충되기도 하는 과정 속에서 미적 긴장감은 의미 있게 형성되고, 또한 미적 체험의 ‘분위기’(atmosphere)가 환기된다. 요약하자면, 미적 분위기 속에서 작가의 언어, 작품 그리고 수용미학이 서로 만나게 되는 예술적 소통의 ‘장’(field)에서 예술의 존재방식에 대한 이해의 지평이 열리게 된다. 12년이란 긴 시간 동안 원과 사각의 변용을 주제로 한 “존(存)” 연작을 선보인 홍승남의 작업은 예술의 존재방식의 사유, 미적 긴장감의 지평 그리고 함축성을 그의 독특한 조형언어로 표현하고 있다.
홍승남의 “존” 연작은 기하학의 기본 형태인 원과 사각의 다양한 변용으로 전개되고 있다. 얼핏 보면 “존” 연작 작품들이 차갑고 냉정한 성질을 지닌 스테인리스 스틸을 재료로 하여 조형되었을 뿐만 아니라 극도로 생략되고 절제된 단순한 조형성 때문에, 단지 관념적이고 난해한 일반적인 추상조각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홍승남의 작업은 차가움과 난해한 추상적 작업과는 거리가 멀다. 그의 작품은 추상성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일상성에 더 맞닿아 있다. 그런데, 절제와 생략을 통해 이루어진 원과 사각의 기하학적 조형이 일상적 대상의 실재를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일상성과의 거리감이 아니라 일상성과의 친근함으로 표상된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바로 예술의 존재방식과 그 소통을 모색하는 작가의 조형언어가 작품 곳곳에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존” 연작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의외로 차갑고 기하학적인 형식성과 장식성이 결코 강조되고 있지 않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원과 사각의 다양한 변용은 그 자체로 기하학적 형식의 대상성에 고립되지 않는다. 즉, 원과 사각이, 마치 일상성에서 체험되는 삶의 매듭과 풀어짐의 과정처럼, 다양한 변용의 형식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홍승남의 절제된 기하학적 조형은 차갑게 고립되거나 또는 엄격한 대상의 형상성을 반영하지 않는다.
홍승남의 “존” 연작은 그 자체 완결된 구조를 지닌 대상의 조형성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감상자를 초대하고 감상자와 함께 “존”의 조형성을 채워가는 ‘과정의 미학’이라 할 수 있다. 작품 속에 형상화된 “존”은 단지 관념적 기억의 형식으로 남아 있지 않다. 일상의 심상들이 응축된 “존”이며 감상자와의 만남을 통해 그 의미가 열려지고 채워진다. 즉, 생략과 절제를 통해 기하학적으로 응축된 “존”의 추상성은 감상자의 심상에 의해 그 추상성이 풀어지고 일상적 조형성으로 변용된다. 수용자의 감상으로 채워지고 이를 통해 “존”의 의미가 더욱 확대되는 소통의 과정이 중시되는 조형미를 담고 있는 홍승남의 작업에는 조형적 형상화의 자율성을 성실하게 견지하면서도 동시에 감상자의 수용 미학을 반영하고자 하는 모색이 감지된다. 일방적이고 단선적인 소통이 아니라 쌍방향적인 소통이 강조되는 오늘날의 미적 문화의 관점에서 본다면, 홍승남의 작품에 담긴 이러한 조형의식은 주목할 만하다. 특히 그의 환경조형물 작품들을 살펴보면 소통을 위한 수용미학이 적절히 고려되고 있다는 점을 한층 더 잘 읽어낼 수 있는 데, 예를 들어 종로타워에 설치된 “원의 정원”을 보면, 작품 자체에서 느껴지는 깔끔한 조형미와 더불어 작품과 대중이 자유롭게 만날 수 있는 소통의 공간을 염두에 둔 작가의 조형의식이 잘 드러나 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홍승남은 환경조형물 작품이 안고 있는 어려운 문제, 즉 예술의 조형적 자율성과 예술의 공공성 사이에 내재한 긴장감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이를 작품에 반영하고 있다고 하겠다.
이번 전시회에서 홍승남이 선보인 “존” 작품들은 1994년부터 작가가 꾸준히 추구해온 원과 사각의 이중주적 변용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큰 변화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스테인리스 스틸을 재료로 하여 단면적 구성이 아니라 망(網)의 구성으로 작품이 조형되었다는 점은 이전의 “존” 연작과 확연히 구분되는 지점이다. 또한 이전 홍승남의 “존” 연작을 눈여겨 본 관람객이라면, 이번 망의 구성이 그 이전의 작품에서 쉽게 감지할 수 없었던 보다 확장되고 폭넓은 공간의 공유성이 강조되고 있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전의 “존” 연작이 원과 사각이 빚어낸 외적인 조형언어가 강조된 판재의 형식으로 표현된 반면에, 이번 전시회는 판재가 아니라 독특한 조형적 정서를 환기시키는 망의 구성을 통해 원과 사각의 변용을 표출하고 있다. “존”의 의미는 망을 위주로 한 구성의 변화를 통해 내적인 공간성과 그 공유 속에서 보다 근원적으로 포착되고 있는 것이다.
망의 구성으로 조형 공간의 깊이와 폭이 보다 확대되고, 따라서 조형성과 공간성이 밀접히 결합된 효과를 자아내고 있기 때문에, 공간에 있어서 형태의 ‘포지티브’(공간에 있는 형상)와 ‘네거티브’(형상외부의 공간)로 구분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한편, 망의 구성에 따른 표면성의 부재가 조형적 대상성을 약화시키는 면이 있다. 그러나 보다 주목해야 할 것은 망의 구성을 통해 작품 대상과 감상자 사이의 공간적 거리가 극적으로 좁혀짐에 따라 미적 체험을 위한 공간적 공유성이 확대된다는 점이다. 즉, 대상 작품과 감상자의 거리가 좁혀지고 공간의 공유가 확보됨에 따라 원과 사각의 조형적 변용들은 이전의 존 연작보다 더 일상적 친숙함으로 다가온다. 감상자는 자연스럽게 바닥에 설치된 작품을 빙 둘러가면서 다양한 지점에서 작품을 감상하는 동안 원과 사각의 빚어내는 다양한 이미지의 변용을 체험한다. 감상자가 서 있는 위치에 따라 변하는 원과 사각의 입체적 상들은 감상자의 심상에 그대로 투영되고 또 다른 이미지로 중첩되기도 한다. 또한 작품은 전시장 바닥에만 설치된 것이 아니라 벽에도 걸려 있는 데, 벽에 걸려 있는 작품은 마치 비구상 회화를 걸어 놓은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벽에 걸린 또 다른 조형 작품에는 스테인리스 스틸이 지닌 광택의 표면성과 율동감을 살린 조각이 덧붙여져 있는 데, 이는 마치 캔버스위에 은백색으로 생략되고 절제되어 처리된 비구상적 회화와 같은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무엇보다 전시장에 들어선 감상자는 바닥에 설치된 원과 사각의 입체적 망의 구성과 벽에 설치된 회화적 조형성이 부여된 망의 구성이 공간속에서 서로 공유되고 조응되어 생겨나는 미적 분위기를 체험하게 된다. 감상자는 작품 밖이 아니라 작품 속에 들어 있는 느낌을 받기도 하는 데, 원과 사각을 주조로 한 조형적 입체들이 만들어내는 공간의 공유성이 감상자를 압도하지 않고 자유스러운 조응 속에서 감상자의 참여를 유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홍승남의 “존” 연작, 특히 이번에 소개된 망의 구성을 주조로 한 “존” 연작이 환기하는 미적 경험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의 작품을 미니멀 아트라고 단정적으로 규정할 수 없다. 물론 미니멀적인 기법이나 조형형식이 엿보이기는 하지만, 이는 작품 전체에 녹아있는 작가의 조형의식을 고려해본다면 단지 일면적인 관찰에 지나지 않는다. 홍승남의 작업은 미니멀리즘이 추구하는 조형성과는 다른 조형의 언어를 모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존” 연작에서 탐구된 조형의식은 기하학적으로 환원된 형태의 산술적 질서에 중점을 두고 있지 않다. 달리 말하자면, 그의 작품에 생략과 절제의 미학적 형식이 나타나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단순히 기하학적인 형태로의 환원성이 시도되거나 그런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또한 미니멀리즘 계열의 작품 형식에서 일반적으로 엿보이는 즉물적 산술성이나 객관적 합법칙성이 아니라 오히려 반성적 요소를 지닌 주관적 합법칙성이 작품의 밑바탕에 깔려 있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특히 스테인리스 스틸에 내재한 차가운 성질이 기하학적인 구도와 접목될 때 더욱 더 차갑고 엄격한 분위기가 연출되기 쉬운데, 홍승남의 작품에서는 기하학적 엄격함이 오히려 누그러져 있다. 그리고 미니멀리즘 계열의 작품에는 흔히 의도적으로 은유성이 배제되어 있는 반면에, 그의 “존” 연작은 “존” 이라는 연작의 제목에서 암시되듯이 작품에 은유성이 짙게 녹아있다.
망의 구성을 통해 외부와 내부가 열려진 공간의 공유성이 확대되면서 감상자는 원과 사각의 구조 형식 자체에 몰입하거나 그 대상의 형식성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열려진 소통의 공간을 감지하게 된다. 즉, 감상자는 작품에 반영된 함축과 은유를 자연스런 미적 소통의 방식으로 읽어낸다. 특히 이번 “존”연작 중에서 주목할 만한 조형미를 갖추고 있는 작품 – 사각의 입체적 망 속에 움푹 들어가 형성된 또 하나의 사각 형태를 지닌 작품과 원의 형태를 지닌 작품 – 은 동일성과 비동일성의 사유를 함축적으로 제시한다. 사각과 사각의 동일성 그리고 사각과 원이라는 비동일성이 열려진 공간적 형상을 통해 공유되고 있으며, 이는 곧 서로 같은 것으로 존재함과 서로 다르게 존재함이 조형적 공간 속에서 그리고 일상성속에서 포용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달리 표현하자면, 망의 구성을 통해 형성된 조형적 공간의 공유성이 원과 사각의 대립성을 변증법적으로 해소하고 있다.
철망의 구조 형식이라 하면 흔히 구속의 이미지를 연상하기 쉽지만, 홍승남이 스테인리스 스틸을 재료로 하여 작업한 망의 구성 형식에서는 구속성과 차단성을 전혀 경험할 수 없다. 오히려 망의 구성을 통해 원과 사각의 변용이 더욱 자유롭게 유영하고 있기에 작품 그 자체가 소통의 통로가 된다. 생략되고 절제된 기하학적인 구성이지만 단순한 형식적 조형을 넘어서서 자유로운 소통의 모색이 작품에 담겨있기에 관람자는 마치 친숙하고 익숙한 일상의 사물을 바라보는 듯이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작품들이 공간을 점거하는 것이 아니라 공유된 공간의 조형미 속에서 유영하고 있기 때문에, 작품은 작품 자체로 고립되거나 매몰되지 않으며, 관람자는 자신의 지각성에 환기된 정서에 감응하게 된다. 이번 전시회에 선보인 망의 구성을 주조로 한 원과 사각의 “존” 연작을 통해 볼 때, 홍승남은 작품 자체의 조형 형태뿐만 아니라 그 조형성 너머에 있는 감상자의 미적 체험 및 그 공유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홍승남이 앞으로도 계속 원과 사각의 변용을 테마로 한 “존” 연작을 이어갈지, 또 계속 이어진다면 어떤 구성의 변화를 보일 지는 짐작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지난 13년 동안 계속 모색된 홍승남의 “존” 연작과 환경조형물에 드러난 조형언어를 전체적으로 조망해 볼 때, 예술의 존재방식에 대한 사유 그리고 예술의 자율성과 소통(공공성)에 대한 긴장감은 그의 조형언어 속에서 계속 모색될 것으로 보인다. 홍승남의 작품은, 음악 용어를 빗대어 설명하자면, 절제와 생략의 조형미를 담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단선율적’(monophonic)이지만, 그 존재방식과 소통의 가능성이 공유되고 열려진 공간에서 다양하게 울린다는 점에서 ‘다성악적’(poly phonic)이다.//임성훈//
– 장소 : 갤러리 P&O
– 일시 : 2017. 12. 1. – 12.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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