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회화적 담론談論으로 풀다 – 부산, 회화적 담론談論으로 풀다
정인성
나는 부산에 대하여 말하려고 한다.
낭만이 파도로 밀려와 철썩거리는 바다 그 바다에 삶의 터를 잡고 사는 사람들의 일상이 피고 지는 곳 부산이다. 밤을 밝힌 등대 불빛이 여명으로 지워진 아침 뱃고동 소리가 삶의 시작을 알리고 밤새 조업을 마치고 귀항하는 만선의 바다는 꿈이며 희망이다. 나는 그 꿈과 희망의 실현을 시작하는 부산을 그림으로 말하려 한다. 부산의 역사와 부산 사람들의 거칠고 부드러운 삶의 애환哀歡이 얼룩처럼 묻어 있는 이야기들을 회화적으로 표현해 보려고 한다.
회화란 여러 가지 선이나 색채로 평면상에 형상을 그려 내는 조형 미술을 말한다. 그림을 그리는 행위나 마음이 곧 예술 활동이다. 화가는 세상을 보는 방법을 그림으로 말해 준다. 삶의 여유를 마련해 주기도 하며 즐거움과 기쁨을 주기도 한다. 그것은 그림 속에 즐거움이나 기쁨을 주는 회화적 요소가 스며져 있기 때문이다. 회화적 요소란 조형미를 이루는 기법이나 구도, 그리고 색의 배열과 선택된 재료를 통해 표현되는 작가의 철학과 사상 혹은 주제의 의미 등을 말한다.
이번 전시의 주제는 해양 도시 부산이다.
매일 아침 산복도로가 끝나는 골목을 빠져나오면 옥상 가득 걸린 푸른 바다가 있다. 해풍은 건강한 웃음을 빨래처럼 펄럭이고 바다에 기대어 떠오르는 태양을 가슴으로 품는다. 창문을 열면 파도 소리가 창 안 가득 들어온다. 아침을 시작하는 커피 한잔에도 파도 소리가 젖어 있다.
파도 소리는 그리움처럼 나를 호명하고 가슴에서 일어서는 색의 언어로 부산항을 읽는다. 나는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사물의 형태에서 색을 해방시켜 본다. 혼효混淆된 빛깔로 부산항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오버랩 되어 가슴으로 들어와 오롯이 새겨진다. 부산하게 오가는 어선들이 수면 위에 시간의 궤적軌跡을 긋는다. 그 시간의 흔적을 따라가면 부산만의 독특한 역사성이 보인다. 피난민들의 아픈 사연이 그물처럼 얽혀있는 용두산 공원과 영도다리, 이웃한 철강 아치형의 부산대교, 어부의 구릿빛 팔뚝에 불거진 핏줄 같은 부산항 대교와 대교를 연결하는 고가도로, 청회색 봉래산을 영검하게 품고 바다에 누운 영도, 수평선으로 점점이 멀어져간 오륙도까지 역광 속에 펼쳐져 있는 풍경은 절로 감탄사가 나온다. 그래서 그 바다를 보면 가슴이 뛴다. 가슴으로 밀려오는 감동과 영감을 부감俯瞰법으로 화폭에 담아낸 <부산항 이야기> 시리즈는 유화와 수채화로 내가 즐겨 그리는 작품의 주 모티브(motif)이다.
부산의 또 다른 모습이 감천 문화 마을이다. 감천 문화 마을은 1950년대 6.25 피난민의 힘겨운 삶의 터전으로 시작된 곳이다. 산자락을 따라 질서정연하게 늘어선 계단식 집단 주거형태와 미로 같은 골목길은 삶의 애환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산비탈을 따라 아기자기하게 들어선 집들은 감천문화마을만이 지닌 특색이라 하겠다. 이러한 아름다움을 회화적으로 풀어낸 <감천 문화마을 이야기>나 <시간의 사유>도 연작으로 그렸다. 이 작품들은 그동안 즐겨 그려온 리얼리즘적 작업 방식을 탈피하고 내면의 심상적 조형 요소로 대상을 읽어 내려고 노력했다. 그 방안은 두터운 색의 배열에 있다. 색은 눈에 빛이 들어와 생긴 뇌에서 만들어진 지각知覺이다. 그 지각에는 여러 가지 심리적, 생리적 요인이 작용하는데 나는 색의 항상성恒常性과 동시대비를 이용하여 감천 문화마을 사람들의 시간의 흔적과 삶의 애환을 아름답고 행복해 보이도록 표현해 보려고 했다. 그렇다고 색의 배열이 의도적이거나 계산적이지 않고 기분대로 마음이 가는 데로 나이프로 떠서 발랐다. 그것은 감천문화마을에서 느껴지는 현장감과 마을 건너편 산복도로에 서서 오랫동안 바라봄으로써 생기는 감정의 관조적觀照的 발현發現 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내 몸이 기억하는 감천문화마을에 대한 모든 기억과 영감을 회화적 담론으로 풀어내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작업한 작품 일부는 캔버스가 아닌 두꺼운 합판에 제소로 마티에르(matière) 효과를 먼저 내고 그 위에 나이프로 색을 두텁게 발랐다. 이는 천이 가진 유연한 성질과 합판의 딱딱함에서 찾을 수 있는 감성感性을 포집捕執하여 실험적인 작업을 시도해보았다. 합판 위에서는 분명 캔버스에서 사용하지 못한 오브제(objet) 작업이 가능하리라 생각되어서였다. 아직 작품의 의미에 걸맞은 오브제를 생각해 내지 못해 미완의 작품 상태로 출품 되지만, 앞으로 내가 풀어내야 할 숙제로 남겨졌다.
부산의 야경은 다른 어떤 도시보다 아름답다.
수면에 비치는 불빛이 환상적이다. 어둠이 품고 있는 빛은 세상의 모든 악함과 추함과 시끄러움까지 아름답게 승화시킨다. 어둠은 지움이다. 지워짐 속에서 남는 불빛은 함축의 찬란함이 내포內包되어 있다. 그것이 하나의 점 이었다가 집단이 되면 면이 되기도 한다. 도시의 불빛이 조형적 요소로 화폭 속에 정착될 때 색의 절제를 통한 시간의 멈춤은 야경의 아름다움에 온기를 더해준다. 그 온기를 묘사한 <부산항 야경>과 <장산에서 바라보다> <시간의 궤적>같은 작품이 그것이다.
삶이란 무한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다가 죽느냐 하는 문제는 화가로서의 삶의 질을 결정해야 하는 중대한 일인 것 같다. 이것은 예술에 대한 나의 열정과 삶의 현실이 치열하게 부딪히게 되는 절박한 사연事緣을 말해 준다. 색은 생각을 상징한다. 그리고 모든 색에는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과 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사유思惟의 차이를 좁힐 수 있는 대단히 중요한 요소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이번 전시회를 통해 색으로 부산을 말하고 아울러 나 자신의 번민과 남은 생애에 대한 예술가로서의 고뇌를 풀어 보려고 한다.//정인성//
– 장소 : 을숙도갤러리(을숙도문화회관 전시실)
– 일시 : 2017. 10. 16. – 10.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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