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B저널 기사//
화려하고 자극적인 이미지가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지는 세상이다.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더욱 자극적인 콘텐츠들이 경쟁적으로 쏟아져 나오고, 이런 이미지들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보다 자극적인 것을 원하면서도 피로함을 느낀다. 이 가운데 인사동 선화랑에서는 고요한 풍경이 펼쳐졌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신나게 놀다가 다 떠나고, 이윽고 찾아온 새벽의 정적과도 같은 느낌이랄까. 그런데 그 느낌이 쓸쓸하지는 않다. 이 고독이 반갑고 또 평화롭다.
안광식 작가가 선화랑에서 개인전 ‘자연-일기(Nature-diary)’전을 9월 23일까지 연다. 작가는 2010년 선화랑 330인 전의 작가이자, 2015년 첫해를 여는 주목 작가를 소개하는 ‘예감전’에서 소개됐다. 그리고 이번엔 25번째 개인전을 선화랑에서 열게 됐다. 원혜경 선화랑 대표는 “안광식 작가는 수채화와 같은 풍경으로 보는 이에게 평온함을 가져다주는 작업이 인상적”이라며 “작가의 깊이 있는 풍경을 함께 느껴보고자 이번 자리를 마련했다”고 말했다.
높은 빌딩과 자동차 경적 소리 등 소음이 가득한 거리를 걷다가 전시장에 들어서면 다른 곳으로 순간 이동을 한 느낌이다. 작가의 화면엔 자연이 있다. 그것도 수수한 꽃들과 풍경. 화려한 장미보다 파스텔톤의 이름 없는 들꽃과 들풀을 담았고, 유명한 바다와 강보다 어디에선가 본 것 같은 잔잔한 물결을 담았다. 왜 작가는 이런 풍경에 주목했을까.
“크고 화려하고 예쁜 것들에는 누구나 쉽게 관심을 갖죠. 그런데 그 이면에는 작고, 이름 없고, 모르는 사이 잊히는 것들이 분명히 존재해요. 저는 오히려 이 존재들에게 관심이 갔어요. 어렸을 때 시골에서 자라 늘 자연 풍경을 보면서 자랐어요. 길가에 핀 꽃과 풀, 작은 돌멩이까지 모두 친근했죠. 이에 대한 향수도 있는 것 같아요. 자신도 모르게 잊어 가는 소중한 기억들, 그리고 거기에 존재하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아름다움, 이 이야기들을 풍경을 통해 하고 싶었습니다.”
그림 속 풍경이 작가만의 풍경을 넘어서 모두의 풍경이 될 수 있는 건 ‘어디선가 본 듯한’ 즉, 초현실적인 작가의 화면에 있다. 그림을 보고 “이곳은 어디예요?”라고 물어볼 수 있겠다. 그런데 작가는 그림을 그릴 때 사진을 찍거나 대상(자연)을 보고 그리지 않는다. 기억으로 자연을 인지하고, 노래하듯 그림을 그려나간다. 그래서 그의 그림 속 풍경은 실재하는 곳은 아니다. 실제 바닷가에 필 수 없는 들풀들이 화면에 함께 자리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렇게 초현실적인 풍경임에도 친근하다. 일기를 쓸 때 하루 일과를 머릿속으로 되짚으며 글을 써나가듯, 작가는 그만의 일기를 그림으로 그린다. 즉 수많은 풍경을 마주하고, 이곳에서 느낀 경이로움, 그리움이 그림을 이루는 주요 토대다. 평온하고 찬란함을 느낀 곳에 대한 기억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 그래서 초현실적인 작가의 풍경을 보고 각자의 기억을 토대로 그림을 바라보게 된다. 작가의 풍경이 자신의 풍경으로 바뀌어 다가오게 되는 오묘한 체험이다.
작가는 이전 작업에서 바깥의 풍경을 많이 보여줬다면, 이젠 이 풍경을 동양적인 화병에 담은 ‘화병 시리즈’도 2년 전부터 선보이고 있다. 백자에 흰색 꽃, 분홍색 꽃이 꽂힌 모습이 눈길을 끈다. 정물화에서는 잘 볼 수 없는 정면 구도도 인상적이다.
“서양화를 전공했지만 예전부터 동양화에 관심이 많았어요. 자연에서 느끼는 경이로움과 조화, 제가 그리고자 하는 이야기들도 동양적인 사상과 맞닿았고요. 자연스레 동양적인 소재에도 관심을 기울이게 됐고, 화병도 그리게 됐어요.”
그림을 그리는 과정 또한 연구를 거쳤다. 서양화는 물감을 쌓아가는 과정을 토대로 이뤄지고, 동양화는 여백의 미, 그리고 화면에 스며드는 과정이 있다. 작가는 흰 여백을 만들기 위해 얇은 한지를 쌓아 올리듯 한 겹씩, 한 겹씩 쌓으며 50여 번의 겹으로 작품을 완성해 나간다.
“화면의 연상 혹은 잔상을 생각하며 스케치를 하고, 이 모든 것을 특수 제작한 스톤 파우더(돌가루 용액)로 지워요. 그러면 지운 화면 위에 잔상이 남게 되죠. 그 상을 통해 다시 그림을 그리고, 물감을 떨어뜨리는 드리핑(dripping) 기법으로 또다시 지우기를 반복하죠. 화면에 떨어진 물감들은 자연스럽게 화면에 스며들고요. 이전에 자연 이미지들을 하나씩 채워 구체적인 모습을 남기는 데 집중했다면, 현재는 그려서 채우는 게 아니라, 지워서 비워 나가는 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작가가 그림을 그릴 때 또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이 있다. 바로 빛. 꽃과 물이 함께 어우러지는 풍경에서 그 풍경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요소는 물에 반사되는 빛들이다.
“사진을 찍어서 나타나는 색보다는 윤슬(햇빛 등에 비치어 반짝이는 잔물결)에 초점을 맞춰 그림을 그립니다. 빛이 우리 인생사와 닮았다고 느꼈거든요. 슬쩍 반짝일 때도 있고, 아주 찬란하게 비칠 때도 있고, 노을처럼 은은하게 비칠 때도 있죠. 수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삶을 살아가는데, 저마다 살아가는 방식이 이 빛과 비슷해 보였어요. 수면에 비치는 빛을 통해 마치 거울과도 같이 자신의 삶과 기억을 되새겨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랐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주목하거나, 또는 주목하지 않더라도 누구나 저마다의 빛을 품고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이 소소한 빛들이 모여 세상을 이루듯, 작가는 화면 속 초현실적인 풍경을 통해 소소하게 살아가는 우리네의 일상에 주목한다. 바쁘게 살아가며 주위, 더 나아가서는 자신을 둘러보지 못해 마음이 사막처럼 팍팍해졌던 사람들에게 작가의 그림은 한적한 여유의 시간과 오아시스와도 같은 힐링의 정서를 동시에 전해준다.//CNB저널 김금영 기자//
– 장소 : 선화랑
– 일시 : 2017. 8. 30. – 9.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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