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미애(수성아트피아 전시기획팀 팀장, 미술학 박사)
서양화가 이팔용은 주로 자연의 아름다운 모습을 찾아 사실적으로 담아내는 풍경화
작가로 활동해 왔다. 그런 그의 작풍(作畵)에 변화가 온 것이다. 창작 기법에서 새로운 변화의 단초를 제공한‘ 돌(石)’ 때문이다.
그는 수년 전 야외 스케치를 다니다가 문득 지천으로 깔린‘ 돌’에 매료되었다고 했다. 길을 가면서 누구나 흔히 볼 수 있고 무심히 지나치게 마련인‘ 돌’의 아름다움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된 것이다. 도처에 나뒹구는 돌무지마다 색깔이나 형태, 질감 등 어느 하나 같은 것 없이 각각의 모양새를 갖추고 있었다.
“마치 사람의 얼굴이나 성격만큼이나 다양하다는 측면에서 인간군상의 참모습을 보는 것같은 느낌을 받았다”는 것이 작가 이팔용의 이야기다. 그는 오랜 세월의 풍상(風霜)을 견뎌온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돌’의 매끈하면서도 둥근 모습들을 보면 인간의 모진 삶의 과정을 느끼게 된다고 했다.
이후 그는‘ 돌’을 소재(素材)로 한 풍경화에 집착하게 되어 인간의 다양한 삶을 풀어내기 위한 과정으로 마치 사진으로 찍어낸 것처럼 극사실(極寫實) 화법으로 그려내었다. ‘돌’을 소재로 풍경을 함께 담아냄으로써 마치 풍경화와 같은 느낌의 작품을 선보이다가 최근에는 풍경은 아예 빼버리고‘ 돌’만 전면에 내세운 작품에 천착해오고 있다. 특히 두 개의‘ 돌’을 나란히 배치시킨 후 그 위에 또 다른‘ 돌’을 올려 삼각형의 구도를 보여주는 작품에는 서로 돕고 의지하려는 인간의 표징(表徵)을 드러내고 있다. 인생에 있어서 이러한 삶의 관계들이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절대요소이지만 한계적인 인생, 그 자체를 통해 더욱 풍요롭고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다는 작가의 깊은 신심(信心)을 은근히 보여 주려는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의 작품 소재인‘ 돌’이 지닌 상징성 가운데 대표적인 표징은 영원한 생명력이다‘. 돌’은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자연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조상들은 태곳적부터 ‘돌’이 그 어떤 자연물보다 신통력에서나 영험이 강력하다고 믿고 나름 어떤 목적의식에서 숭배의 대상으로 삼았다고 전한다. 선사시대 돌칼과 돌창이며 돌도끼로 나무를 베어내고 불을 지펴 농사를 짓고 풍작을 이루면 하늘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저마다 자연석을 가공해 기념물을 세웠다.
어디 그 뿐인가. 억겁의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전국 곳곳에 분포권을 형성하고 있는 고인돌(支石墓)이며 선돌(立石), 돌무지무덤(積石墓) 등은 자연의 여러 현상과 인류의 생사를 기원하는 샤머니즘적 숭배의 대상으로 남아 있지 않은가. 특히 고인돌에 구멍을 파서 새긴 북두칠성 등 각종 별자리는 아득한 태초 이래 인류가 죽어서도 불멸의 삶을 누리려는 욕망에서 낭만적인 안식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별빛 가득한 은하수의 밤하늘을 머리에 이고 영원히 잠든 망자의 안락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견고함과 강인함, 그리고 영원성을 상징하는 거석(巨石)문화는 모든 인류에게 환희와 두려움의 또 다른 존재로 신성하게 여겨져 왔다고 한다. 그래선지 예부터 인류에 의해 선택된‘ 돌’은 생명력을 갖게 된다는 전설처럼 고대인들은 생령(生靈)이 깃든‘ 돌’을 태양과 함께 신앙의 대상으로 삼기도 했다. 아니. 어쩌면 본디 생명력이 있는 ‘돌’을 인류가 선택하여 거기에 자신들의 심성(心性)을 거석문화로 발전시켰던 것이리라.
작가 이팔용은 그런 점에서 ‘돌’이 생명력을 지니고 스스로 움직인다고 여겨 작품
소재인‘ 돌’에 특정한 의미를 부여하면서 자신의 모습과 주변의 모든 사람들 이야기를 투사시켜 왔다. 따라서 그의 작품에서 지속적으로 강하게 드러나는 상징물은 결국‘ 돌’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화면 속에 덩그렇게 돌을 띄운다는 주제의식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이끌고 싶은 작가의 염원이 담겨 있다. 순수한 행복이 넘쳐나는 아름다운 세상, 즉‘ 돌’을 통해 현실의 이상향(유토피아)을 실현코자 하는 소망을 투영시키는 것이다.
‘돌’은 거석문화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손쉽게 찾아볼 수 있는 크고 작은 자연의 존재와 상징물이다. 때문에 동양문화권의 향수처럼 느껴지는 산수화를 논하면서 누구나 돌과 바위에 얽힌 생활철학을 손쉽게 접하기 마련이다. 그러기에 청록시인 조지훈은 일찍이 ‘돌의 미학’이라는 수필을 통해 이렇게 찬미했다.
〈 낙목한천(落木寒天)의 이끼 마른 수석의 묘경(妙境)을 모르고서는 동양의 진수를 얻을 수 없다. 옛 사람들이 마당귀에 작은 바위를 옮겨다 놓고 물을 주어 이끼를 앉히는 거라든가, 흰 화선지 위에 붓을 들어 아주 생략되고 추상된 기골이 늠연한 한 덩어리의 물체를 그려놓고 이름하여 석수도(石壽圖) 라고 좋아하던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흐뭇해진다.〉
시인은 또〈살아 있다는 한마디는 동양미의 가치기준이거니와 생명감의 무한한 파동이 바위보다 더한 것이 없다.〉고 했다.‘ 돌’의 미(美)는 영원한 생명의 미이기 때문이다. 태초에 꿈틀거리던 지심(地心)의 불길에서 맹렬한 폭음과 함께 튕겨 나온‘ 돌’은 겉이 비록 식고 굳어버렸지만 그 속은 아직도 사나운 의욕이 꿈틀대고 있을 것이라고… 처음 놓인 그 자리 그대로 인 상태에서 풍우상설(風雨霜雪)에 낡아가는 그 자세가 그지없이 높아 보인다고….
바로‘ 돌’에 비유한 인류의 서정성을 말한다. 서정성이란 인간 감성의 본원적(本源的) 정서라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 이팔용은 물질문화의 풍요로움으로 인해 무너진 인륜(人倫)을 깊이 성찰하고‘ 돌’을 통해 인간본성의 회복을 위한 미적 가치를 창조하는 출발점에 서 있는 것이리라.//이미애//
– 장소 : Gallery Ars’s
– 일시 : 2017. 5. 10. – 5.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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