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복수(丁卜洙)의 부산 시절> 전(展)
– 개별자(個別者)로부터 보편자(普遍者)를 지향하는 여정으로서의 회화 –
김 동 화 (金 東 華)
경기도 안성에서도 안쪽으로 한참을 들어가 있는 외진 작업실에서 거의 혼자 칩거하다시피 머무르고 있는 작가를 만나러 찾아간 것은 병신년(丙申年)의 마지막 날인 작년 12월 31일과 정유년(丁酉年)의 벽두를 하루 건너뛴 금년 1월 2일이었다. 두 번째의 방문길(1. 2)에는 미광화랑 김기봉(金基奉) 대표와 미술애호가 홍완의(洪完義) 씨가 더불어 동석했다. 이번에 미광화랑에서 열기로 한 정복수의 전시에 대한 서문을 부탁받은 때문이었다. 물론 이전이라고 해서 작가와 면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전시장에서 여러 차례 마주치기도 했었고, 몇 번은 식사 자리를 함께 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사실 작가를 알기 위해서 가장 좋은 것으로 작업실을 찾아가 보는 것 이상의 방법은 없다.
그는 말이 없는 사람이다. 그를 처음 만나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중간에 그와 끊어짐 없이 대화를 계속 진행하기가 어려울 수도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해 볼 정도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진짜로 무뚝뚝한 사람은 아니다. 속에 잠긴 많은 말들이 그저 겉으로 표현되지 않고 있을 뿐이지 술을 마셔 약간의 취기를 빌게 되면 간혹 유머러스한 엉뚱함이 묻어 나오기도 하는, 요샛말로 ‘귀요미’ 스타일도 언뜻 비치는 상당히 의외로운 구석이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실인즉슨 그의 표현은 말의 형태로가 아니라 작업의 형태로 나온다. 말할 내용이 많은 사람이 말을 하지 않으니 말을 대신하는 어떤 것 – 그림 – 이 많아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의 작업실에 쌓여 있는 전체 그림들의 수효는 상당했다. 소위 작업량이 확보되어 있는, 지속적으로 작업을 쉬지 않았던 작가라는 인상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구술화(口述化)된 언어의 사용을 도해화(圖解化)의 언어로 변용시키는 거의 체질적으로 화가인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정복수에게 있어 회화라는 매체는 언어의 변용이자 대치이며, 단지 침묵의 절대조형 그 자체에서만 그치고 있는 것으로 보기는 어려웠다. 그의 작업에서 끝내 형상성을 버릴 수 없었던 이유란 바로 여기에서 기인하는 것이겠다.
이번 전시가 작가의 부산 시절을 주로 다루게 된다고 하기에, 우선 작가가 보관하고 있는 초기 작업들을 살펴보게 되었다. 작가가 상경한 시점이 1976년 4월이라고 하니 벌써 부산을 떠나 서울에서 보낸 세월이 물경 40년을 훌쩍 넘어선 셈이다. 1955년 경남 의령에서 출생한 작가는 여덟 살이 되던 해인 1962년 고향을 떠나 부산진구 범천동으로 이사를 오면서부터 대략 14년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 – 감수성이 가장 풍부한 시절인 유년기 및 청소년기의 상당 기간 – 을 부산에서 보내게 된다.
1971년 – 17세 – 부터 시작되는 그의 부산 시절 초기 그림들이 작업실의 바닥과 여러 개의 작업파일 속에 고이 보관되고 있었는데, 초기작의 주종을 이루고 있는 화목(畵目)은 부산의 여러 장소들을 그린 풍경화, 자화상이나 여인상 등의 인물화, 그리고 화병과 꽃 등을 그린 정물화 등이었다. 작가는 고등학교 시절 거의 학교엘 나가지 않았다 하는데, 그렇다고 달리 그림을 배우기 위해 작가 아틀리에나 미술학원을 찾아다니는 등의 여하한 사숙(私塾)의 과정을 거의 거치지도 않았다 한다. 대신 그저 닥치는 대로 부산의 여기저기를 홀로 다니면서 그림을 그렸다는 것이다. 그의 말로는 새벽 3, 4시에라도 거리로 나가 이젤을 펼쳐 놓고선 소재가 될 만한 부산 일원의 풍경들을 그저 하염없이 사생한 적들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완전히 독학의 과정으로만, 어떤 선례나 범본이 될 만한 스승의 화풍도 참고하지 못한 채, 그냥 생짜배기로 그림을 익힌 셈이다.
작업실을 찾았던 첫 날(12. 31), 방 안에 놓여 있던 범일동 일대의 풍경을 그린 몇몇의 근작들을 보면서 필자는 그것들을 일련의 회고적 감상에서 유래하는 작의(作意) – 부산 시절 작가의 추억과 연관된 모티브들을 스스로 다시 재현해보려는 – 가 개입된 것으로 짐작해 보기도 했었다. 아무튼 과거 부산 시절의 작업들은 초기작 특유의 그리고 체계적으로 배우지 않은 그림에서 느낄 수 있는, 일종의 치기가 읽히는 그림이기도 했지만, 순수를 향한 더운 열기를 느끼게 하는 흥취도 동시에 풍겨나고 있었다. 그러나 거친 열정과 정제된 화면이 무리 없이 순조롭게 동행하기란 결단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 당시 추억의 초기작들로만 보아서는 이후 진행되어가는 정복수 특유의 작업 행보를 예단하거나 추측하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다. 당시의 그림에서, 특히 인물화에서는 어떤 표현파적인 격정과 데포르메이션을 주조로 하는 거친 기운이 강렬하게 발산되고 있으며, 풍경화에서는 1970년대 해양도시 부산의 모습이 작가의 눈에 투영된 황량함과 더불어 쓸쓸하게 묘사되고 있었다. 이는 그 즈음 자신의 형편이나 처지가 그림 속에 투사되어진 모종의 멜랑콜리(melancholy)나 센티멘털리즘(sentimentalism)을 읽어낼 수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고 혼자서 계속 그림을 그리는 일에만 몰두하다가 점차 가세가 몰락하면서 다니던 고등학교도 채 마치지를 못한 채, 그는 생활의 방편을 위한 아무런 대책도 없이 그냥 불현듯 상경(上京)해 버렸다고 한다.
처음에는 흑석동에 살고 있던 한 친구가 자기 방에서 자던 중에 연탄가스를 마시고 위중지경(危重地境)이 된 채 누나 집으로 옮겨가자, 그 친구 쪽에 양해를 구하고 연탄가스가 새는 그 위험한 단칸방에 들어가 한동안 거주를 해결했다고 한다. 그 이후엔 달리 마땅한 거처도 없이, 거의 거지나 다름없는 떠돌이 신세로 서울 여기저기를 표랑전전(漂浪輾轉)했다 하는데, 그럼에도 그는 이 고난의 시절을 당해서도 쉴 새 없이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무렵의 작업들을 보면서 우리는 구체적이고 특정한 개별 인물상들로부터 시작된 상경 초기의 작화 양상이 차츰 시간의 경과와 더불어 보편한 하나의 상징적 대상으로서의 인물로 조금씩 변형되어 나가고 있음을 특별히 주목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이 같은 개인상(個人像)으로부터 인간상(人間像)으로서의 변용과정은 대략 1977년부터 1979년까지의 약 3년간에 걸쳐 점진적으로 진행되어 나가고 있는데, 이 3년 정도 남짓한 시간들이야말로 그 이후 나타나게 되는 정복수 특유의 회화 구조와 독특한 타블로의 단초를 제공해 주게 되는 의미심장한 연찬(硏鑽)의 시기로 가늠해 볼 수 있겠다. 또한 이 시기의 그림들은 1970년대 초, 중반 부산 시절의 그림들과 이후 1980년대 그림들 사이의 연결고리를 보여주는, 작가로서 한 단계 성숙해 나가는 과정을 담고 있는 소중한 작업들이기도 하다. 특히 1979년경부터는 하나하나인 개별자로서의 인간적 속성들은 거의 완전히 탈각되어 버리면서 정형화된 보편의 인간상에 완벽하게 근접하는 변모의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후 1980년부터 1982년까지의 작업들에서는 이러한 특징들이 자기 체질에 완전히 녹아들어간 전문 작가의 면모가 드러나는 형상성으로 마침내 정리, 확립되어지기에 이른다.
사실 정복수 회화의 전형을 이루는 그 특유의 도상들을 거의 1980년대 전반기 무렵에 형성된 것으로 본다 해도 그것이 그렇게 사실과 어긋난 진술은 아닐 것이다. 유화 재료를 구하기 어려워 연필로 그린 당시 그림들에서는 예민하면서도 강력한 명암의 구사만 가지고서도 인물들의 기이한 분위기를 은연중에 증폭시키는 놀라운 회화적 공력이 여실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것들은 개별자로서의 인간들에 대한 오랜 탐색의 과정이 어떤 결정적인 변곡점을 통과하게 되면서 마침내 하나의 결정적 도상으로 압착되는 중대한 전환의 기로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 시기 이후로 작가는 단순한 대상의 외적 묘사의 수준을 넘어서는, 인간 존재의 내적 성찰을 위한 확고한 미술적 방편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1980년대 초기 작업에 등장하는, 가계도(家繼圖, pedigree)의 부분 부분으로 매어달린 인간들의 두상과 거친 연필 선으로 묘사된 인간들의 전신상 등은 이후 작업들에 비한다면 상당히 단순하고도 무표정한 양상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 시기의 작업이 보편자로서의 인간 탐구에 그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1980년대 중반기 이후의 작업들은 그 탐구의 양상에서 더욱 역동성을 띠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 화면의 역동성은 다양한 자세와 풍부한 표정들의 변주를 통해 실감나게 구현되고 있는데, 이는 인간 존재의 현상적 발현인 그들 감정과 행위의 표출과도 긴밀하게 연관된다. 특히 작가가 인간 존재의 핵심으로 읽어낸 본능의 측면을 표현해 내기 위한 회화적 방편의 하나로 인체 도상들에서 성기와 내장이 유별나게 강조되는 새로운 단초가 이 무렵부터 서서히 암시되고 있다. 1986년 한강미술관에서 열린 화가의 두 번째 개인전은 이 시기 화풍의 진행과 변화들의 양상을 조금씩 드러내어 보여주기 시작한다. 다시 1980년대 후반기 이후부터 1990년대로 접어들게 되면서, 작가는 풍부한 색채의 사용과 함께 희로애락의 인간 감정을 다양하면서도 더욱 명쾌하게 화면에 노출시키며 인간 본능을 표현하는 회화적 변주를 훨씬 더 다채롭게 구사하는 데에까지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1970년대 후반기에 시작된 암중모색(暗中摸索)의 과정이 10여 년의 변화의 터널을 통과하면서 어떻게 완벽한 자신의 타블로를 이끌어내고 있는지를 필자는 작업실에 보관된 그의 에스키스와 작품들을 직접 보면서 생생하게 확인해 낼 수 있었다.
정복수가 40년 가까이 천착해 온 대상은 ‘인간’이다. 과연 작가는 무엇을 통해 그 ‘인간’에 접근하려 했을까? 예술로서의 회화는 결국 그것이 형상 또는 비형상으로 드러나는 작가 개개의 개성적 시선에 의한 세계와 인간 탐구의 한 영역일 것인데, 그의 인간 탐구에 대한 방법론이란 한마디로 인간의 개별성과 특수성을 전면 소거하고 공통성과 보편성의 지점으로만 차츰차츰 접근해 나가려는 것이었다. 즉 개인들이 지닌 차별화된 고유성이 아닌, 종으로서의 인간 전체의 고유성에 주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모든 인간들은 그들이 인간으로서 다 함께 공유하고 있는 요소를 가지고 있기도 하고, 개개 인간들마다 서로 다른 차별화된 요소를 가지고 있기도 한데, 작가들 중 혹자는 각각의 인간들에게서 관찰되는 서로의 ‘다름’에 집중적으로 주목하기도 하지만 정복수의 경우 이와는 달리 작화에서 전체 인간 종족의 ‘같음’이 무엇인가를 주로 겨냥해 들어가고 있다. 북극해에 떠 있는 빙산 중에서 눈에 보이는 부분은 10% 미만에 지나지 않고 수면 아래 보이지 않는 부분이 전체의 90% 이상이라고 한다. 보이는 부분이 겉으로는 훨씬 두드러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보이지 않는, 그렇지만 기저에서 그 보이는 것을 보일 수 있도록 지탱하고 보지(保持)하는 부분이 실은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뜻이다. 또 모든 인간에게 있어서 전체 DNA 염기서열의 99% 이상은 공통적이라 한다. 단지 1% 미만의 사소하고도 미세한 차이가 인간들 서로간의 차별, 즉 개별성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즉 그는 빙산의 90% 이상, DNA 염기서열의 99% 이상에 해당하는 부분에 주로 관심을 두었던 셈이다.
나이와 성별, 외모와 지식, 재력과 지위 등을 이루는 그 모든 차이들을 전부 다 소거시킨 다음에도 끝까지 남아 있는 어떤 공통항들을 찾아내기 위해 그가 주목한 것은 신체 자체와 그 신체로부터 일어나는 본연한 생의 의지로서의 그리고 뭉클한 에너지 덩어리로서의 욕망의 문제였다. 중요한 것은 몸(body) 그 자체이지 몸의 한 부분인 뇌(brain)가 아니었다. 인간 탐구의 수단으로서 이성이 매개하는 인지의 과정이나 논리성의 문제를 다루기보다는 신체를 통한 감각과 야수성의 문제에 더 큰 관심을 부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양된 인간 정신이나 세련된 문명의 산물을 의도적으로 부정하고 이러한 것을 배제시킨 야만의 속성인 폭력과 침탈, 노출과 관능의 문을 열어젖힘으로서 인간의 밑바닥을 여지없이 드러내고야 말겠다는 작가의 표현 의지는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인간의 참 모습이 아니며 오직 모든 것을 헤집어 까발리고 나서도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모습만이 인간의 진면모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작가의 인간관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부정의 방법으로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조형적 장치로는 서로간의 공격성을 드러내기 위한 표범 가죽 모양의 피부와 서로를 노려보고 해치려는 성난 표정, 들끓는 욕망의 표상인 성기들의 과잉 노출, 그 야수적 육체의 욕망을 유지하기 위한 에너지원으로 사용되는 음식물들의 통로이자 소화와 배설의 기관인 내장의 구불구불한 형상 등이 쉴 새 없이 부각되고 있다. 이는 인간이 쓰고 있는 위선의 가면이 아닌 화장을 지워낸 있는 그대로의 맨 얼굴을 상징하면서 부인할 수 없는 인간의 이기적 욕망들 – 권력, 돈, 섹스 등 – 을 향하는 맹렬한 인간 본연의 몸서리쳐지는 수성(獸性)의 단면들을 꼼짝 못하게 고발하려는 도구로 기능하게 되는 것이다.
수도 없이 반복되는 얼굴이나 내장, 성기 등의 연쇄들은 영원히 하나로 통합될 수 없는 운명에 처해진 인간 본연의 분열상을 표지하고 있는데, 이러한 분열상은 인간 존재의 불합리함과 모순을 정면으로 겨냥해 들어가는 조형적 현시라 할 수 있으며, 마치 마네킹이나 인형을 연상케 하는 고정된 시선 또는 생동하는 표정의 상실은 인간성이 배제된 인간 존재의 가치에 대한 본원적 회의를 표현하는 한 방편으로 기능하고 있기도 하다. 또한 신체 각 부위의 연결들이 제멋대로인 양상들 – 예컨대 머리가 배에 붙어 있거나, 목에 눈들이 붙어 있거나, 수없이 많은 눈이나 성기들이 동시다발로 그려져 있거나, 장기가 복강 밖에 독립해 그려져 있거나 하는 등의 – 은 인간 존재의 괴이함과 예측 불가능성을 은유하는 하나의 기호 체계로서 읽히기도 한다. 그의 그림을 의사소통 수단으로서의 문자에 비유한다면, 그것은 식별이 용이한 있는 그대로의 형상 요소들이 상당 부분 깎여나감으로서 전서(篆書)나 예서(隸書)로부터 더욱 단순화된 해서(楷書)나 그것이 한층 더 유려해진 행서(行書) 또는 초서(草書)에 해당한다기보다는, 이를테면 오히려 전서 이전의 가장 원시적 언표인 갑골문자(甲骨文字)처럼 정교하게 다듬어지고 추상화되기 이전의 상형문자 혹은 그림문자의 양상으로서만 드러난다. 그림이 문자로 되는 프로세스를 세련한 추상화(抽象化)의 과정에 비유한다면 그의 그림은 추상화되기 이전의, 아귀나 축생, 아수라 같은 현세의 지옥을 그야말로 가장 냉혹하게 고발하는 최고 수준의 구상화(具象化)로서의 그림일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린 그림이라기보다는 마치 찍은 사진 같은 생생한 실제 그대로의 반영이라고나 할까? 아마도 그것은 욕망이 제도적으로 억압되기 이전의 들끓는 본능적 세계의 원형을 드러내려는 작가 자신의 참을 수 없는 욕망이기도 한 것이다. 바로 그것이 작가에게 어쩔 수 없이 가장 매력적으로 이끌리는 대상이자 세계가 아니었을까?
그의 그림은 골격근의 운동이 체성신경계(somatic nervous system)를 통해 감각-연합-운동의 3단계를 경유해 수의적(voluntary)으로 일어나는 과정과는 달리, 마치 인간의 의지나 의식과는 무관하게 내장 운동이나 성충동이 자율신경계(autonomic nervous system)를 통해 불수의적(involuntary)으로 발현되는 과정을 연상케도 하고 있다. 후자가 사랑하고 미워하는 그리고 삼키고 배설하는, 곧 몸으로 느끼는 문제와 더 가깝다면 전자는 이럴까 저럴까 따지고 궁리하는, 곧 머리로 생각하는 문제에 더 밀접하다. 전자가 두뇌의 활동에 좀 더 가깝다면 후자는 몸의 문제에 좀 더 밀접하다. 후자는 무언가를 매개해서 발현된다기보다는 매개 없이 즉발적으로 반응하는 쪽에 훨씬 더 가까운 것이다. 그가 강조하는 신체 부위인 내장이나 성기가 자유로운 의지의 발동보다는 불가항력적인 충동을 경유해 교감-부교감신경의 협응(協應)과 길항(拮抗)에 의해 움직여진다는 사실은 작가의 회화적 의지가 어디를 지향하고 있는지를 아주 잘 보여주는 일종의 신체-은유(body-metaphor)인 것이다. 이는 ‘허기심 실기복(虛其心 實其腹)’이라는 노자(老子)의 한 구절이 의미하는 바처럼, 생각하는 심(心)의 활용을 비우고 감응하는 복(腹)의 활동을 채우라는 뜻이기도 하다.
정복수의 초기 작업들을 보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또 다른 하나의 중요한 포인트는 부산 지역의 독특한 미술적 흐름으로 지금껏도 종종 회자되고 있는 ‘형상미술’과의 연계성이다. 1980년대부터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부산 미술의 흐름에서 가장 핵심적 반열에 놓여 있다고 평가되는 형상미술은 당대 서울 중심으로 펼쳐진 ‘민중미술’과 유사하면서도 결코 동일하지 않은 일련의 특징들을 내포하고 있다. 민중미술이 주로 이데올로기적이고 정치적인 색채를 강하게 띠고 있다는 측면에 더 큰 방점이 찍혀 있다면 형상미술은 현실비판 의식을 기저에 깔고 있으면서도 역동적인 필세와 격정적인 색채의 대비를 통해 화려한 도시 문명의 이면에 감추어진 인간 소외 혹은 비인간화의 현실, 그림자가 드리워진 시대와 사회의 암울함을 작가 개인의 섬세한 감수성의 결을 통해 제시해 들어가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형상미술은 정치적 비판의식 이상의, 훨씬 포괄적이면서도 광의적인 사회비판 의식이 직설보다는 은유로 투영되고 있는데, 이러한 형상미술의 전통은 1980년대 이후 사인화랑의 기획전들을 통해 그 양상이 차츰 뚜렷이 드러나게 되었고, 지금에 와서는 이 시절의 부산 미술을 대표하는 가장 중요한 흐름으로서 사적(史的) 평가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의 작가로서의 최초 전시는 아마도 부산의 현대화랑에서 열렸던 ‘안창홍 · 정복수 2인전(1976)’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데, 묘하게도 정복수와 안창홍(安昌鴻)의 초기 작업들은 상당히 유사한 소재취(素材趣)를 보여주고 있다. 격정적인 터치를 통해 생생한 감정을 드러내는 양상들, 그러나 이에도 불구하고 우울하고 미묘한 색조의 사용을 통해 이러한 감정들을 누르며 절제하는 양상들, 어떤 구체적 현실비판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사회의 구조 안에서 고통 받으며 신음하는 인간상들이 작가의 개성적인 감수성을 통해 표출되고 있는 양상들 등에 특별히 주목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작업의 흐름들은 1980년대 형상미술이 형성되어져 가는 시기의 하나의 맹아(萌芽)로서도 읽어볼 수 있는데, 이들의 작업은 참여적 요소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소위 ‘현실과 발언’이나 ‘임술년’ 또는 ‘두렁’과 같은 그룹들의 작업에서 나타났던 요소들과는 미묘하게 다른 스타일이나 개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형상미술의 전통은 1980년대 한강미술관을 통해서 전시를 했던 일군의 작가들의 작업 흐름들과 그 맥을 같이하고 있기도 하다.//김동화//
– 장소 : 미광화랑
– 일시 : 2017. 4. 20. – 5.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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