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미展(갤러리 마레)_20170315

연쇄적 의미작용의 세계, 김은미의 유토피아

홍경한(미술평론가)

“현실은 영원한 안정을 제공해주지 않기 때문에 안식을 얻기 위해서 실재하지 않는 환영의 공간을 만들어본다. 내가 실제로 갈 수 있는 곳은 아니지만, 지루한 현실반복의 탈출구라 생각하고 존재하지 않는 장소를 상상 속에서 표출해 내는 것. 이것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좋은’, ‘장소’-나만의 유토피아다.”(김은미 작가노트 중)

1. 김은미 작가의 작품은 현대인들의 삶에 주목한 채 ‘일탈’과 ‘여행’이라는 키워드 아래 현실과 이상을 넘나든다. 하지만 그 나침반으로 설정한 ‘일탈’이나 ‘여행’은 단순히 물리적 거푸집에 갇히지 않을 권리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 보단 자아가 낙점한 좌표를 따라 ‘나’라는 실존체가 유동적, 표상화 될 수 있는 권리를 뜻하며, 단순한 재현 이상의 미학적인 흐름까지 내포하고 있다는 데 중요성이 있다.

실제로 그의 여러 그림들은 영화 <델마와 루이스>(1991)처럼 능동적인 자아를 다양한 이유로 배척하는 현실과 맞닿아 있다. “This is just the first chance you′ve had to really express yourself.”라는 대사와 같은 용기도, “과연 우리는 자유로운가?”라는 질문도 동일하게 유효하다. 그리고 김은미에게 그 용기와 질문은 자신이 세운 ‘유토피아’를 건설하는 것으로 매듭지어 지거나 그 실행의 방식을 연구하는 것 자체로 귀결된다. 주체적 사유의 결과가 타블로(tableau)로 객체화되어 하나의 시각 지시체(referent)로 나타나곤 한다.
여기서 시각지시체의 배경은 실제의 삶에 있어 조화로운 질서가 상실될 때 드러나는 일반적 서사에 있다. 또한 그럼에도 현실에 대한 진리는 늘 그 유토피아가 실현될 수 없다는 부정적 형태가 감지될 때 나타난다는 이면성도 외면하긴 어렵다.
일례로 솜사탕마냥 터진 화산, 넓은 공간, 대비적인 컬러, 초현실적인 다양한 큐브들로 조합된 <몽글몽글 피어나는>이라는 제목의 작품은 하나의 현실성과 이상성이 만나는 지점, 모범적인 유토피아의 모습을 보여준다. 시각적으론 어느 알 수 없는 나라의 한 부분 같은 여운을 심어주며, 삶 속에서의 실천적 목표를 수용하지 못할 때 가능하다는 아이러니마저 동반한다. 재밌게도 이는 서술의 순간에서의 주체란 현실과 비현실 간 화해의 경험을 갖게 되지만, 그와 동시에 실제로는 화해가 불가능함을 시사한다.
<새벽풍경(daybreak)>, <Rolling-rollong>, <Dwarf village> 등, 그의 몇몇 작품들 역시 “현실과 비현실을 왕복하는 과정을 통해 두 가지 이면에 내재되어 있는 결핍과 욕구를 번갈아가며 채우는” 장면이라는 점에서 유효한 아이러니를 동반한다. 특히 “건물들의 조직과 비어있는 공간 사이에서 느낄 수 있는 리듬감은 화려하고 밝은 색과 함께 새로운 도시를 만났을 때의 감정”을 담아내고 있지만, 시공의 제약을 벗어난 존재에 대한 설정과 주관적 관념이 진하게 분포되어 있다는 건 다분히 미학적이다.

2. 김은미의 작품들은 일탈과 여행이라는 행위적, 언어적, 상상의 기호를 통해 존재에 대한 의미를 추구하고 은유적 형식을 지닌 환영적인 이미지로 치환한 의미작용(signification)의 연장이라 해도 부족함이 없다. 그것은 곧 불안한 안식, 여행에서 얻을 수 있는/ 얻은 직-간접적 경험(실행)의 문제이나, 실은 동적 실존의 문제이며 동시에 다층적 예술창작의 문제임을 가리킨다.
그가 꾸민 도시들은 비록 자신이 상상하는 공간이요, 인위적인 세계이지만 ‘우리’라는 포괄적인 대상을 전제로 할뿐만 아니라, 가벼운 장소의 옮김을 넘어 이 세상에 살아 있기에 가능한 실존성에 대한 포괄적 관심, 현실을 바탕으로 한 상상과 기억의 회로가 그리드(grid)처럼 직조되어 있음을 읽을 수 있도록 한다. 그리고 이 모든 조형요소들과 그것으로부터 빚어진 심리적 흔적들은 김은미의 작품을 이끄는 에너지가 되고 있음에 분명하다.
이는 그의 그림들이 있는 그대로를 모방(또는 재현)한 것이 아닌, 내면에서 재해석된 심상의 이미지이며, 여행지를 외시적인 것으로 보면서 내적 존재성을 담지한 공시적 관점을 인상적인 형과 색, 시간의 공간성 안에서 버무려 자신만의 신화적 층위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물론 일상성을 축으로 하는 김은미의 작품들은 어딘가 모를 친숙함과 낯설지 않음을 같은 눈높이에서 제공한다. 알지만 알지 못하는 세계이자, 존재하지 않으나 존재할 것만 같은 도시와 세계를 오밀조밀하게 표현해낸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그의 그림은 거대해진 도시에 의해 내몰려진 작고 힘없는 인간의 모습까지 상상하게 만든다. 정작 그림 속엔 등장하지도 않는 인간에 대한 존재의 문제를 출현시키고, 실존성을 되묻는 상황까지 제공한다. 즉, 누군가에게 그의 그림은 단순한 ‘여행’을 담은 이상향에 불과할 수도 있겠지만 이 평범한 일상이 예술이 되면서 실존적 의문과 대면하게 되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이 부분이야말로 김은미 작품이 지닌 가치라 해도 무리는 없다.
다만 본질적인 부분을 파고드는 통로의 너비가 넓지 않고(작가노트를 봐도 작가의 의도가 거기까지 미치는지 확인하기 어렵다) 공명(共鳴)의 여울이 효과적으로 일렁이지 않는다는 아쉬움은 있다. 상당히 초현실적인 구성이지만 궁극의 화두인 ‘인간의 욕구에 대한 해방’까지 이르기엔 넘어야할 산이 아직 많다.
이와 같은 결과는 공감의 부수적 실체가 두드러지지 못한 채 망막에 맺힌 잔상에 머물도록 하고 깊이 보다는 시각에 의존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겉이 아닌 내부로까지 관람자들을 이끌어야 하지만 회화의 물리적 제약에 멈춰버리게 만든다. 특히 이미 진행되어 완성된 형식은 새로운 형식의 침투를 꺼려하고 그것이 독창적인 분석을 내놓지 않는 한 형식의 반복 이상의 관심을 받기 힘들게 한다.
그런 점에서 작가는 어떤 작품에 드리워진 물리적 실제가 아닌 보이지 않는 ‘행간’이 타자에게 영향을 미친다면 새로움은 운명이라는 뜻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나아가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가 『기하학의 기원』에서 첫 기술한 이후 현대미술의 중요한 철학으로 인정받고 있는 차이와 연기, 즉 ‘차연’을 작가는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으나 이는 향후 그의 독창적 예술세계를 위한 반드시 숙지할 부분임에 틀림없다. 그것의 이해는 하나의 맥락(실천적이든 언어적이든, 혹은 그 전부가 동시 다발적이든)을 끊임없이 유예시켜 보편적 개념을 달리토록 하는 예술의 진정한 추진체일 수 있기 때문이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은미의 그림은 새로운 장소와 시간, 공간의 지층을 돌이키게 하며 무한한 상상의 창을 통해 일상 속 낯선 경험을 자극한다. 그의 작품을 대면하는 순간 우리네 마음 속 어딘가 숨어 있던, 혹은 저장된 기억이 재생되거나 재생된 기억이 현재를 반추하도록 만든다. 그런 점에서 적어도 그의 그림은 본래의 자기가 상실되어 있는 무자각적인 존재에서 벗어나 일탈과 여행을 통해 자각적 존재에 도달하려는 정신성을 보여준다.
특히 겉으로는 단순한 꿈의 도시, 유토피아로써의 무대인 듯 보이지만 인간과 사회, 현실과 이상, 실존과 사유 자로써의 인간, 의미적 삶에 당면한 거대하고 험난하며 거친 파도를 경험하는 인간의 보편성을 역설적으로 화사하게 담아 놓고 있다는 사실은 눈여겨볼 만하다. 그리고 이 부분은 꽤나 매력적이다.
한편 김은미의 그림들은 원색 계열의 밝고 따스한 색감, 하나하나 정성어린 붓 터치로 그려내는 과정 자체가 상당한 공을 필요로 한다.(사진보다는 직접 마주하는 게 그의 그림을 제대로 느낄 수 있음도 사실이다.) 그는 하루라는 시간의 대부분을 일상에 혹은 기억 속 언저리에 위치한 소소한 단상들을 꺼내는데 소진하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세밀한 플롯을 짜고 일일이 시퀀스를 짜 맞추는 과정에 열중한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연작들은 나를 타자로 전이시킨 세계 속에 놓이도록 하며, 여타 대상들과 교류하고 접촉하면서 마치 동화적인 세계에 빠져들 듯 상상의 장소로 이동시킨다. 그는 그렇게 일련의 프로세스와 사적 의미들을 거쳐 자신의 그림을 공적인 상응 속에 안착시킨다.
그러고 보면 작가는 독립적인 존재이면서 거대하고 복잡해진 사회 시스템이 구축한 수많은 관계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현대인들의 초상을 일탈과 여행이라는 명사 아래 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낯선 듯하지만 결코 낯설지 않은 현실에 ‘여행’을 접목하고 이를 다시 일상에서 같은 일을 되풀이하다 곧 소멸되는, 그러나 이내 재생되는 사회적 알고리즘과 일정한 형태나 양식 또는 유형, 일회적으로 소모되고 재구성되는 현대인들의 단면들을 서술하고 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이는 그의 그림이 시각적 귀납을 지나 철학적인 토대 아래 구축되고 있음을 일러준다.■

– 장소 : 갤러리 마레
– 일시 : 2017. 3. 15. – 4.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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