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 위로 미끄러지는 주체, 자아, 자기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평론)
가면무도회는 형형색색의 가면들의 전시장이다. 그 전시장에서 만나지는 가면들은 이중적이다. 자신을 실제보다 화려하게 꾸며 상대를 유혹하는 기술이며 장치이다. 그리고 정작 자신은 그렇게 꾸민 가면 뒤에 숨는 익명적 장치이다. 가면을 카니발과 연결시키는 바흐친에게서 가면은 그 익명성으로 인해 제도가 그어놓은 금들을 위반하는 혁명적 계기를 얻는다. 아마도 가면의 익명성이야말로 모든 계급적 규준이 지워지는 장소, 즉 반사회적이며 반제도적인 장소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람들은 가면을 씀으로써 자신이 이중적으로 분리되는 것을 경험하고, 진정한 주체와 익명적 주체로 분열되는 것을 경험한다. 그리고 이렇듯 분리되고 분열된 반쪽인 익명적 주체는 그 내부에 일탈의 계기를 내장하게 된다. 이처럼 가면은 반사회적이고 반제도적인 장소이며, 위반과 일탈과 혁명의 계기가 등록되는 장소가 된다.
그런가하면 가면들 중에서도 특히 눈가리개 가면이 단연 눈길을 끈다. 자신은 상대를 탐색하면서도 정작 상대는 자신을 볼 수 없도록 만든, 눈 주변을 가리고 장식한 가면이다. 뭔가 의미심장하게 와 닿지 않는가. 자신은 상대를 보면서도 정작 상대는 자신을 볼 수 없는 구조 혹은 기술적 장치가 미셀 푸코의 판옵티콘을 떠올리게 한다(비록 가면무도회에서 그 장치는 일방이 아닌 상호작용장치로서 작동하긴 하지만, 여하튼). 특히 푸코(감시)와 사르트르(주체를 시선과 응시의 투쟁관계로 푸는)에게서 본다는 것은 권력의 문제이며, 시선의 정치학의 형태를 띤다. 자신은 상대를 탐색하면서도 정작 상대는 자신을 볼 수 없는 가면이 유혹을 수행하고 권력을 매개하는 것(어느 정도는 유혹 자체가 이미 권력이다).
김민경의 작업은 이런 가면의 정치학과 관련이 깊다. 자기를 가장한다는 것의 수행적인 의미로부터 시작되고, 재차 자기를 위장한다는 것의 사회학적인 의미로 되돌려진다. 어쩌면 현대도시는 형형색색의 가면들의 전시장이며, 가면은 현대인의 초상일지도 모른다. 주지하다시피 가면의 어원은 페르소나에서 왔다. 사회적 주체 혹은 제도적 주체를 의미하며, 사실상 사회와 제도가 개별주체에게 요구해오는 역할 주체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 요구는 사회가 제도화될수록 더 강력해지고 절실해진다. 그 요구와 더불어 개별주체는 자신이 이중적으로 분리되고 다중적으로 분열되는 것을 경험하며, 그렇게 분열된 진정한 주체는 제도적 주체 뒤로 소외된다. 진정한 자기와의 불일치 내지는 비동일시를 내재화하게 되고, 그 내재화의 과정이 깊어지면서 마침내 제도적 주체 곧 페르소나 곧 가면과 자기를 동일시하기에 이른다.
작가는 이렇듯 역할주체에 맞춰진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는 순간 사회로부터 도태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내재화하고, 그렇게 내재화된 거세불안 탓에 오히려 더 가면을 강조하는, 그리고 종래에는 그 가면 뒤로 진정한 자기를 상실한 현대인의 초상을 주제화한다. 가면을 매개로 현대인의 정체성 문제를, 정체성 혼란과 상실의 문제를 건드리고 있는 것이며, 화려한 가장과 치장과 위장의 이면에 꼭 그만큼의 자기소외를 내재화한 현대인의 공허한 초상을 터치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이런 주제의식(가면 곧 페르소나 곧 위장된 자아)을 어떻게 구현하는가. 작가는 원래 조각을 전공했다. 그런 만큼 먼저 두상을 강조한 토르소 형태의 소녀상(어느 정도는 작가의 자소상이면서 우리 모두의 초상이기도 한)을 조각으로 만든다. 그리고 그 상을 대상으로 다양한 거리와 시점과 각도를 취해 사진으로 찍는다. 이 과정을 거쳐 하나의 똑같은 상으로부터 다양한 표정의 이미지들이 추출된다. 얼핏 어슷비슷해 보이지만 하나같이 다른 이미지들, 차이나는 이미지들, 하나의 모본으로부터 유래한 차이나고 다른 이미지들(사실은 다만 그렇게 보일 뿐인 이미지들)이 연출되는 것. 그리고 이렇게 연출된 사진들을 컴퓨터에 입력시켜 일정한 보정과정을 거친 연후에 최종적인 이미지를 얻는데, 파스텔 톤의 부드럽고 우호적이고 강렬한 느낌의 단색조 화면과 흑백의 모노톤으로 처리된 탓에 다소간 금욕적으로 보이는 인물이 대비되는 이미지들이다.
이렇게 조각을 사진으로 옮긴 평면 이미지가 완성되고 나면, 그 위에다가 저부조 형식의 입체조각을 제작해 중첩시킨다. 머리다발과 눈가리개 가면과 같은 가면들인데, 작가가 주제의식(위장된 자아)을 부각하고 강조하는 모티브들이다. 여기서 가면이 위장된 자아를 대리하는 모티브임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머리다발 역시 그러한데, 머리다발은 자신이 의도하는 모양으로 연출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신체의 부분에 속한다. 이를테면 사람들은 곧잘 상처를 입거나 마음을 다잡을 때 머리를 자른다(심리적 기호로서의 외장). 그래서 머리다발 모양을 보면 그 혹은 그녀의 기분을 알 수가 있다. 특히 여자들은 동서양 할 것 없이 올림머리를 덧대어 자신의 머리를 장식했던 전통을 간직하고 있다(장식적 도구로서의 외장). 그런가하면 지금도 유럽의 법관들은 법정에서 가발을 쓴다(권력의 기호로서의 외장). 또한 평범하지 않은 머리 모양이 하위문화의 스타일로, 문화적 코드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청년문화 특히 저항문화의 상징적 코드로서의 외장).
이 모든 사실은 머리다발 모양이 스타일과 관련되며, 사회문화적 기호로서 의미기능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작가는 바로 이 부분에 주목한다. 즉 헤어스타일이 타자에게 일종의 기호로서 읽혀진다는 것이며, 그 자체가 주체를 대리하는 일종의 제유법(부분이 전체를 상징하는)의 경우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사람들은 변신하고 싶을 때 머리 모양을 바꾼다. 형태를 바꾸고 색깔을 바꾼다. 이렇게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는 헤어스타일 자체는 또 다른 가면의 한 경우이기도 하다. 작가는 말하자면 얼굴 모양의 평면 이미지 위에 부착한 입체 형태의 머리다발과 가면을 통해서 마음 내키는 대로 붙였다 떼었다 할 수 있는, 마치 부속처럼 갈아 끼울 수 있는 외장과, 그 외장으로 대리되는 주체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로써 궁극적으론 마치 옷처럼 마음대로 갈아입을 수 있는 주체에 대해서, 이를테면 그때그때 주어진 상황과 전제, 문맥과 맥락 속에서 매번 달라지는 주체, 탈바꿈되어지는 자아, 결정적인 형식으로는 결코 붙잡을 수 없는 자기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지도 모를 일이다.
작가의 작업은 조각을 사진으로 옮기고, 여기에 저부조 형식을 도입해 재차 조각으로 환원된다. 그러나 그렇게 환원된 조각은 처음의 조각과는 다르다. 그렇다고 사진으로 부를 수도 없다. 사진과 조각의 경계를 넘나들고, 평면과 입체의 경계를 허문다. 그렇게 허물어진 경계 위에서 특히 이미지의 색채대비 효과가 두드러져 보인다. 이를테면 조각을 찍은 사진 이미지는 흑백 모노톤으로, 그리고 배경화면은 파스텔 톤의 부드럽고 우호적인 느낌의 여성적인 감수성이 느껴지는 배색으로, 또한 사진 위에 얹히는 머리가면은 광택 마감한 우레탄 도색으로 처리하는 등 이질적인 색감들을 하나의 층위에서 대비시키거나 유기적으로 어우러지게 한다. 다소간 심플하고 양식화된 부분들, 이를테면 배경화면과 머리가면장식에 비해, 흑백 모노톤으로 처리된 얼굴 부위가 금욕적이고 관념적이고 내면적인 인상을 준다. 그리고 모노톤과 함께 특히 텅 빈 눈이 이런 내면화의 경향성을 강조한다. 그렇게 텅 빈 눈이 겉보기에 화려한 외장이 과연 자기 정체성의 일부인지, 자기정체성의 진정한 부분일 수가 있는지, 혹 그렇지가 않다면 진정한 자기 정체성은 도대체 무엇일 수 있는지를 자기 내면에게 묻고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은 사람들을 외모(외장)로 판단한다. 천길 물속은 알아도 열길 사람의 마음속은 헤아릴 길이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외모에 기대고, 외모를 그 혹은 그녀와 동일시한다. 그렇게 주체는 외모로 축소된다. 주체는 오간데 없고 오로지 외모가 주체를 대신한다. 외모가 없으면 주체도 없다. 그런데 막상 외모가, 주체와 동일시했던 외모가 사실은 위장된 것이라면? 작가의 작업에 등장하는 소녀들은 굳이 머리장식이 아니더라도 흡사 마네킹 같고 가면 같다. 얼굴 자체가 가면인 사람들이 지나간다. 그리고 가면이 가면인지를 모르는 사람들이 스친다. 나는 누구인가.
– 장소 : 갤러리 아인
– 일시 : 2017. 3. 6. – 4.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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