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호展(갤러리 이듬)_20170303

가족(家族), 여전히 유효한 희망의 윤리

심상용 | 미술사학 박사, 동덕여자대학교 예술대학 교수

모든 윤리적 구성의 핵심은 ‘물신주의적 부인(fetishist disavowal)’이라는 제스처에 의존하고 있다는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의 지적은 상당부분 일리 있는 진술이다. 그는 냉전시대의 비극들, 예컨대 “소련의 상황이 끔찍한 것을 알지만, 난 여전히 소비에트 사회를 믿는다.” 같은 것을 상기시키면서 모든 윤리는 현실을 냉정한 판단기준으로 삼아야하는 기본명제마저 허물어뜨리는 맹목적인 부인, 곧 물신주의적 부인에 의존한다고 주장한다. 모든 윤리는 한계를 설정하고 어떤 종류의 고통은 묵인할 수밖에 없는 전제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더욱이 보편적인 윤리일수록 더더욱 그러한 맹목성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지젝은 더 나아가 ‘보편성을 명백하게 겉으로 내세우는 윤리’일수록, 더 근원적으로 물신주의적 부인의 형태를 띠면서 난폭하게 타자를 배제하고 있다는 ‘삐딱한’ 결론에 도달한다.

지젝이 광범위하게 적용하기를 원하는 이러한 윤리 담론의 범주에 ‘가족 윤리’ 가 전형적인 주제로 포함될 수 있다. 명시적인 형태의 폭력 자체뿐 아니라, 그 폭력에 대한 사회적 관용이나 묵과, 은폐에 가정이라는 보편윤리가 크게 작용한 것이 사실이고, 따라서 오늘날 가족윤리는 그 안에서 보호되어 온 폭력의 양상들과 함께 과거의 어느 때보다 냉엄한 비판의 도마에 올라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세태의 맥락에서 가족을 주제로 하는 최인호의 세계는 폭력에 대한 통상적인 무감각과 결부된 것으로 쉽게 간주될 수도 있을 듯하다. 그만큼 그의 세계를 지지하는 윤리담론은 앞서 언급한 시의적인 윤리담론과 명백하게 상충한다. <아버지 등에는>, <지키지 못하는 5형제>, <선물이 되어주세요 아버지>와 같은 작품들에서 알 수 있듯, 적어도 현재까지 최인호의 변함없는 주제는 가족이며 가족에 대한 사랑이다. <아버지 등에는>에서 아버지는 넓고 건장한 등으로 아마도 어린 시절의 작가인 듯해 보이는 아이를 안전하게 업고 있다. 아버지의 등 뒤로 전개되는 불꽃놀이와 알록달록한 식물로 가득한 놀이공원의 정경에는 아이의 행복한 심경이 반영되어 있다.
중요한 것은 최인호의 가정이 지엽적인 물신주의적 부인의 윤리를 훨씬 능가하고도 남을 만큼의 ‘사랑의 윤리’, 진정한 ‘희망의 윤리’는 여전히 유효하며 유일한 출처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가족을 그리면서 자연스럽게 가족을 생각하게 되고 나도 모르게 부모님에게 죄송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 그러면서 그 동안 잊고 지냈던 우리 가족의 희노애락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웃음이 나기도 하고 가슴이 꽉 조여지는 순간도 있고 눈에서 초점이 흐려지는 순간들도 있다. 이런 것들을 하나하나 표현해 나가면서 보편적인 가족들의 이야기도 함께 이야기 하게 된다.”

<아버지와 나 그리고 현주>에서 최인호는 아버지의 어깨에 앉혀 있다. 마치 롤프 뢰블란(Rolf Løvland)이 편곡한 ‘You raise me up’의 한 부분처럼, 그 어깨 위에서 그는 훨씬 더 그 자신일 수 있으며, 자신이 할 수 있는 것 이상의 것을 할 수 있게 된다. 아버지와 그는 불가분리의 관계다. 아버지로부터 나온 어떤 관이 어께 위의 아이에게 연결되어 있다. 아이들을 지탱하기 위해 아버지는 사이보그도 마다하지 않을 듯하다.
언젠가 지젝이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아들과 함께 컴퓨터 게임을 했던 경험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적어도 아직은 아버지가 사랑의 시선과 헌신적인 보호 안에서의 놀이경험을 제공하는 대체 불가능한 출처며, 어머니와 형제들이 함께 머무는 가정이 양육과 성장에 있어 대체불가능한 장소라는 사실, 그것이 최인호의 세계, 목판화와 페이퍼릴리프 기법을 이용한 저부조의 세계에 담지 된 윤리담론의 핵심이며 되새겨야 할 의미이기도 하다.//심상용//

//작가노트 – 최인호//

가족이란 단어를 들으면 많은 감정들이 떠오를 줄 알았다. 그리고 누구나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가족에 대한 명확한 감정들이 떠오르지 않았다. 너무 많기 때문일까? 아니면 내가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건가? 전자 인 것 같다…
그래서 최인호네 가족을 그리기 시작했다. 가족을 그리면서 자연스럽게 가족을 생각하게 되고 나도 모르게 부모님에게 죄송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무엇이 죄송하다 할 것 없이 그냥 죄송했다. 가족이란 단어를 들으면 느껴지는 것처럼 말이다.
텔레비전, 라디오, 신문 아니면 일상의 소소한 대화들 속에서도 가족이란 공동체는 수시로 등장한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항상 옆에 있어서 고마운 것도 모르고 지나치게 되는 것 같다. 기념일에 자신의 애인보다 부모님께 더 좋은 선물을 하는 사람이 많을지 궁금하다. 나는 지금까지는 그러지 못했기 때문이다. 부모님의 도움으로 그림을 배울 수가 있었다. 그러면서도 부모님이기 때문에 당연히 나는 받는 입장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부모라는 역할은 자식이 없으면 생길 수 없는 역할이다. 그 역할 때문에 부모로서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많았을 것이다. 나는 지금부터라도 부모님이 포기한 것들을 조금씩 채워 드리고 싶다. 물론 부모님의 젊은 시절의 꿈이나 자식으로 인해 포기한 것들을 채워 드리지는 못할 수 도 있지만 부모로서 자식에게 바라는 것, 생각하시는 부분에 대해서는 채워드릴 자신이 있다. 그것의 시작으로 나는 우리 가족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동안 잊고 지냈던 우리 가족의 희노애락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웃음이 나기도 하고 가슴이 꽉 조여지는 순간도 있고 눈에서 초점이 흐려지는 순간들도 있다. 이런 것들을 하나하나 표현해 나가면서 보편적인 가족들의 이야기도 함께 이야기 하게 된다.
누군가 이야기 했다. 닭을 잃어버려 오면 오리발을 보여주고 오리를 잃어버려 오면 닭발을 내밀고 둘 다 잃어 버렸다고 하면 꿩의 발을 내미는 것이 우리 사회라고 그 안에서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것의 가장 원초적인 부분은 바로 가족이라는 공동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가족을 그릴 것이다. 그래야 내가 힘들고 지쳐도 계속해서 그림을 그릴 수 있기 때문이다.//작가노트//

– 장소 : 갤러리 이듬
– 일시 : 2017. 3. 3. – 3.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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