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화살처럼 살고 싶다.”
류병학
서울특별시 송파구 가락동에 위치한 윤상렬의 작업실 벽면에는 흥미롭게도 작품 대신 화살과 작은 액자가 하나가 걸려있다. 그 액자 안에는 검은 바탕에 부분 불에 탄 빨강 종이가 부착되어 있다. 그 불에 탄 빨강 종이에는 “나는 화살처럼 살고 싶다”는 문장이 손 글씨로 반복해서 쓰여 져 있다.
나는 화살처럼 살고 싶다? 도대체 이 문장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사람들은 흔히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 혹은 ‘나는 평생 여행하며 살고 싶다’고 말한다. 그런데 윤상렬은 “나는 화살처럼 살고 싶다”고 말한다. 문득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이끌어 온 기업 경영으로 말하는 “결단은 칼처럼, 행동은 화살처럼”이 떠오른다. 그것은 ‘결정은 단호하게, 행동은 신속하게’라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윤상렬의 “나는 화살처럼 살고 싶다”는 ‘신속함’보다 ‘정확함’에 방점을 두는 것 같다.
그 점은 그의 작품을 보면 한방에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그의 작품은 마치 일말의 실수도 허용치 않는 완벽주의자의 결과물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윤상렬의 “나는 화살처럼 살고 싶다”는 ‘나는 정확하게 살고 싶다’를 뜻하는 것이란 말인가?
아니다! 윤상렬은 “나는 화살처럼 살고 싶다”를 “흔들리지 않고 싶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는 무엇으로부터 흔들리고 싶지 않고 싶다는 것일까? 일단 ‘나는 화살처럼 살고 싶다’는 윤상렬의 태도(attitude)를 뜻한다. 그리고 그의 태도는 다름 아닌 아티스트로서의 태도를 의미할 것이다. 따라서 그는 아티스트로서 태도를 지키겠다는 것을 뜻하는 셈이다.
그렇다면 아티스트 윤상렬의 태도는 무엇일까? 작업에 임하는데 있어서 어떤 것으로부터도 흔들리지 않겠다는 ‘자신과의 약속’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면 그가 유지하고자 하는 태도는 무엇일까? 그의 “화살처럼 살고 싶다”는 진술은 일종의 ‘삶의 태도’를 암시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면 그의 ‘삶’의 태도가 다름 아닌 ‘아티스트’ 태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이를테면 그의 삶과 작업이 다르지 않다고 말이다.
따라서 필자는 앞으로 윤상렬의 작품을 읽기위해 무엇보다 그의 삶에 주목할 생각이다. 왜냐하면 그의 작품은 바로 (삶/아티스트) 태도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의 태도는 다름 아닌 그의 작품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의 구체적인 작품에서 그의 태도를 읽을 수 있지 않을까? 따라서 필자는 그의 구체적인 작품들을 통해 그의 태도를 추적하고자 한다.
진실처럼 보이는 거짓된 징표(False Evidence Appearing Real)
윤상렬은 1996년 경원대 미대 회화과를 졸업한다. 그런데 그의 전시회 이력을 보면 2007년 ‘두려움(Fear)’이라는 타이틀로 갤러리2에서 첫 개인전과 비트폼 갤러리(Bitforms Gallery)에서 기획한 그룹전 ‘믹스 앤드 매치(Mixed & Matched)에 참여한다. 와이? 왜 그는 졸업 후 10년이 넘는 공백 기간을 가지게 된 것일까? 그는 그 기간에 무엇을 한 것일까? 윤상렬의 답변이다.
“저는 미대 졸업 후 1997년 환경조각과 무대디자인에 관심이 있는 상태에서 일단 뉴욕으로 유학을 떠났고 2년 가까운 기간 동안 인상 깊은 경험(다양한 인간관계, 잡다한 일들)들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귀국 후 2000년부터 2001년 중반까지 부직포 원단공장을 운영하며 기계관리, 생산 일들을 하였습니다. 2002년 중반까지 ㈜화우테크에서 주로 광고간판용 조명들로 지하철이나 백화점/건물 옥내 등 다양한 형태의 조명들을 제작하였습니다. 2003년까지 ㈜바루디자인에서 공간 맞춤형가구(MD+원목)를 주로 모던스타일한 가구를 디자인하여 제작하였습니다. 이후 우연히 소개받은 CF감독을 만나 어울리다 조감독 제안을 받고 아이디어기획/CF세트제작과 홈쇼핑 관련 무대세트, 소품제작(철재, 목재) 일들을 하였습니다.”
윤상렬은 회화에서 조각과 무대디자인으로 그리고 섬유와 조명 그리고 가구와 광고 분야로 경험의 폭을 넓힌 후 다시 회화로 돌아왔다. 따라서 그는 본업(미술)을 떠나 다른 분야의 일에 손을 대었다는 점에서 ‘외도(外道)’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의 외도는 외도 이후의 작업에 녹아져 있다는 점에서 외도가 아닌 셈이다.
2007년 갤러리2에서 열린 윤상렬의 ‘두려움’ 시리즈는 다름 아닌 ㈜화우테크에서 경험한 조명(CCFL/LED)이 녹아져 있다. 그리고 그의 ‘두려움’ 시리즈에 사용된 조명판(light panel) 위에 컴퓨터로 계산하여 3D로 긁어낸 선들과 다양한 샤프심들(0.3, 0.5, 0.7, 0.9, 2.0, 3.0mm)은 ㈜바루디자인에서 경험한 가구디자인의 흔적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윤상렬이 말하는 ‘두려움’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그의 답변이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 자연스레 갖고 살아가게 된 꿈(예술가)의 진로 결정 대한 두려움, 꿈의 과정을 미리 예측하는데서 오는 두려움, 정체성에 대한 두려움 등 잡다합니다. 사건까지는 아니지만 실험을 즐기다 자주 다쳐 (칼에 베거나 예리한 것들에 찔리고) 정신이 번쩍 났던 날 선 예민한 기분, 그 뒤 번뜩이는 섬광처럼 찾아오는 상상력에 대한 기억들입니다.”
물론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나 꿈(예술가)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정체성에 대한 두려움은 윤상렬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아티스트들도 느끼는 두려움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실험하다가 칼에 베거나 예리한 것들에 찔려 정신이 번쩍 났던 날 선 예민한 기분, 그 뒤 번뜩이는 섬광처럼 찾아오는 상상력에 대한 그의 기억들은 색다르다.
윤상렬의 작품들은 흥미롭게도 후자의 두려움과 문맥을 이루는 것처럼 보인다. 이를테면 그의 작품들에서 등장하는 샤프심들이나 컴퓨터로 계산하여 3D로 긁어낸 선들은 예리하다고 말이다. 그런데 그는 2009년 스페이스 홀 앤 코너(Space Hole and Corner)에서 개최한 개인전 <진실처럼 보이는 거짓된 징표>에서 다음과 같은 작업일지를 제공했다.
“’두려움(fear)’에 숨겨진 의미는 ‘진실처럼 보이는 거짓된 징표(False Evidence Appearing Real)‘라 말할 수 있다. 진실이라고 믿고 다가간 순간 결정적 의문으로 다가오는 새로운 의구심들, 그것은 내 자신의 성찰 안에서 진실과 거짓의 논란에 다시 휩싸이곤 한다. 때론 진실이라 결정내린 이전의 것들에 대한 의심도 불러일으키곤 한다. 진실은 형상화하기도 구체화하기도 힘든 어쩌면 불가항력의 허상일지도 모른다. 진실이라고 믿어온 많은 것들이 거짓일지도, 거짓이라고 외면한 많은 것들이 진실일지도 모른다.”
윤상렬의 작품들은 흥미롭게도 마치 진실/거짓 논란처럼 미세한 선들의 변주와 여러 층의 레이어로 ‘시각적 착각(optical illusion)’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일종의 ‘옵아트(Op art)’로 간주된다. 윤상렬은 2009년까지 제작한 작품들을 ‘옵티컬(Optical)’ 시리즈로 명명한다. ‘옵티컬 쉐도우(Optical shadow)’와 ‘옵티컬 리크비더(Optical liquide)’ 그리고 ‘옵티컬 에비던스(Optical Evidence)’가 그것이다.
2010년 갤러리 소소(gallery SOSO)에서 열린 윤상렬의 개인전 <선율의 환영>에는 그동안 화면에 붙여졌던 샤프심들이 제거되었다. 물론 그는 회면에서 샤프심을 제거했지만 샤프심 자체를 완전히 제거한 것은 아니다. 그는 화면(종이)에 다양한 굵기의 샤프심들로 사람의 손으로 표현하기 힘든 세밀한 선들인 0.3mm부터 0.9mm 사이의 직선들을 긋는다/그린다. 물론 그 직선들은 수평선이나 수직선이다. 그리고 그는 사람의 손으로 거의 표현 불가능한 오랜 기간 검증하여 축적된 세밀한 선들을 다양한 굵기의 직선들로 필름에 디지털 프린트로 출력한다. 그렇게 중첩시킨 작품에 마치 유리 액자처럼 유리를 끼운 박스의 형태로 만든다. 그것이 ‘침묵’ 시리즈이다.
머시라? 작가가 종이 위에 직선들을 어떻게 긋는지/그리는지 궁금하다고요? 혹 작가는 자를 사용하여 직선들을 긋는/그리는 것 아니냐고요? 당근이다. 그는 그가 특별히 제작한 제도판에서 작업한다. 따라서 그의 작업실은 마치 건축가의 설계실처럼 보인다. 물론 요즘 설계실에는 제도판이 컴에 들어가 있지만 말이다.
침묵의 소리(Sound of silence)
필자는 윤상렬 작업실에서 갤러리 데이트(gallery DATE) 개인전에 출품될 신작 ‘침묵(Silence)’ 시리즈를 본다. 그의 ‘침묵’ 시리즈는 선들로만 이루어진 작품이다. 그것도 직선들로 만이다. 그 직선들은 두 가지로 구분된다. 수직선과 수평선이 그것이다. 이를테면 그의 ‘침묵’ 시리즈는 수직선들만 혹은 수평선들로만 이루어진 작품이라고 말이다. 이것이 그의 ‘침묵’ 시리즈의 팩트(fact)이다.
자, 그럼 그 팩트를 체크 해보자. 필자는 팩트 체크(fact check)를 위해 일단 구체적인 사례로 윤상렬의 <침묵(Silence)>(2016)을 들어보겠다. 그것은 직사각형의 화면에 수직선들로만 이루어진 작품이다. 그런데 그 수직선들은 각기 다르다. 말하자면 그 수직선들의 두께와 농담(濃淡) 그리고 강약 또한 컬러도 다르다고 말이다. 따라서 우리가 그 각기 다른 수직선들로 이루어진 작품을 보면 깊이감을 느끼게 된다.
두말할 것도 없이 그 수직선들은 평면(종이)에 그려진/그어진 직선들이다. 물론 그 직선들은 각기 다르다. 왜냐하면 윤상렬은 두께가 다양한 샤프심들(0.3, 0.5, 0.7, 0.9, 2.0, 3.0mm 그리고 다국적 샤프심)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물론 윤상렬의 <침묵>에는 종이 위의 선들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그렇다! 그는 구작 ‘침묵’ 시리즈에서 도저히 손으로 그을/그릴 수 없는 미세한 선긋기를 컴퓨터로 그은/그린 선들을 필름에 디지털 프린팅으로 출력했었다. 그런데 그는 신작 ‘침묵’ 시리즈에서 손으로 그을/그릴 수 없는 미세한 선들을 필름이 아니라 아크릴 판에 디지털 프린팅을 다른 방식(음각/양각)으로 출력해 놓았다. 더욱이 신작은 한 가지 층, 즉 종이와 아크릴 판 사이에 삽입되었던 필름이 제거됨으로써 구작보다 좀 더 강하면서도 투명함 속 빛이 느껴진다.
이러한 팩트 체크는 윤상렬의 <침묵>이 아날로그 선들과 디지털 선들로 ‘절충’되어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러나 우리의 눈으로 그들의 차이를 발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두말할 것도 없이 눈으로 확인할 수 없다고 해서 그들 사이에 차이가 없다고 단정내릴 수도 없다. 여기까지가 필자가 할 수 있는 팩트 체크였다. 그런데 작품은 팩트 체크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작품은 늘 눈에 보이는 팩트를 넘어서기 때문이다. 자, 이제 작가의 진술을 들어보자,
“여기서 주목할 점은 적어도 저의 작업 과정에서만은 디지털이 아날로그보다 편하다는 일반적 관념과 정반대라는 것입니다, 8년 시간이 흐르며 전 24군데 업체들과 테스트와 제작을 반복해오고 있습니다. 업체들의 대부분은 고정관념 때문에 제가 제한한 방식을 무시하거나 처음 접하고 오히려 새롭게 느끼기도 하죠. 한마디로 힘든 반복들이었습니다. 예전엔 투명성이 정서상 애정이 많이 갔으나, 현재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점의 변화와 시간이 흐르면서 기술적 변화도 감지되고 있습니다. 필름의 구성은 아주 복잡 다양합니다. 물론 아주 미세한 차이감이 저의 마음에 들게 하기위해 오랜 시간 테스트를 거쳤고 시도하였습니다. 이번 선의 특징은 미세한 입체감이 더해집니다. 물론 그 위 유리가 덮이니 늘 그랬듯 설명 없이는 일반인들은 감지하기기 어려울 겁니다.”
만약 필자가 윤상렬의 진술만 들었다면, 그의 작품은 ‘옵아트’ 보다 ‘실제 재료, 실제 공간’이라는 슬러건(slogan)을 내건 ‘구체미술(Concrete art)’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를테면 환영을 배제하고 작품 자체와 그 작품의 구성 요소가 가상의 성질이 없이 있는 그대로 제시되는 구체미술(Konkrete Kunst) 말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윤상렬의 작품에는 외적대상(Gegenstand)이 없다. 그것은 오직 자신만을 지시할 뿐이고 단지 스스로를 드러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자는 그의 작품에서 ‘시각적 착각’을 경험한다. 그런데 필자는 그의 작품에서 소리를 듣는다. 그것도 울부짖는 아우성을 말이다. 물론 작품에 사운드가 설치되어 있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수직선들과 수평선들로 이루어진 작품들을 보면서 느껴지는 일종의 ‘환청(Auditory hallucinations)’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환청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필자는 다양한 두께와 농담(濃淡) 그리고 강약 또한 컬러들로 이루어진 수직선들을 보면서 소리를 듣는 것으로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소리는 귀(청각)로 듣는 소리가 아니라 눈(시각)으로 듣는 소리라는 점에서 일종의 ‘눈먼-소리(Blind-Sound)’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윤상렬이 자신의 작품을 ‘침묵’으로 명명한 것은 다름 아닌 ‘침묵의 소리(Sound of silence)’를 뜻하는 것이 아닐까?
검은 빛
존 케이지(John Cage)의 <4’33”>은 4분33초 동안 단지 피아니스트가 피아노에 앉아 있기만 한 것이다. 피아니스트는 피아노를 연주하지 않지만 청중들은 기침소리나 삐꺽이는 의자 소리 자신들의 미세한 움직임이 내는 소리 등을 듣게 된다. 청중들이 음악의 소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흔히 ‘소음’으로 간주되었던 것이 <4’33”>에서는 하나의 음악이 된 셈이다.
필자는 윤상렬의 <침묵(Silence)>을 보면서 다음과 같은 상상을 한다. 윤상렬은 생각이 많은 밤 작업실에서 텅 빈 화면(종이)를 본다. 그는 그가 아직 아무런 행위도 하지 않은 그 텅 빈 화면에서 아우성을 듣는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아우성’이 화면 밖의 ‘소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정말 텅 빈 화면에서 들리는 아우성, 즉 ‘환청’이다. 그는 화면에서 들리는 아우성을 잠재우기위해 화면에 수직선들을 긋는다/그린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윤상렬이 아우성을 잠재우려고 수직선 긋기/그리기를 반복하면 할수록 화면에서 울부짖음이 더 크게 ‘울린다’는 점이다. 물론 그 울부짖음은 작가가 아닌 관객에게 ‘들리는’ 소리이다. 필자는 윤상렬에게 “당신의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아우성이 들리는 것 같다”고 말했더니, 윤상렬은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전 저의 작업을 보면 너무나 평온함을 느끼고 혼자 웃습니다”고 답변한다. 그렇다면 이 아이러니는 ‘극적 아이러니(dramatic irony)’가 아닌가?
“첫째, 미술은 범세계적이다.
둘째, 미술작품은 제작되기 전에 예술가의 정신에 의해 완전히 인식되고 형성되어야 하며, 자연의 형식적인 특성이나 인간의 관능성 혹은 감상성이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서정주의, 연극성, 상징주의 등을 배제하고자 한다.
셋째, 회화는 완전히 순수한 조형 요소, 즉 면과 색채로만 구성되어야 한다. 회화적 요소는 ‘그 자체’ 이외에는 어떠한 의미도 가지지 않기 때문에 회화도 ‘그 자체’ 이외의 다른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넷째, 회화의 요소뿐만 아니라 구성도 간결하고 시각적으로 조절될 수 있어야 한다.
다섯째, 기법은 기계적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 정확하고 반(反)인상주의적이어야 한다.
여섯째, 절대적인 명확성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위 여섯 가지 사항들은 언 듯 윤상렬의 작품과 문맥을 이루는 것처럼 읽힌다. 그런데 위 여섯 가지 사항들은 ‘구체회화의 원칙들(BASIS OF CONCRETE PAINTING)’이다. 윤상렬의 작품 과정은 흥미롭게도 구체회화의 원칙들에 적용될 수 있겠지만, 그의 작품 자체는 구체회화의 원칙들을 해체시킨다는 점이다. 그러니 아이러니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윤상렬이 텅 빈 화면에서 들리는 환청을 잠재우기위해 매번 새로운 수직선들을 그을/그릴 때마다 틈새들이 발생한다. 그런데 그가 차이의 선 긋기/그리기를 반복하면 할수록 틈새들은 더욱 좁혀지면서 뜻하지 않는 빛이 배어나온다. 더군다나 그가 아날로그 수직선들에 디지털 수직선들로 층을 올려놓으면 그 빛은 마치 숨을 쉬는 듯한 ‘빛의 결’들로 나타난다. 그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요즈음은 선 안에서 빛을 상상합니다. 검은 빛이랄까요!”
혹 윤상렬이 말하는 ‘검은 빛’은 일종의 ‘대체 빛’이 아닐까? 대체 빛? 그것은 ‘검은 빛’의 반대인 ‘밝은 빛’을 뜻한다. 이를테면 그가 (수직)선 안에서 상상한 빛이 다름아닌 수직선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바탕 빛’이라고 말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바탕 빛’은 수직선들이 그어지지 않은 ‘여백’을 뜻한다. 그런데 윤상렬이 말하는 ‘검은 빛’은 대체 빛이 아니다. 그는 수없이 반복하여 그어진/그려진 수직선들에서 나오는 ‘검은 빛’을 말하고 있다. 문득 김현승의 시(詩) ‘검은 빛’이 떠오른다.
“노래하지 않고,
노래할 것을
더 생각하는 빛.“
김현승은 노래를 하지 않고도 노래할 것을 더 생각하는 빛을 ‘검은 빛’이라고 노래한다. 만약 김현승의 그 ‘시’를 ‘그림’에 비유한다면, 그리지 않고도 그리는 것을 더 생각하는 빛이 ‘검은 빛’이 되지 않을까? 그런데 김현승은 ‘검은 빛’을 마지막 연에서 다음과 같이 읊조린다.
“그러나 붉음보다도 더 붉고
아픔보다도 더 아픈,
빛을 넘어
빛에 닿은
단 하나의 빛.“
혹 윤상렬의 ‘검은 빛’은 검음보다도 더 검고, 검음을 넘어 검음에 닿는 단 하나의 빛이 아닐까? 그렇다면 ‘검은 빛’은 필자의 인식능력을 벗어난 불가사의한 것이 아닌가? 그렇다고 윤상렬의 ‘침묵’ 시리즈에 대한 필자의 읽음이 무의미한 것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필자는 그의 ‘침묵’에 대한 해석의 한계를 드러냄으로써 그 ‘침묵’의 위대함을 드러내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 ‘역설’이 윤상렬의 작품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두말할 것도 없이 그는 ‘침묵’을 결코 표현할 수 없다, 하지만 그는 표현할 수 없는 ‘침묵’을 표현하려는 한계를 드러냄으로써, 관객이 ‘침묵’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한다. 그렇다면 ‘완벽한 침묵’은 일종의 ‘죽음’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물론 여기서 말하는 ‘죽음’은 ‘개념적인’ 죽음을 뜻한다. 따라서 현실에서의 침묵은 존 케이지의 ‘4분33초’처럼 ‘소음’을 잠재울 수 없다. 마치 화살처럼.
우리는 활시위를 벗어난 화살을 직선으로 날아가는 것으로 본다. 그런데 우리의 시각으로는 볼 수 없지만 날아가는 화살은 마치 물고기처럼 미소하게나마 ‘흔들린다’(라고 표기하기보다 차라리 ‘떨린다’라고 표기하는 것이 적절할 것 같다). 이를테면 앞으로 날아가는 화살은 좌우로도 매우 작께나마 진동을 한다고 말이다. 그런데 그 ‘떨림’이 바로 ‘삶(현실)’이 아닐까?
“나는 화살처럼 살고 싶다.” 그렇다! 윤상렬의 직선 역시 날아가는 화살처럼 진동한다. 물론 우리의 눈은 그 진동을 볼 수 없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윤상렬의 직선을 돋보기로 본다면, 그 직선에 울림이 있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렇다! 완벽한 직선은 개념적으로만 가능하다. 그렇다면 윤상렬이 그은/그린 직선은 ‘살아있는’ 직선이 아닌가? “나는 화살처럼 살고 싶다.”
– 장소 : 갤러리데이트
– 일시 : 2016. 8. 27 – 9. 26.
추PD의 아틀리에 / www.artv.kr / abc@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