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만용(미술평론가, 동서대 교수)
문이 열린다. 『조각-도(圖)』의 전시장이다. 6명의 조각과 드로잉이 있다. 기획의도는 조각가가 단지 “도(圖), 드로잉을 할 수 있다”가 아니라 드로잉(圖)과 조각이 만나 더 큰 의미가 있음을 보여주고 하는 것이다. 요즘 유행어로 바꾸면 융합효과를 보고자 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추구하는 도(圖)는 무엇인가? 사실 전시 기획에서 그림 도(圖)를 사용하고 있지만 내면적으로는 이치 혹은 길 도(道), 즉 노자의 도덕경의 “道可道非常道“ 즉 ‘도를 도라고 말하면 그것은 그러한 도가 아니다.’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닌가?, 이때 혼란 저 너머에 하나의 형상이 들어온다. Sapiens 즉 인간이다. 그렇다! 이들은 인간문제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자신의 세계로 출발하고 있다.
인간 존재에 대한 이분법적 탈피의 정희욱, 축출된 현실 속 십이지신적 인간상의 관계성 고찰의 나인주, 병리적 기표의 비틈과 매끄러움의 역설인 변대용의 미키마우스, 캐릭터의 이면에 차가움을 숨긴채 지켜만 보고 있는 한계상황의 리사이클링 부엉이의 정찬호, 가면과 괴기스러움 속에 역설적 나약함과 욕망을 담고 있는 종이 사슴의 임상규 그리고 형상과 색채의 역설적 결합에 의한 인지부조화적 인간 탐미의 김종구가 그들이다.
먼저 정희욱의 작품에는 인간 존재에 대한 기도하는 마음과 이분법적 사고에 대한 저항(?)이 보여진다. 기도함이란 통철을 하나 하나 깎아 만듬에서 볼 수 있으며 여기에 조명의 효과마저 끌어들여서 더 깊은 공간성을 자아내어 인간 존재의 경건함과 강인함을 배가시켜주고 있다. 특히 Sapiens라는 드로잉에서 정식 학명으로는 Homo가 있어야만 하는데 없다. 그래서 정희욱은 완전체로써 인간이 아닌 조금 부족하지만 올바른 인간다움을, 칼 도(刀)의 깎음으로써 당당히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인간을 표현한 것은 아닐까?
여기에 비하여 나인주의 인간은 십이지신의 인간상으로 생활공간 속 있다. 정희욱이 규정할 수 없는 공간마저 작품으로 끌어들여 의미를 확산한다면, 나인주의 인간은 건물과 건물 그 속에 있어 작다. 작다는 것은 거대한 억눌림이 있다는 것. 결국 나인주의 십이지신상의 인간은 불편한 현실적 관계성과 태생적 역할의 괴리적 현상을 담고 있다고 보여진다. 그래서 이중적이다. 현실생활 속에 있다는 점에서 구체적이지만 십이지신의 형상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초월적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축출된 공간을 벗어난 십이지신은 캐릭터가 되어 반성적 의미를 생산하기 보다는 하나의 기호로 소비되는 상황에 처해진다. 그러나 기호화된 십이지신의 캐릭터의 의미를 비튼다. 그 비틀음에서 나인주다움이 있다. 그리하여 나인주의 인간은 기호화된 의미를 넘어 나인주식 기표로 흐른다.
다음으로 변대용의 미키마우스와 백곰은 그 색상과 표면의 매끄러움으로 역설적 친근감을 주고 있다. 이 친근감은 디지털시대의 대표적인 미감으로 인식적 밀착성과 판단의 무저항성을 던져주어 관조적 거리를 상실하게 만든다고 한다. 관조적 거리의 상실은 캐릭터의 탈신비화를 던져주고 탈신비화는 핑크 등 생경스런 색으로 병리적 세상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특히 미키마우스의 눈은 초점을 잃고 있다. 그러면서도 각 손가락은 욕심많게도 기호를 갖고 있으면서 그 손들에 의해 죽음이 흐르고 있다. 그렇지만 변대용은 매끄러움 표면과 색채로 사용으로 인하여 비극적 병리적 의미라는 대상을 사고하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소비하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특징을 갖고 있다.
여기에 반하여 정찬호의 리사이클링 부엉이는 오히려 미적 관조의 거리를 지켜보고 있음을강조하고 있다. 특히 벽면에 설치된 선적 구조로써 부엉이는 정희욱의 작품과 유사하게 조명과 벽면의 특성마저 자신의 작품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그런데 리사이클링적 부품을 사용하여 만든 부엉이는 낯설음과 거칠음이 없다. 그것은 애초 마을미술에 출품할 작품으로 제작한 것이 전시가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정찬호의 부엉이는 변대용과는 달리, 캐릭터적 친근함 속에 차가움을 숨긴 채 지켜보고 있다. 그저 지켜만 보고 있다. 그러다보니 인간 삶에 대한 부정이든 긍정이든 간에 메시지적 성격보다는 지켜보고만 있는 어찌보면 ‘한계상황적 인식’이 보여지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괴기함과 숨김 그리고 인지부조화적 인간 탐미가 보여지는 이가 임상규와 김종구가 있다. 이들의 작품에서는 거부하기 힘든 괴기스러움이 있다. 특히 임상규의 종이 사슴은 바싹 마른 몸과 가면을 완전히 쓰지도 벗지도 못한 어정쩡한 상황의 연출이다. 이 어정쩡함은 내면의 욕망을 드러내고 싶기는 하는데 그러기에는 너무 약한 자신의 의지와 신체를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 그러나 괴기함 혹은 추는 역설적으로 아름다움으로 이끄는 원동력! 즉 타자성과 낯섦을 너머 주체 안을 들여다보게 하는 효과를 갖고 있다. 가면은 광대만 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
이렇게 숨김과 가면으로 인간의 나약한 의지(?)를 드러내려는 임상규에 비하여 대상적 정보 그 자체를 역설적 결합으로 인지부조화를 일으키는 사람이 김종구이다. 그래서 우리가 알고 있는 대상의 정보는 처절히 왜곡된다. 인간형상인데 얼굴은 뭉개져 있고 물고기인가 하면 그 위에 나무의 형상이 연결되어 있고 .. 그래서 그에게는 타인의 객관적 인식이란 없다. 타자의 기준은 의미 없다. 그저 긍정을 지향케하는 내면적 욕망이 있을 뿐이다. 작품이 갖어야할 도(道)에 대한 자신만의 해석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그의 억지스럽고 생경스러운 색상은 오히려 따뜻하다.
비록 이들이 인간의 문제를 존재론적으로 혹은 심리학적으로 캐릭터적으로 항변하고 있다고 하지만 이들의 도(圖)와 형상은 불친절하다. 왜냐하면 보이는 것이 보이는 것이 아니며 바라보는 것도 각기 다르며 각자 2% 그 무엇이 부족한 채 놓여져 있기 때문이다. 그 부족한 것을 보는 이가 채워 넣기를 바라는 사람이다. 그래서 불친절한 사람들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아름답다. 디지털시대에 획일화되어 가는 감성과 변화에 침묵을 요구하는 이 시대에 자기만의 언어로 그래도 세상에는 인간이 있고 적어도 인간이 어떠해야만 하는지에 대한 메타포가 있기 때문이다.
이제 문을 닫고 나오고자 한다. 그런데 임상규의 가면이 나를 붙잡는다. 너도 어울리지 않는 가면을 갖고 있는데 벗어 버리라고 말한다. 그래서 다시 전시장을 둘러본다. 이제 칼로 만든 도(刀)도 그림의 도(圖)도 사라지고 이제 그들은 각자의 를 갖고 있다. 음계로써 도는 출발이자 목표. 또 다시 도는 흐른다. 옥타브에 옥타브로 이행한다. 그리고 동시에 울린다. 더러는 불협화음으로 더러는 화음으로 … 그래서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
– 장소 : 유진화랑
– 일시 : 2016. 8. 17 – 8.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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