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흔적, 세월의 집적
오세권(미술평론가)
대부분 작가들의 작품에서는 자신이 살아왔던 삶의 부분들이 내재되어 있으며 구체적인 형상을 통하여 나타나기도 하고 추상적인 표현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는 작품 속에 작가의 삶에서 나타나는 시간과 흔적들이 알게 모르게 축적되어 표현되기 때문이다. 이미나의 작품세계에서도 그의 연륜과 작품 제작의 과정을 통하여 자신의 생활에서 나타나는 오래된 시간의 흔적과 세월의 연륜이 켜켜이 쌓여 있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이미나는 늦은 나이에 작품을 시작하였다. 아이들의 교육문제로 미국에서 생활하게 되면서 이국생활의 외로움을 이겨내고 자신의 존재를 찾기 위한 방법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시작한 그림은 점차 자신의 삶을 치유하는 동시에 작가의 길을 제시해 주었고 한국에 돌아와서는 더욱 열심히 작품을 제작하고 발표하는 작가가 되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유화를 그려오다가 근래 들어 아크릴 물감으로 재료를 바꾸어 사용하고 있다. 그것은 아무래도 빨리 마르기 때문에 작품의 제작 속도가 빠르고 유해성이 없는 물을 사용하여 물감을 융해시킬 수 있는 특성 때문이었다.
그동안 이미나의 작품세계를 보면 대체로 사물의 구체적인 형상이 드러나 있는 작품을 표현하기 보다는 색채나 선, 붓 자국 그리고 물감들의 질감 등이 중요하게 나타나는 추상화를 표현하였다. 그리고 어떤 작품에서는 자연의 모습을 단순화하여 표현하는 작품이 있는가 하면 또 다른 작품에서는 무채색으로 반복된 붓질과 얼룩을 통하여 질서 있는 화면을 구축하기도 한다. 여기서 이미나의 작품들은 한 가지 방법의 표현보다는 선과 색채, 붓자국, 얼룩 등이 조화된 다양한 변화의 표현방법을 볼 수 있다. 기법에 있어서도 오토마티즘 같이 붓질을 자유롭게 표현하기도 하고, 물감을 뿌리거나 나이프를 이용하기도 하며, 콜라주, 프로타주, 핑거페인팅 기법을 사용하는 등 여러 가지 표현기법을 이용하고 있다.
근래 들어서는 사물의 형상을 해체시켜 그 흔적들을 없애고 붓 자국만 나타내거나, 무채색을 바탕으로 질감을 두텁게 하는 화면을 표현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화면들은 무채색으로 화면이 균질화 되고 재료의 질감 느낌이 시각적으로 뚜렷하게 나타나는데 화면의 바탕에는 기존의 붓 자국 흔적들이 조용하게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때로는 서로 다른 시공간의 풍경이나 붓질의 표현들을 재구성하여 중층으로 구조화된 화면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근래 제작한 대표작품으로는 ‘타임’이 있다. 이 작품은 2014년 구상전 공모대전에서 우수상을 받은 작품인데 이미나가 제작해왔던 기존의 추상작품들과는 다소 다른 표현방법이지만 주제를 기존 작품들과 같이 ‘시간’으로 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는 모두 9개의 작은 화판을 재구성하여 하나의 큰 작품을 이루고 있는데 기존에 제작해왔던 추상 작품들과 작가 본인의 옆모습, 거리의 전화기 박스, 지하철 내의 풍경 등 구체적인 형상이 드러나는 화면들이 배열되어 재구성되어 있다. 모두 작가와 관련 있는 주변의 이미지들을 9개의 작은 화면으로 분할시켜 나타내었으며 이들을 모두 재구성하여 하나의 큰 화면을 만든 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이미나 자신의 일상적 삶의 시간들을 포착하여 이를 구체적 형상이 있는 화면과 추상화면으로 나타내고 배열하여 하나의 작품으로 제작한 것이 특징이다.
최근의 작품들은 흰색의 두터운 질감을 나타내는 작품으로 정리되어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작품들은 아크릴 물감과 젯소로 만들어진 흰색의 색료를 화면 위에 두텁게 칠하고 있다. 마치 미니멀리즘과 같은 화면을 형성하고 있는데 흰색의 두터운 화면에서는 붓질의 흔적들이 남아있다. 이에 따라 화면은 이전의 추상화로 표현된 작품 위에 흰색을 두텁게 칠한 것으로 보여 지기도 하는데 칠해진 흰색 사이로 밑바탕의 그림들이 비집고 나오거나 밑바탕 그림의 흔적들이 흰색의 틈사이로 드러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와 같은 표현에서 앞선 시간을 뒤따라오는 시간에 의해 밀려나고 새로운 환경으로 뒤덮이는 흔적들의 풍경을 그려내는 듯하다. 즉 지나가는 시간 위에 뒤를 따르는 시간들이 겹쳐지면서 새로운 흰색의 환경을 만들어 가는 것인데 과거 시간의 흔적은 흰색에 의해 덮어지고 지워져 가는 것처럼 보인다.
이상과 같은 이미나의 작품세계는 자신이 살아왔던 삶의 시간에서 나타나는 흔적들을 선과 색채 그리고 얼룩 등으로 쌓아 조화된 화면으로 만들어 나간다. 이때 붓질을 천천히 하는가 하면 격렬하게 붓질을 하기도 하고, 나이프를 사용하기도 하며, 물감을 뿌려 보기도 하면서 다양한 화면을 만들어 나간다. 그리고 어느 시간이 지난 후 켜켜이 쌓여진 시간과 세월의 흔적들이 만들어낸 화면 위에 흰색을 덮어 조용한 화면을 만들어 놓는다. 이제 흰색으로 처리되어 조용하게 정리된 화면에서는 색채와 붓질의 행위를 넘어서 삶의 시간과 세월의 흔적들이 쌓여 내재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오세권 평론//
– 장소 : 해오름갤러리
– 일시 : 2016. 3. 1 – 3. 15
추PD의 아틀리에 / www.artv.kr / abc@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