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디워홀展(시립미술관)_20151125

20세기 팝 아트의 대표적인 아이콘 ‘앤디 워홀’의 살아 숨쉬는 작품들이 2015년 11월 25일부터 부산일보 70주년 기념으로 부산시립미술관에서 생중계된다. 이번 전시는 미국 피츠버그 앤디워홀미술관의 소장작품을 대거 공개하는 자리이며, 국내 최초 공개 작품들을 포함하여 워홀의 시대별 다양한 작품들과 삶의 흔적들을 총 망라한 전시로 기획되었다.

이번 전시는 워홀의 유년시절을 보여주는 사진과 특유의 자화상 사진들부터 상업 디자이너로 활동한 뉴욕시절의 드로잉, 캠벨수프 시리즈를 포함한 팝 아티스트로서의 명성을 얻기 시작한 1960~70년대 실크스크린 작품들, 마릴린 먼로, 마오쩌둥, 마이클 잭슨, 무하마드 알리, 믹 재거 등 유명인사들의 초상화 40여 점, 그리고 워홀이 제작한 영화들, 타임캡슐이라는 일생의 기록물 190여 점까지 시각예술 전반에 혁명적인 변화를 주도한 앤디 워홀의 작품 약 400여 점을 공개한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는 카모플라주 자화상, 해골, 라파엘 마돈나-$6.99, 베를린 프리드리히 기념비 등 2미터가 넘는 대형 작품들과 30년 만에 발견된 디지털 작품들을 주목해 볼 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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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앤디 워홀의 생애(Andy Warhol’s Life)

앤디 워홀은 1928년 미국 펜실베니아주 피츠버그에서, 체코슬로바키아 이민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앤드류 워홀라. 1945년에 피츠버그의 카네기 공과대학에 입학해서 시각 디자인을 전공했고, 1949년에 대학 졸업 후 뉴욕으로 갔다. 뉴욕에서 『글래머』, 『하퍼스 바자』와 같은 패션 잡지의 일러스트레이터로 일하기 시작했고, 1955년부터 1958년까지 『뉴욕타임즈』에 아이 밀러 구두 회사의 광고를 매주 제작, 게재하는 등 이 분야에서 능력을 인정받게 되었다. 1957년에는 ‘앤디 워홀 회사’를 설립했다.

상업미술가로 활동하면서도 개인 작품 전시회를 꾸준히 개최했다. 1952년에 <트루먼 카포티의 글에 기초한 15개의 드로잉>, 1956년에 <황금 슬리퍼>전을 열었고, 1961년에 백화점 쇼윈도에 5점의 회화를 전시했다. 만화와 신문광고 이미지를 이용한 작품들이었다. 1962년에 사진에 기초한 실크스크린 기법을 개발해 LA에서 <32개의 캠벨 수프 캔> 전시를 열면서, 대량생산된 상품이라는 소재와 사진 전사 실크스크린 판화라는 자기만의 기법을 가진 팝 아티스트로의 이력을 시작하게 된다.

1964년에 ‘팩토리’라 불린 넓은 작업실을 열어 공장에서 물건을 생산하듯이 조수들을 이용해 작품을 대량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곳에서는 실험적인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고, 그가 매니저를 맡은 록밴드 벨벳 언더그라운드가 음악을 연주하기도 했다. 밤마다 파티가 열렸던 워홀의 팩토리는 곧 60년대 뉴욕의 문화를 대표하는 명소가 되었다. 그는 당대 대중의 생활을 가장 잘 반영하는 대상을 작품의 주제로 삼았다. 수프나 비누와 같은 상품, 엘비스 프레슬리나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같은 스타의 사진이 미술 작품이 되게 했다. 그는 시사에도 민감하게 반응했다. 뉴욕 박람회 기간에는 <열세명의 지명수배자>를, 마릴린 먼로가 자살했을 때는 <마릴린 먼로>, <모나리자>의 미국 전시를 보고는 <모나리자>를, 닉슨의 중국 방문 때에는 <마오>, 케네디 암살 사건 후에는 <재키>를 만들었다. 부와 명성, 풍요에 대한 작품 외에 그 이면을 이루는 죽음 또한 그의 주요 주제였다. <전기 의자>, <자동차 사고>, <해골> 연작 등이 이런 부류에 속하는 작품들이다.

1968년, 팩토리를 드나들던 여성의 총격으로 심한 부상을 입게된다. 1969년에는 인터뷰만으로 구성된 잡지 『인터뷰』를 창간했는데 이 잡지는 아직도 발간되고 있다. 70년대의 워홀은 실크스크린에 드로잉, 페인팅, 콜라주 등을 섞어서 기법을 다양화했다. 사진을 꿰매어 연결해 한 화면으로 만드는 <꿰맨 사진>, 물감을 칠한 캔버스에 소변을 봐서 추상적인 효과를 내는 <산화 회화>, 추상화의 효과를 내는 거대한 캔버스 작업인 <그림자>도 이 시기의 형식 실험들이다.

그는 많은 책에 그의 생각을 남겼다. 그가 구술한 내용을 비서가 기록해서 만든 저작들에는 1975년에 나온 『앤디 워홀의 철학』, 1980년에 나온 『팝-이즘』 등이 있다. 1976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매일 매일의 전화 통화로 그의 일상을 기록한 『앤디 워홀 일기』도 그의 사후인 1989년에 나왔다. 1974년부터는 그의 손을 거쳐간 거의 모든 물건을 상자에 모으는 <타임 캡슐> 작업을 시작해서 이 역시 사망할 때까지 중단하지 않았다. 앤디 워홀은 1987년, 58세의 나이에 담낭 수술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앤디 워홀은 상업적인 대중문화와 일상 생활의 어휘를 미술에 끌어들인 팝 아트로, 자기 세대와 소통하고 당대를 반영했다. 그의 독특한 성격과 스타일로 현대인의 욕망과 가능성을 정직하게 끌어내 보여줬다. 워홀의 작업은 회화와 판화, 예술 작품과 상품의 경계를 무효화시켰다. 그는 작품과 생활로, 고급 예술과 저급한 대중 문화, 상류 사회와 전위 예술가 사회를 융합시켰고 이들 각각을 이전과 같은 눈으로 볼 수 없게 만들었다.

2. 상업디자인너에서 팝아트의 제왕으로(From a Commercial Artisr to the King of Pop-Art)

대학에서 시각 디자인을 공부하고 드로잉에서 재능을 보였던 워홀은, 1949년 여름에 졸업을 하자마자 뉴욕으로 와서 패션 잡지의 일러스트레이터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가 처음 맡은 일은 잡지 『글래머』에 실릴 기사의 삽화를 그리는 것이었는데, 그 기사의 제목은 의미심장하게도 “뉴욕에서는 성공해야 한다(Success is a Job in New York)”였다. 그때 잡지사의 실수로 그의 성인 워홀라 끝의 a가 빠지고 워홀로 인쇄되었는데, 그는 그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이후로 그는 워홀로 살기 시작했다.

1950년대에 워홀은 성공적인 패션 일러스트레이터로 살았다. 『글래머Glamour』 뿐 아니라 『하퍼스 바자Harper’s Bazaar』, 『세븐틴Seventeen』, 『어메리칸 걸American Girl』, 『오페라Opera』, 『보그Vogue』, 『라이프Life』와 같은 잡지에 그의 드로잉이 실렸고, 레코드 커버나 공연 포스터 제작 의뢰도 이어졌다. 1955년에는 매주 신문광고 이미지를 만들기로 구두 회사 아이 밀러와 계약을 했다. 일러스트레이터로서의 이력은 1956년과 57년에 정점에 달했다. 그는 권위 있는 디자인 관련 상을 탔고, 많은 돈을 벌었다. 1957년에는 ‘앤디 워홀 기업(Andy Warhol Enterprises, Inc.)’이라는 이름의 회사도 설립했다.
하지만 1958년이 되면서 상황은 좋지 않은 쪽으로 변했다. 패션 일러스트레이션의 유행이 드로잉을 선호하지 않는 쪽으로 변했고, 아이 밀러는 그와의 계약을 취소했다. 그 즈음 그는 재스퍼 존스와 로버트 라우센버그의 전시를 보게 된다. 일상생활의 이미지와 물건을 미술의 주제로 삼은 이들의 작품은, 그때까지 미국 미술계를 장악하고 있던 추상표현주의와 다른 미술이 가능하다는 것과 새로운 미술의 시대가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사건이었다. 워홀의 이들에게서 새로운 성공의 모델을 보았고, 그의 목표는 이제까지와는 다른 방향으로 세워졌다.

1961년에 그는 신문 광고 이미지들을 그린 <광고>, 만화 이미지를 옮겨 그린 <슈퍼맨>과 <뽀빠이> 등 5점의 회화를 백화점 쇼윈도우에서 전시했다. 그때까지는 작품에 붓자국이나 물감이 흘러내린 자국이 보였지만 곧 그런 표현주의적 흔적을 버렸다. 로이 리히텐슈타인이 주제로 삼은 만화 이미지도 버렸다. 그는 가장 흔한 상품인 캠벨 수프 캔을 선택했다. 그 대량 생산된 상품을 화가의 손길이 느껴지지 않게 기계적으로 재현하고, 그것을 상품처럼 선반에 늘어놓아 전시한 1962년 LA에서의 개인전부터 워홀 식의 팝 아트가 시작되었다. 이후로 앤디 워홀은 현대 사회와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가장 충실히 반영하는 거울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를 ‘팝 아트의 제왕(Prince of Pop)’이라 불렀다.

3. 뉴욕 상류사회의 거울이 되다.(Became a Mirror of New York’s Beau Monde)

1963년에 작품 수집가 로버트 스컬은 그의 아내 에텔의 초상화를 워홀에게 주문했다. 이에 응해 사진 부스에서 찍은 사진을 가지고 만든 에텔 스컬의 실크스크린 초상화는, 신선하고 역동적이고 솔직한 느낌으로 주문자를 만족시켰다. 이후로 그에게 초상화를 얻고자 하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고, 이런 주문 초상화 작업은 70년대 중반부터 특히 많아져서 ‘초상화 산업’의 단계에 이르렀다.
워홀의 초상화를 갖는 것은 상류 사회의 유행이 되었다. 수많은 유명 인사와 거부들이 그에게 초상화를 주문했다. 그는 초상화에 쓰일 폴라로이드 사진을 찍기 전에, 그림의 주인공 얼굴에 잡티가 보이지 않게 화장을 해 주었고, 작품의 색채를 그림이 걸릴 방의 인테리어와 맞춰 달라는 주문자의 요구도 다 들어 주었다. 이 시기의 워홀은 사교계의 명사가 되었고, 그가 사귀게 된 새로운 스타들도 그에게 초상화를 주문했다. 이런 사교 활동을 노골적인 상업주의라고 비판하면서 그가 더 이상 예술 작품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사업체를 운영한다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1960년대에 보헤미안적인 하위문화의 조용한 관찰자였던 워홀은 70년대 이후에 뉴욕 상류 사회의 모습을 반영해 보여주는 거울이 된 것이다.

4. 폴라로이드 사진에 매표되다.(Immersed in Polaroids)

워홀은 자신의 스튜디오나 호텔 방, 또는 사람들의 집에 초상화 촬영 시간을 정해두었다. 70년대에 워홀은 폴라로이드 SX70 빅샷으로 맘에 드는 사진이 최소 다섯 장이 나올 때가지 수십 롤의 사진을 찍었다. 60년대의 즉석사진 초상화와 유사하지만, 폴라로이드 사진은 선명한 이미지에 잡티나 결점을 제거할 수 있으므로 피사체가 한층 돋보였다. 뿐만 아니라 대형 실크스크린 회화로 변형시키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스튜디오에서 이루어지는 특별한 오찬 장면 등 다양한 절차들이 촬영되었다. 피사체가 여성일 경우에는 주름이 안 보이도록 백색 메이크업을 했고, 천 한 장을 입고 양 어때가 드러나도록 포즈를 취하거나 얼굴 부분만 촬영하기도 했다. 남성의 손을 촬영하는 경우는 시가를 들려 주거나 여러 가지 소품을 통해 인문의 개성을 살렸다.

5. 죽음과 재앙(Death and Disaster)

앤디 워홀은 평생 유명인사나 미모, 매력, 부유함과 같은 밝고 화려한 주제에 집착했다. 이것을 좋아하는 만큼 그 모든 것을 사라지게 할 죽음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가 만든 모든 초상화에서도 비극의 기미를 조금씩은 느낄 수 있지만, 그가 본격적으로 이 주제를 다룬 것은 <죽음과 재앙> 연작에서다. 그가 화가로 활동했던 1960년대부터 말년에 이르기까지 이 주제는 다양한 매개를 통해 다루어졌다. 1962년에 이미 비행기 사고로 129명이 사망한 신문 기사를 그대로 그린 적이 있고, 이후에도 죽음을 연상시키는 전기 의자, 자동차 사고, 인종 폭동 등의 사진이 작품의 재료가 되었다.
죽음은 워홀의 개인사와 당시의 시대 상황 양쪽과 깊은 관련이 있다. 초등학교 때 오랫동안 학교에 가지 못할 정도로 심하게 열병을 앓은 적이 있던 워홀은, 14살 때 아버지의 죽음까지 맞게 되었다. 일찍부터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강박적인 관심을 가졌던 워홀이 살아간 시대 또한 비극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했다. 워홀이 활동하던 시기의 미국은 전에 없던 풍요의 시대이기도 했지만 죽음을 생각할 수밖에 없는 폭력의 시대이기도 했다. 베트남 전쟁에 나간 미국의 젊은이들이 죽어서 돌아왔고, 고조되는 냉전의 위기는 핵전쟁에 대한 불안을 떨칠 수 없게 만들었다.
개인에 대한 폭력도 드물지 않아서 1963년에 존 F. 케네디가 암살되었고, 68년에는 마틴 루터 킹과 로버트 케네디가 암살되었다. 같은 해에 워홀 자신도 치명적인 폭력의 희생자가 되었다. 팩토리에 드나들던 발레리 솔라나스(Valerie Solanas)가, 자신이 쓴 시나리오를 워홀이 돌려주지 않는다면서 그에게 총을 쏜 것이다. 체포된 후에 솔라나스는 ‘워홀이 자신의 인생을 너무 많이 통제하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대수술과 힘겨운 회복기를 거쳐 다시 활동할 수 있게 되기는 했지만, 이후로 팩토리의 활동은 훨씬 조심스러워졌고, 워홀의 건강도 완벽한 상태로 돌아오지는 않았다. 이것은 그가 58세라는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되는 요인의 하나가 되었다.

6. 타임캡슐(Time capsules)

워홀의 <타임캡슐 Time Capsules>은 다양한 카테고리의 수천 가지 보존품을 담은 방대한 다중 미술 작품이다. 612개의 컨테이너(큰 트렁크 하나, 40개의 금속 캐비닛 서랍, 571개의 소포 박스)에 워홀의 물건들이 보관되어 있다.
이 상자와 컨테이너들은 원래의 상태로 보관되어 있다. (하나의 컨테이너가 그 자체로 하나의 <타입캡슐>이다.) 상자의 크기는 대개 높이 11인치, 길이 18인치, 넓이 13인치이다. 또 다른 유명한 연작인 <그림자 Shadows>(1978)는 102개의 캔버스로 되어 있다. 워홀은 <그림자>를 가리켜 “102개의 부품으로 구성된 하나의 회화 작품”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따라서 <타임캡슐>도 612개의 부분으로 구성된 하나의 조각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타임캡슐>은 1974년 스튜디오를 이전할 때 한 직원의 권유로 시작되었다. 소품들, 편지, 서적, 신문 잡지, 사진, 작은 골동품 등 작업실에 쌓여있던 수많은 물품들을 정리해야 했을 때였다. 이후 12년에 걸쳐 워홀은 이 컨테이너들을 더 자주 채워나갔고, 스튜디오에서뿐 아니라 집에 돌아와서도 사적인 물건들을 계속 채워 넣었다.

<타임캡슐>은 워홀의 채우기 성향을 보여주고 사적인 다양한 관심영역을 반영하는 동시에, 그의 생애와 당시 시대상을 들여다볼 수 있는 창이다. 워홀은 종종 이 타임캡슐을 뉴욕에 있는 자신의 갤러리에서 전시하고 판매하겠다고 말했으나, 레오 카스텔리(Leo Castelli)는 결코 그 생각을 실천에 옮기지 않았다. 그는 장래 바이어가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모른 채 <타임캡슐>을 선택하여 “보물 뽑기” 파티의 즐거움을 만끽하게 될 것이라 단정했다.

각각의 <타임캡슐>에는 평균 600여 개의 물건이 들어있다. 현재 3명의 카탈로그 편집자가 팀으로 구성되어 물건들을 목록화하는 중인데 향후 6년 이상이 걸릴 것이다. 안에 들어 있는 것들은 대개 종이류지만 예술품과 미술용품들도 있으며 옷, 장난감, 장식품, 비닐 음반, 테이프 오디오 녹음기, 여행 기념품, 유명인 수집품, 심지어 음식도 있다. 이미 출판된 워홀의 <다이어리 Diaries>는 이 물건들을 해석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미술관 직원들은 왁스페이퍼 화가의 사용감 있는 팔레트들과 펜 한 자루가 들어있는 비닐봉투의 정체를 밝혀냈는데, 바로 1978년 3월 19일 초현실주의의 대가 살바도로 달리(Salvador Dali)가 워홀에게 준 선물이었다.

워홀이 <타임캡슐> 프로젝트를 시작한 것은 1974년이지만 타임캡슐 중에는 상당수가 1950년대와 19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 물건들이 들어 있으며 약 80개의 타임캡슐이 그 시대에 맞춰져 있다. 또한 몇몇 물건들은 워홀의 어린 시절과 연관되어 있으며(그가 세 살에(1941년) 셜리 템플로부터 받은 사인이 담긴 사진 등), 심지어 더 오래된 레슬링에 대한 일러스트북인 <보르스텔 콩스트 Worstel konst>(1674년 암스테르담에서 발간)도 들어있다.

– 장소 : 부산시립미술관
– 일시 : 2015. 11. 25. – 2016. 3. 20.

추PD의 아틀리에 / www.artv.kr / abc@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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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世紀、ポップアートを代表している「アンディ・ウォーホル」の様々な作品が2015年11月25日から釜山日報70周年を記念し、釜山市立美術館で開催されます。今回の展示ではアメリカのピッツバーグのアンディーウォーホル美術館の膨大な所蔵品を公開し、国内には初公開される作品もあり、アンディ・ウォーホルの時代別に多彩な作品が展示され、今までの彼の人生が見られる展示会です。今回の展示会では彼の幼いときの写真と彼らしい特有な自画像の写真から、産業デザイナーとして活動されたニューヨークの時のドローイング、キャンベル・スープシリーズを含めたポップアートとして名を遂げ始めた1960年から70年代、シルクスクリーンの作品の「マリリン・モンロー」、「マイケル・ジャクソン」など有名人の自画像が約40点、そして「タイム・カプセル」と称した箱に収められた、ウォーホルの私的な書簡、雑誌などの190点、また視覚芸術の全般に革命的な変化を果たしたアンディ・ウォーホルの作品を約400点を公開されます。特に今回の展示ではカモフラージュの自画像、髑髏、ラファエルマドンナ-$6.99、ベルリン・フリードリヒの記念日など2メーターが越える大型作品と30年ぶりに発見されたデジタル作品が見どころです。アンディ・ウォーホルの人生と芸術が見られる様々な作品と膨大な資料は観客をしてポップアートの先駆者また、神話として位置づけたアンディ・ウォーホルの人気をまた感じられる機会になれると思います。

-場所:釜山市立美術館
-日付: 2015. 11. 25 – 2016. 03.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