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는 것들에 대한 질문
강선학(미술평론)
얼마나 많은 것들이 이 세상에 있고자 하는가. 존재에의 욕망은 그저 관념의 문제일까. 누구의 말대로 존재의 욕망이란 말의 문제일까. 그 말은 정말 있는 것의 끝에 혹은 사유의 끝에 있는 그 무엇일까. 그저 있지 못하고 끊임없이 말하는 인간은 무엇일까. 그리고 한시도 쉬지 않고 무언가를 표현해야만 하는 인간들과 세계의 관계는 어떤 것일까. 김영아의 작품을 보면서 이 세상에 없는 꽃들을 끊임없이 개화시키는 욕망의 근저가 무엇인지를 묻게 된다. 없는 것들을 이곳에 있게 하는 것, 있는 것들 사이에서 없는 것들의 드러남은 또 어떤 일일까. 그의 작품은 이런 질문을 던진다.
그의 화면 안에는 읽어야 할 별다른 일들도 이야기도 사물도 없다. 그저 꽃들이 여기저기 피어 있을 뿐이다. 구성이 드라마틱한 것도 아니고 평면으로 펼쳐지는 화면에는 꽃의 실재감을 묘사하려는 입체감도 찾아보기 힘들다. 그저 우리가 아는 정도에서 묘사는 그치고 우리가 아는 것 같은 꽃들이 나열되어 있을 뿐이다. 간혹 새나 짐승이 등장하지만 그저 하나의 요소일 뿐 화면 내의 역할은 단조롭다. 철저하게 평면성을 지키는 화면의 구성도 그렇다. 전면화된 화면의 구사는 그려진 꽃들을 그저 평면의 사진이나 도해된 식물들로 보이게 한다.
그러나 그의 꽃은 현실 속에서 확인되는 실재의 사물이 아니다. 그가 그리면서 만들어낸 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실재의 꽃인 양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만큼 꽃이라는 사물, 꽃이라는 이름이 가진 친근성, 정서적 동조감이 크고 깊다는 말이다. 그저 통속적으로 아는 것들이다. 어떤 꽃이 아니라 꽃이라는 것으로 더 이상 의문 없이 받아들여지는 그 통속성의 전형이 꽃에 대한 우리들의 지각이다. 그 틈새에서 김영아의 꽃은 만개한다. 생생한 현장에서의 지각이 아니라 관념적인 이해에 가깝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꽃에서 사실적인 색채와 형태와 향기를 맡고 보아내고 촉감을 가진다고 여긴다. 그리고 화면에 펼쳐진 난장의 꽃밭을 연상하는 것이다.
이 화면이나 저 화면에서 변별되는 것들은 그리 많지 않다. 색채나 형태가 조금씩 다를 뿐이다. 그것은 거의 반복에 가깝고 일반적으로 그저 알만한 꽃들일 뿐이다. 아는 것들의 등장은 우리에게 알아야 한다는, 새로운 것이 있다는 부담을 주지 않는다. 그저 보는 것에 집중하게 만들 뿐이고 그것으로 만족한다. 통상적인 소통 수단이란 아는 것들을 통한 이야기다. 그러나 통상적 이야기는 아는 이야기가 아니라 아는 이야기 사이에 드러나지 않는 것들에의 소통과 양해가 없다면 대화로 성립되지 않는다. 통속적 이야기를 하면서 그 통속적 이야기의 상황과 인상에 따라 다른 이야기들의 잠복을 보아내고 그것들을 읽고 듣고 말하는 것이다. 행간을 읽는다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다. 그것이 우리의 일상이다. 수다 사이에 일상의 온갖 정보들이 오가는 것이 그런 경우다. 다 아는 꽃들 사이에서 꽃을 보면서 그동안 보지 못한 꽃을 보고 느끼지 못했던 느낌을 받고 기억을 환기하고 때로는 일상을 벗어난다. 그 꽃이 아니라 ‘그것 같다’는 것으로 보이고 통하는 세계. 그것이 그가 보여주는 통상적인 꽃들의 향연이다.
그 꽃들은 김영아가 만든 꽃이다. 그러니 꽃의 형상도 색상도 생태적인 특징들도 더구나 이름조차 없는 것들이다. 세상에 없는 것들의 만남, 그것이야말로 그가 욕망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지각되지만 이해되지 않는, 이해하려 하기 전에 만나게 되는 꽃이라는 그것, 그저 그곳에 있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 아닌가. 그 절박함에도 불구하고 애매하기 짝이 없는 존재하려는 욕망이야말로 그가 꽃이라는 일상적 형상을 통해서 그려내려는 비일상의 언어들이 아닐까. 이름 붙이기 전의 것, 의미나 규정이 아닌 것들의 생생한 만남, 그것은 부재하는 것들의 드러냄이며 있지만 없는 것, 없지만 지금 여기 있는 것들의 조우이다.
붉고, 희고, 노랗고, 푸르다. 분홍과 자주를 넘나들면서 피어나는 세계, 색의 현시화로서 꽃이다. 색(色)은 세상의 객관적 존재 전체를 일컫는 한자어다. 그 객관은 주관과 무관하지 않다. 그것은 빛에 의해 색상으로 드러나고 만나는 세계이다. 색상은 우리 눈의 능력만큼 다양하게 드러난다. 그의 화면은 꽃이라는 실체가 아니라 꽃이라는 관념을 통해 만나는 색의 세계인 셈이다. 그 꽃은 있는 세계이자 없는 것들이며, 이름 있는 것들이자 무명의 것들이 공존하는 것이며, 있음과 없음 사이에서 이미지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생생함 그 자체이다. 이미지야말로 그 사실성의 가부와 무관하게 우리의 감각에 의해 만나는 세계이자 욕망이지 않은가.
그의 꽃들은 만들어진 것이지만 원과 삼각, 사각이라는 원형적 형태 안에서 스스로 증식하고 분해하고 결합하면서 새로운 꽃의 형상을 만들어내는 기묘한 구성의 생태학을 보여준다. 그 원형은 만다라의 구조에서 쉽게 목격되는 특징들과 일치성을 보여준다. 원형으로서의 생명과 생성을 만나는 장소가 바로 그의 꽃밭이다. 어떤 것으로도 생성되는 가능성으로 있는 것, 그것이 그가 만드는 세계다. 군락도 아니고 단위도 아니고, 생물학이나 원예학의 생태적 묘사도 아닌 것들이 자기분화와 증식, 조합으로 형태가 만들어지고 그 자체로 존립하는 세계이다.
이 세상에 없는 꽃들을 끊임없이 개화시키는 욕망, 그것이 김영아의 꽃이라면 그것이야말로 인간의 욕망, 이미지의 욕망, 말의 욕망, 표현의 욕망, 생성의 욕망에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의 꽃은 막막한 세계에 대한 질문을 부화시키고 추동한다.//강선학 평론//
– 장소 : 해운대아트센터
– 일시 : 2015. 12. 8 – 1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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