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현재의 순간 속으로 불러낸 자연
박영택 (경기대교수, 미술평론가)
나무와 꽃의 형상이 떠오르는 그림이다. 매화나 벚꽃이 흩날리는 봄날의 어느 정경이 연상된다. 자연과 생명현상의 장엄하고 신비하며 뜨거운 어떤 순간을 목도케 하거나 그런 감흥에 젖게 한다. 따라서 그의 그림은 보는 이의 감성을 자극하고 정신적 활력을 건드려서 고양된 정서와 쾌감을 준다. 그림이 표면이 아니라 그로부터 떨어져 나와 활달한 정신적 비약을 가능케 해주는 것이다. 그림은 구체적인 풍경으로부터 발원한다. 그는 특정한 장소를 사진으로 잡아오지만 그림을 그리는 동안 그 구체적 풍경들은 희미해지고 단지 그 풍경에서 받은 감흥이나 인상만을 걷잡아 올리려 한다. 이른바 앞서 언급했던 심안으로 보는 자연이다. 현실계에서 출발해 심안으로 보는 자연, 사의성 짙은 그림의 세계로 물꼬를 터 나간다. 그래서 사군자나 산수화와 매우 유사한 그림이 되었다. 이른바 전통회화의 내음이 짙게 풍기고 그만큼 한국인의 자연관과 심미성, 미적 특질 같은 것들이 용해되어 있다는 느낌이다.
또한 작가는 실제 꽃이 핀 나무를 소재로 해서 그리되 그것을 단서 삼아 자율적인 그리기의 경지를 도모한다. 그림 그리는 행위와 그림을 구체화하는 재료 사이에서의 우연적인 사건들의 조합이랄까. 표면에는 수성의 느낌으로 홍건한 유동적인 물감의 흔적과 쓱쓱 문질러나간 경쾌한 붓질, 쿡쿡 찍어놓은 안료의 자취만이 가득하다. 그것은 이미지와 물질 사이에서 진동한다. 이 그림은 특정한 대상의 재현인 동시에 그림을 이루는 조건의 물성으로 환원되기도 한다. 어쩌면 그림의 운명은 이미지와 질료 사이의 그 어느 틈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차규선의 그림은 실재와 비실재, 현실과 허구 사이에 있는 것처럼 재현/비재현의 경계에서 혹은 형상/질료의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꽃나무를 그린 것 외에 화면 전체를 흡사‘올 오버’(전면회화)로 보여주는, 꽃이 가득한 그림 역시 순수한 물감(색)의 집적인 동시에 무성한 꽃밭의 구체적인 이미지이기도 하다. 그것은 오랜 시간동안(우연히) 바닥(화면)에 떨어진 물감의 자취이자 무성한 꽃무더기 같기도 하다. 보는 이의 눈과 마음이 지난 기억을 불러들여 현재의 시간 속에서 그 장면을 목도하는 듯한 체험을 갖는 것이다. 그러니 그의 그림은 마치 영매와도 같다. 작가란 존재는 자신의 몸으로 경험했던 특정 풍경에 대한 기억, 감각과 생각을 전달하는 이들이다. 차규선은 자연 속에서 경험했던 한 순간의 경이로움과 매혹을 그림으로 전달하려고 한다. 기억하려고 한다. 그는 매개자고 무당이다. 그가 전하는 것은 실상 우리가 모두 겪었거나 체험했던 것들이다. 그러나 작가란 존재는 그 기억을 풍부하고 예민하게 전해주는 능력을 지닌 이들이다. 우리는 기억이라고 불리는 것, 이미 지나간 것을 불러내지 않고서는 현재의 삶을 살 수 없다. 우리가 매순간 사는 삶이란 지나간 시간, 죽었던 것들, 소멸되고 희박해져버린 것들을 현재의 순간 속으로 불러내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의 삶도 결국 영매인 것이다. 이처럼 그림을 그린다는 행위는 언제나 죽은 것들을 불러내며 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림은 영매이자 늘상 ‘사후적’이다.
고향인 경주에서 흔하게 접하던 소나무(자연)에 대한 추억, 자신을 사로잡은 분청사기의 질박하고 단순한 미감, 오래된 것에 대한 기호 등이 차규선 작업의 뼈대가 되었다. 그는 안료와 흙을 섞고 지지대에 밀착할 수 있도록 접착제를 넣어 특유의 흙 맛, 분청 표면의 감각이 감도는 표면을 형성하고자 했다. 무채색의 톤은 분청의 톤이자 흔히 한국적인 색채(단색주의에 유사한)라 불리는 것이기도 하다. 동시에 꽃의 황홀한 색채 역시 한국 자연이 지닌 색채다. 그는 이 두 가지 색채를 모두 껴안는다. 색채와 함께 매화나 소나무, 꽃나무(자연이미지)역시 그 이미지를 빌어 한국 자연의 멋을 자연스럽게 구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은 한국인이 저 자연과 함께 해온 무수한 세월 속에 형성된 미감이자 주어진 자연 속에서 궁구한 이치와 섭리 같은 것이다. 자연과 그 자연의 현상적 변화를 통하여 인생의 현상적 삶에 대한 이치를 깨치고자 하는 것이 동양의 전통적인 자연관이었다. 옛사람들은 변화와 순환을 거듭하는,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자연의 규율을 ‘도(道)’라 불렀다. 이를 터득하는 것이 또한 동양예술의 핵심적인 키워드이기도 하다. 그림 역시 자연의 그 도를 깨닫는 일이다. 생태계를 장엄한 생명의 장, 커다란 조화와 공생의 장으로 파악한 것이 전통적인 동양의 자연관인데 따라서 사람과 천지만물은 근원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서로 소통하는 존재다. 사람과 물(物)이 하나라는 이 같은 존재론적 통찰은 인간만이 주체가 아니라 모든 존재를 주체로 간주하는 입장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나무와 꽃을 그린다는 것은 단지 꽃, 나무라는 현상적 존재, 즉물적 차원의 대상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보편적인 자연이자 뭇생명체, 인간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이처럼 옛사람들은 생명의 본성, 자연의 이치 및 삶의 이치를 식물성의 세계를 통해 깨달았다. 산수화나 사군자 모두 그런 맥락에서 파생한 것이다. 자연에서 발견되는 생성과 소멸의 과정은 예술가에게 신비로움과 자연에 내재된 생명력을 느끼게 해준다. 즉 자연과 인간의 유기적 관계를 통해 근원적인 자연의 생명력과 인간의 무의식이 만나는‘영혼의 상태’를 표현하는 것이 그림의 일이었다. 진정한 의미에서 세계, 타자를 내 안으로 힘껏 끌어안는 일이다.
차규선의 그림은 구체성을 지닌 이미지와 그것을 붓질로 단숨에 그은 필획의 동세, 그리고 물질과 이미지 사이의 관계를 보여준다. 명료하고 단일한 이미지와 즉흥적이고 충동적인, 거의 율동에 가까운 붓질을 병존시키고 있는 그의 그림은 구상도 아니고 추상도 아닌, 풍경도 아니고 형태도 아닌 그 중간지대에 떠있다. 그는 물감으로 어떤 것을 그린다기 보다는 물감 자체의 유희성, 우연성, 자발성 등을 기꺼이 허용한다. 드로잉적인 요소가 강한 평면회화를 통해 다분히 서체적인 회화(모필 자체의 힘을 극대화하고 있는)의 장을 열고 있는 그는 무엇인가를 애써 그리거나 꾸미려는 태도를 떠나 작품에 대한 무심한 태도를 유지하면서 이미지와 제스처, 정신의 리듬을 일치시키려 하는 것 같다. 이는 다분히 자연의 원리에 순응하는 태도로 보인다. 그는 자연에서 구체적인 대상을 하나의 회화적 코드로 삼아 전통과 연계시키고 그것을 감각적인 붓질로 보여 준다. 확고한 이미지를 선행시켜 그것을 형상화해내려는 의도를 가능한 배제하고 무엇보다도 그린다는 행위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림이란 결국 그린다는 사실 자체일 뿐이다. 따라서 나무줄기나 꽃을 그린 것이라기보다는 그 형상을 연상시키는 필촉, 붓질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그의 회화는 캔버스라는 평면 위에 페인트가 칠해진 사물, 즉 타블로(회화)라는 사실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상당히 감성적인, 감각적인 이미지를 함께 제공해준다. 그는 작업과정 중 어렴풋이 머리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들, 그가 보았고 기억하고 있는 풍경을 빠른 필치로 대상화한다. 그로인해 그림은 사의성이 강한, 명상적인 자연의 이미지가 되었다. 우리 선조들이 깨닫고 보았던 자연에 대한 기억이 다시 현재의 순간으로 호명되고 있다. 작가의 영매에 의해서 말이다.
– 장소 : 갤러리 래
– 일시 : 2014. 4. 3 – 5. 13
추PD의 아틀리에 / www.artv.kr / abc@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