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중展(복합문화예술공간 MERGE?)_20250404

//작가노트//
내 작품들에 대한 명제가 무엇인지,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묻곤 한다. 나는 내 작품들을 통해서 내가 이야기하고, 묻고 싶은 것들이 어떠한 말로 한정을 지어 특정한 범위 안에 가둘 수 없고, 설명하려고 하면 할수록 ‘이것’과는 더 멀어져 버리며, 모습이 없고 이름 지을 수 없는 ‘이것’을 억지로 표현하려다 보니 명제를 달지 못하고 숫자로만 작품들을 구분 짓게 되었다. 또 나는 나의 작품들을 통해서 보고 듣고 생각하고 걷게 하며 손가락을 움직이게 하고 수면 중에 꿈꾸게 하는 이것, 이 모든 것들을 인식하는 이것, 세상의 모든 변화 속에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스스로는 변화하지 않고 항상 여여(如如)하며 모든 것을 변화케 하는 ‘이것’을 나는 이야기 하고 묻고 싶은 것이다.

바람은 그냥 기압 차이에 의해 공기 중의 이물질들의 움직임을 우리는 바람이라 칭할 뿐, 바람이라는 따로 떨어진 고유의 물질은 존재하지 않는다. 화가에게 거울을 그려보라고 하면, 거울에 비친 사물이나 풍경, 빛의 반사나 테두리만 표현할 뿐, 비친 내용물을 제외한 순수한 거울은 표현할 수 없고, 대상들의 비춤이 없는 거울은 또 거울이라 할 수 없다. 빛도 마찬가지로 세상의 모든 물질이 없고 오로지 빛만 있다면 우리는 그 빛이 밝다거나 어둡다고 정의할 수 있을까? 단지 빛에 의해 빛을 반사하는 이물질들의 반사 정도에 따라 서로 비교하여 밝다거나 어둡다고 말할 뿐이다. 빛을 반사하는 물질들이 하나도 없고 그냥 빛만 있다면 아마도 우리는 빛을 깜깜하다고 표현할지도 모르겠다. 파도와 바다를 떼어 놓을 수 없듯, 내가 없으면 대상은 있어도 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대상이 되는 그 무엇이 없으면 있다거나 없다고 말할 수 없으며 결국 그들은 하나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나면서부터 익힌 수많은 구분 지음과 거짓된 추측과 주장들로 인해 진실과는 아득히 멀어져 버렸다. 세상사 ‘새옹지마 (塞翁之馬)’라고 다음 순간 어떻게 될지, 어디로 흘러갈지, 이 상황이 나중에 가서 자신에게 덕이 될 지 해가 되어 다가올지를 우린 알지 못한다. 다만 그 순간에만 집착하여 이러니저러니 하며 조작하여 수많은 오류를 낳고 있다. 그동안 배워온 세상의 얄팍한 지식이나 짐작, 선 지식인이나 조사들의 글을 읽고 하는 이해와 앎으로 ‘여기’에 다가갈 수 없다.
이름 지어져 있고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은 모두가 망상일 뿐이다. 우리의 생각이나 감각, 행위의 애씀으로는 이 진실에 다가갈 어떠한 특별한 방법이 없다. 그래도 우리는 이 진실과 통할 수 있다. 높은 지위와 많은 부를 쌓고 많은 업적을 이루었다 하더라도 이러한 깨침 없이 우리의 한 생이 다하여 마지막 숨이 목전에 다가왔을 때, 지난 온 삶에 대해 어찌 후회 없음을 인식할 수 있을까? 삶에서 진짜 중요한 것은 무엇이 허상이고 무엇이 진실인지를 깨쳐야 한다. 당장의 한 끼니와 잠을 잘 자리가 필요한 이들이 있고 일자리가 중요한 이들도 있으며 부와 명성을 목표로 살아가는 이들도 있지만, 나에겐 유년 시절부터 이 일이 더 중요했고 더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생각으로 추측할 수 없고 논리로 정리되지 않으며 보이거나 감각하고 지각되지는 않지만, 그래도 깨달아 통할 수는 있는 ‘여기’에 대해 나는 이야기 하고 묻고 싶은 것이다. 한 번만이라도 ‘이것’을 직접 경험해 본다면, 과거 몇 천 년 동안 우리가 성인군자라 칭하는 이들이 했던 그 모든 이야기들이 그저 그 상황에서 순간적으로 사용된 방편일 뿐,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점이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질 것이다. 마치 장님이 눈뜬 것처럼…. ‘이것’은 모든 것들을 포함하며 동시에 모든 것을 초월하고, 우리는 ‘여기’에서 단 한 순간도 벗어 난 적이 없으며 벗어날 수도 없는 세상 모든 것들의 합이다.

우리는 세상의 다른 모든 것들을 조작할 수 있지만, 유일하게 ‘이것’만은 우리의 어떠한 수고와 애씀으로도 조작하거나 어찌해 볼 수 없으며, 대상화될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니다. 또한 이것은 날것이다. 어떠한 생각이나 관념, 조미료가 첨가되지 않은 순수하고 싱싱한 날 것이다. 여기를 한 번이라도 직접 통한이라면 이후로는 익숙지 않은 여기에 적응되어짐이 남는다. 아무 일이 없는 무위일 뿐이다.//이한중//

//작가 인터뷰//
Q. 안녕하세요, 작가님. 자기소개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A. 안녕하세요, 저는 흙 작업을 주로 하다가 10년 전부터는 자작나무 합판을 집성하여 조각하는 이한중입니다. 유년 시절부터 세상살이가 시시껄렁하고 보잘것없이 보여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그냥 혼자 있음을 즐기다가 그림을 하게 되었고, 중학교 2학년 때부터 깨달음에 관심이 많아 공부하다가 20여 년 전에 ‘이것’에 통하여 ‘이것’에 대한 주제를 가지고 부산에서 전업 조각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Q. 이번 전시에 대해 간략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A. 기존의 몇 되지 않는 이한중 조각전에서는 입체작품이 주를 이뤘다면 이번 전시는 부조(평면/벽걸이) 형식의 신작들을 위주로 합니다.

Q. 작품마다 제목 대신 숫자만 붙여 구분하고 계신데요. 이 선택이 작가님의 세계관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그리고 ‘이름 짓기’에 대한 태도를 좀 더 들어보고 싶습니다.

A. 한정 짓거나 제한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입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이런, 저런 사람이라고 구분/제한하고 한정 지으며 살고 있습니다. 마음의 변화(시간이 지나거나 상황/입장이나 시점이 달라지거나 시절 인연의 결과 등)에 따라 보이는 대상에 대한 해석이나 의미를 부여했던 것이 얼마든지 바뀌거나 달리질 수 있다고 봅니다. ‘나’라고 하는 것은 특정한 시간이나 공간, 이름이나 지위 등에 가둘 수 있는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무한한 가능성의 존재이며 이미 온전한 그 무엇입니다. 특히나 저의 작품 같은 경우는 말이나 글로는 설명되어질 수 없는 ‘이것’을 표현하려다 보니 더더욱 그러합니다. 하여 명제를 짓지 못하고 작품들 간의 구분 지음 정도에 따라 숫자로만 표기하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설명하자면 제 작품의 명제는 네 자리 숫자로 표기되는데 앞의 두 자리는 작품의 제작연도를 말하며 뒤의 두 자리는 그 해에 몇 번째로 제작한 작품임을 말합니다.

Q. 자작나무 합판이라는 재료를 선택하여 작업하시는 이유가 인상 깊습니다. 이 재료의 결이 만들어내는 리듬과 조형적 특성이 작가님에게는 어떤 감각이나 철학으로 다가오나요?

A. 합판의 경우 견고성이나 뒤틀림과 탄성 등의 이유로 층층이 결의 방향을 달리하고 견고성이 다른 나무들을 얇게 여러 겹으로 집성했습니다. 이러한 결과로 시간이 지나도 원목처럼 수축/팽창의 과정에서 뒤틀리거나 갈라지지 않는 장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내가 했다. 내 마음대로 한다.’라고 생각하지만 알고 보면 온 우주의 도움 없이는 작은 행위 하나조차도 이뤄질 수 없다고 봅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인연들의 결과로 하나의 과정이 이루어지며 멈추어서 고정되지 않고 또 다르게(예측 불가능한 것으로) 변화하듯이 자작나무 합판을 여러 겹 집성하여 조각했을 때 볼륨에 따라 변화하면서 반복적인 결들이 드러나는데 이 곡선의 결들이 갖는 리듬감과 시점에 따라 달라 보이는 결들의 하모니와 느낌이 좋고, 또 여러 결들이 모여 하나의 볼륨을 이루는 것이 마치 불교에서 말하는 연기법(緣起法) 같아 자작나무 합판 조각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Q. 작가노트에서 ‘Doing 보다는 Being’의 상태를 표현하고자 하셨다고 했는데요. 조각이라는 물질적인 행위로 어떻게 비물질적인 존재감을 담아낼 수 있다고 보시는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A. 어찌 제가 ‘Being’의 상태를 조각으로 담아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 무엇으로도 ‘이것’을 설명하거나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그 무슨 행위든 ‘이것’의 행위가 아닐 수 없다는 말이겠지요? 다만 깨닫고 보면, 우리는 단 한순간도 ‘이것’이 아닌 적이 없고 ‘이것’에서 벗어날 수도 없으며 세상의 모든 것이 ‘이것’ 안에 있고 ‘이것’ 밖에도 ‘이것’ 뿐입니다. 이미 우리는 무한하고 온전하며 그곳에 도달해 있는데, 스스로를 제한하거나 한정 짓고 비교하며 구분하여 부족하다는 생각으로 인하여 행위들이 ‘Being’의 상태에 만족하지 못하고 우리를 더더욱 Doing의 상태로 가게 합니다. ‘Doing’의 상태로는 결코 도달하거나 이루지 못할 뿐만 아니라 더더욱 멀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제가 표현하고 싶은 것은 이미 온전한 ‘이것’ 대한 이미지들의 미숙한 표현들입니다.

Q. 일부 작품들은 단순히 보는 것을 넘어 ‘통과되는 시선’을 의도하신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관객과 작품 사이의 관계에 대해, 시선 혹은 ‘경험의 방식’으로서 어떤 개입을 상상하셨는지 궁금합니다.

A. ‘이것’은 우리의 개념이나 관념, 생각이나 지식으로는 시간이 지나도 알지 못합니다. ‘이런 것이다’라고 정의 내리는 것 자체가 무지함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 인류는 아직, 작은 무엇 하나도 정확하게 정의 내리고 고정시켜 알아낸 것이 단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들의 생각이나 이름 이론 말들은 편의상 그 상황에 맞는 방편이었을 뿐, 추측이고 가설이며 고정 불변한 진실이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니어야 무엇도 될 수 있고 모든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어디에도 없어야 어디서든 있을 수 있고 없는 곳이 없을 수 있습니다. 거울이 깨끗해야 있는 그대로 비출 수 있듯이 아무것도 담고 있지 않아야 무엇이든 담을 수 있겠지요. 오히려 모르는 것이 좋습니다. 아무런 개념이나 선입견 없이 보십시오. 많은 이들은 어떠한 상황을 좋게 해석하는 것을 긍정적이다 하고, 안 좋게 해석하는 것을 부정적이라고 하는데 저는 좋게 보거나 나쁘게 보는 것 둘 다를 부정적이라 생각합니다. 과대평가나 과소평가도 둘 다 과장인 것입니다. 비교하지 않고 절대적인 고유의 대상을 좋다거나 그렇지 않다거나, 무슨 말로도 정의 내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긍정의 의미로 봅니다. 무어라 생각지 말고 ‘그냥’ 보시길 바랍니다. 무엇일까? 궁금해하거나 정의 내리지 말고 있는 그대로 봐 주시길 바랍니다.

Q. 작가로서 앞으로 추진하거나 시도하고 싶은 계획이 있으신가요?

A. 앞으로의 제 작품이 어떻게 변할지는 제가 가장 궁금한 부분입니다. 앞으로 어떤 인연이 닿아 제 관심을 끌어 표현하고 싶어 할지 어찌 추측하거나 예측하여 알 수 있겠습니까? 지금(미리 보내진 순간)의 상태에서 당면한 인연에 부정하거나 애쓰지 않고 성실하려 합니다. 그렇다고 선호하는 것이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Q. 전시를 통해 가장 전달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무엇인가요? 그리고 관객들이 어떤 점을 느끼고 가길 바라시나요?

A. 우리는 대상을 보고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다’라고 생각합니다. 직∙간접의 경험이나 무의식적인 습관으로 인한 우리의 생각은 자기가 아는 대로만 보고, 보고 싶은 대로만 보고 해석하여 고정시킵니다. 과연 우리는 대상을 통해서 무엇을 보며 또 무엇을 알고 싶어 하는 것일까요? 결국에 우리가 보는 것은 대상들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봅니다. 우리는 눈이 본다고들 하지만 사실 눈이 스스로 보지는 못합니다. 나라고 하는 ‘이것’이 눈을 통해서 대상들을 보고 귀를 통해서 소리를 듣고 감각들을 통해서 느끼는 것이지요. 또한 눈이 다른 대상들은 다 보지만 스스로의 눈은 보지 못합니다. 우리는 대상들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짐작하고 알아갑니다. 또한 변한다는 것을 알기 위해선 변하지 않고 영원불변한 그 무엇이 있어야 합니다. 변하거나 느껴지는 것(몸이나 생각 등을 포함)을 나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했다는 것을 느끼고 또 느껴지고 있음을 아는 ‘이것’이 진정한 자기가 아닐까요? ‘이것’은 특정한 시간이나 공간에 한정 지을 수 없고 비교할 대상이 없으며 모든 것을 포함하면서 동시에 모든 것을 초월한 무한한 것이며 이미 온전하고 우리가 아는 모든 것들의 총합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6년간 이런저런 수행을 하다가 포기하고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샛별을 보고 문득 깨달음을 얻은 이가 있었는데 그가 깨달은 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본다는 ‘이것‘을 보거나 경험하거나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작품을 보고 있다는 것으로 눈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듯이 그렇게 ‘이것’에 통할 수 있습니다. ‘이것’에 대한 부족한 표현이지만 ‘이것’이 무엇인지 알기를 바랍니다. 간절히.

장소 : 복합문화예술공간 MERGE?
일시 : 2025. 04. 04 – 04.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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