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철교展(아리안 갤러리)_20250311

//평론//
2009년 이전의 정철교 작품들은 “나(실존)-‘나’(실재성)/배경(현실의 정경)-‘배경 없음’(현실 지우기)”라는 구도에서 “‘나’(실재성)/‘배경 없음’(현실 지우기)”를 극대화함으로써 ‘나’의 실재성을 재현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었다. 그후 그가 원자력 발전소 주변으로 작업실을 옮긴 그 짧은 삶의 변화에서 작품은 미학적 재현으로서의 ‘나’(실재성)가 아닌, 실재로서의 나(실존)를 어떻게든 표현하는 쪽으로 이행한 것이다. 사실 이러한 갑작스런 변화는 그가 스스로 뭔가를 깨닫는 ‘자각(自覺)’의 과정이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자각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작가노트’에 “아름다운 마을 풍경과 사람들의 조용한 평화의 삶이 철거되고 망가지고 있어 너무 안타깝다. 한번 건설되면 영원히 없애지 못할 불안한 건축물! 고장 낸 풍경, 고장 난 풍경, 고장 나도 고칠 수 없는 풍경들을 그림으로 그리고 있다.”면서 “붉은 윤곽선은 혈관이고 핏줄이다. 굵은 선은 동맥과 정맥, 가는 선은 실핏줄이다. 멈추고 정지된 풍경에 피돌기를 시도하려 한다. 꽃과 나무, 사람과 집에 활기가 넘치고 생명력이 되살아나도록.”이라 적고 있다.
그가 “불안한 건축물! 고장 낸 풍경, 고장 난 풍경”이라고 한 것은 아마도 2011년 3월 11일,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한 원인이 아니었을까 한다. 이날 이후 그는 단지 풍경의 한 일부였던 원자력발전소가 얼마나 불안한 파괴적 요소인지를 깨닫는다.
그 불안은 삶의 풍경 속에 있었고 그래서 그는 캔버스에서 사라졌던, 아니 지워버렸던 풍경을 다시 불러 들였다. 역설적으로 불안은 풍경을 독립된 하나의 주체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풍경은 인물 뒤에 펼쳐진 배경이 아니라 그 자체로 ‘산 존재’이며, 생명활동의 거대한 순환계라는 인식이었다. 그의 작품에서 거의 의미조차 없었던 ‘배경 없음’(현실 지우기)이 ‘현실의 정경’으로 되살아나 전면적 주제로 부상하는 순간이랄까!

그의 모든 풍경들은 캔버스라는 사각 프레임 안에서 부분적으로 존재하나 그 부분은 무언가를 배제하거나 상실하지 않는 전일성으로서의 전체를 보여준다. 그가 그린 부분들은 전체로부터 해체되거나 분절된 것이 아니라, 전체의 한 부분들을 이어가면서 보여주는 양상이라는 이야기다.
그것들은 그가 사는 곳의 다만 한 부분일 뿐이고, 그곳을 향한 시선에 한해서는 전체다. 또 화면에서는 원자력발전소를 원거리에 두고 있으나, 사실 풍경들은 그 발전소를 기점으로 넓게 퍼지면서 동심원으로 멀어지거나 가까워질 뿐이다. 그러니 그의 회화는 서생이라는 지역적 공간성을 상징으로 하는 하나의 통일적 생명자연론을 보여주되, 그 내부의 암적 존재로서 발전소를 드러내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의 이러한 전일적 회화세계는 동아시아의 설화적 상상력과 신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태초의 천지만물은 거인 반고(盤古)가 죽어서 그 몸이 분화된 것에서 시작한다. 거인신체화생(巨人身體化生) 신화로서 반고의 이야기는 동아시아의 자연관이 전일적 세계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가 죽자 신체의 기관들이 천지만물로 변하는데 음성은 벼락, 왼쪽 눈은 태양, 오른쪽 눈은 달, 머리털과 수염은 하늘의 별이 되었다. 또 그의 신체는 동서남북의 극지와 웅장한 삼산오악(三山五岳)이 되었고, 피는 강과 하천으로 변하였으며 근육들은 도로가 되고 살은 논밭이 되었다. 이 땅의 초목은 그의 피부다.
자, 이제 정철교의 고백과 반고신화를 비교해 보자. 그는 “붉은 윤곽선은 혈관이고 핏줄이다. 굵은 선은 동맥과 정맥, 가는 선은 실핏줄이다. 멈추고 정지된 풍경에 피돌기를 시도하려 한다. 꽃과 나무, 사람과 집에 활기가 넘치고 생명력이 되살아나”는 것이 미학적 지향이라 했다. 서구의 신체화생은 살해와 ‘희생제의’에 있으나, 동아시아의 신화는 온전히 그 몸의 조화로운 분화에 있다. 정철교가 서생의 풍경에서 주목한 것은 ‘불안’과 ‘고장’이라는 자연의 위기, 생명 순환계의 ‘이상 징후’라는 현상만이 아니라, 그것을 다시 어떻게 ‘피돌기’를 하여 되살릴 것인가에 있었다.
그는 ‘고장 난 풍경’을 ‘산 풍경’으로 되살리기 위해 피돌기의 색채를 가져왔다. 붉은 색은 ‘피’ ‘뜨거움’ ‘활기’ ‘생명력’으로서의 피돌기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의 상징은 뜨거운 활기로서 ‘불’이 아닐까 한다. 그는 붉은 선들이 동맥과 정맥이요, 실핏줄이라고 말하지만 화면에서 그 선들은 활활 타오르듯 넘실거린다. 가스통 바슐라르는 ‘불의 시학의 단편들’에서 “우리 안에서 존재는 결코 어떤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긴장의 다양함 속에서 항상 생동하고 있어서 올라가고 내려가며 빛나거나 어두워진다. 불이란 결코 부동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잠잘 때도 살아 움직인다. 체험된 불은 늘 긴장된 존재의 표시를 지니고 있다.”고 했다. 그런 맥락에서 이해하면 정철교의 회화는 시커멓게 타 버리는 현실적 테제로서의 불이 아니라, 생동하면서 살아 움직이는 상징적 테제로서의 불이다. 그러니 그의 회화를 ‘불의 회화’라고 불러도 무방하리라.

정철교의 ‘불의 회화’는 재앙을 불제하기 위한 에너지로 충만해 보인다. 그런 충만함이 고조될수록 그의 회화는 ‘핵(核)’이라는 사귀를 물리치는 치유의 힘이 강해질 것이다. 그의 회화는 지극한 현실에 뿌리를 두고 있으나 그 표현은 그런 벽사의 상징 때문에 더 강렬한 표현주의 형식으로 나아갈지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그 형식이, 그 불의 에너지가 고장 난 풍경을 산 풍경으로 되살리게 될 것이다.//김종길(미술평론가//

장소 : 아리안 갤러리
일시 : 2025. 03. 11 – 04.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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