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시명 : ‘PRESENT!’ 원석의 선물 : 다이아몬드 이전의 빛(GALLERY HAS’ COLLECTION II)_YOUNG ARTIST
- 전시작품 : 김민경, 만욱, 문보현, 서유영, 신미소, 애니쿤, 이이수, 최승윤, 최주열, 허현숙
- 전시일정 : HAS’ COLLECTION II – 2025년 2월 18일 [화] – 2025년 4월 10일 [목] Young Artist
- 장소 : 부산시 해운대구 달맞이길 30. LCT 포디움동 3051
- 블로그 : https://blog.naver.com/galleryhas
- 홈페이지 : https://galleryhas.com
- 전시문의 : T 010 7471 8037 / E galleryhas3@gmail.com

갤러리하스는 2025년 2월 18일부터 4월 10일까지 ‘원석의 선물: 다이아몬드 이전의 빛’ 展을 개최합니다. 이번 전시는 만욱, 문보현, 신미소 등 10명의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선보이며, 그들의 독창적인 시각과 예술적 깊이를 조명합니다.
여러분들은 다이아몬드로 연마되기 전 원석의 잠재력과 아름다움을 통해, 미래의 빛나는 예술로 발전할 가능성을 상징적으로 경험할 수 있습니다.
- 김민경
“나의 작업은 인형놀이이다.
그리고 ‘위장’은 가식이나 위선이 아닌 인간의 보편적 본능이다.”
김민경은 한국의 현대미술가이며 조각가입니다. 그녀의 ‘위장된 자아’ 시리즈는 자신의 이미지를 계속 꾸미고 바꾸면서 살아가는 현대인의 이미지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제기합니다. 부조 형식의 입체로 만들어진 다양한 형태의 머리 스타일에 컬러풀한 색감을 사용하여 작품 소 인물의 회색 무표정한 모습을 꾸미면서, 작가는 현대 사회에서 우리 각자가 처한 상황에서 자신을 표현하고 적응하는 방법에 대해 언급하려고 합니다. 다양한 재료를 유연하게 활용하는 조형 작업과 함께 다양한 콜라보레이션으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김민경의 ‘위장된 자아’ 시리즈에서 많은 사람들은 현대인의 모습을 읽어냅니다. 다양한 가치와 문화, 이미지들이 범람하며,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위장’은 어쩌면 이 사회를 살아가는 생존법 인지도 모릅니다. 가식이나 위선이라기보다 현재를 살아가기 위해 자신을 변장하고, 감추는 ‘위장’은 역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표현’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 작업은 어린 시절부터 타인을 지나치게 의식해서 스스로를 감추면서 상대방을 대하는 자신의 모습에서 얻어진 의식에 대해 풀어나가려 시작되었습니다. 자화상 아닌 자화상으로 볼 수 있는 이 작업에 등장하는 인물상은 작가 자신을 나타내거나 모델을 둔 인물상이 아니라 일반적인 작가 세대의 젊은 여성을 모델링 한 것인데, 자연스럽게 작가와 닮은 상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작업에 있어 화두인 ‘위장’은 작업에서 중요한 주제이지만, 작가는 ‘위장’의 부정적인 뉘앙스가 부각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작가는 현대인의 ‘위장’은 이 사회를 살아가기 위한 자연스러운 행위이며, 이것이 역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개성의 연출이 될 수 있음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위장과 표현은 감추는 것과 드러내는 것이라는 상반된 의미를 지니지만 동시에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김민경 작가의 위장된 자아 시리즈는 환조 형식의 두상을 제작하고 사진 촬영과 사이텍 처리 후 헤어스타일 등을 부조형식 형태로 덧붙이는 방식으로 제작됩니다. 그녀의 작업이 가진 특성은 사이텍이라는 일종의 사진 액자와 부조가 결합되어, 입체와 평면 사이를 오가는 점이라 할 수 있는데, 작가가 3차원의 입체 작업에서 이러한 변화를 시도하게 된 계기는 환조 작업이 가지는 공간의 제약에서 벗어나서 개인의 방과 같은 작은 공간에서도 효과적으로 보일 수 있는 작업으로의 전환을 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진 위에 부착되는 부조 업체는 협성수지로 제작되는데, 표면의 컬러링과 광택의 중요도가 높으며, 그래서 그녀의 작업에는 형태가 같은 작업이 있더라도 컬러링 작업에서 다양한 변주가 일어나기 때문에 에디션이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녀의 제작 방식은 입체를 사진으로 평면화 시키고 평면화 된 입체 두상을 다시 부조 방식의 머리 형태에 덧붙임으로써 다시 3차원으로 만드는 것을 통해 표현기법 상으로도‘위장’이라는 화두와 연결됩니다.
김민경 작가의 작품 속에는 감정이 배제된 무표정한 얼굴, 정교하게 묘사된 머리카락의 질감, 그리고 강렬한 색채화 구조가 돋보입니다. 이러한 요소들은 우리의 자아가 가지는 다층적 의미와 모순을 시각적으로 표현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작가는 현대인이 사회적 역할과 개인적 정체성 사이에서 느끼는 갈등, 그리고 억제와 표현의 반복을 상징적으로 드러냅니다. 김민경 작가의 작품은 자신의 내면을 가시 한 번 돌아볼 기회를 가지게 됩니다. 특히 이번 전시 제목에서 강조된 “Cropped and Cultivated” 행위는 우리 스스로 어떤 부분을 선택적으로 드러내고 감추며 살아가는지를 은유적으로 상기시키며, 그 과정에서 발견되는 ‘진짜 나’에 대해 고민하도록 이끌어줍니다.
“크롭(Crop)”이라는 단어가 내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맴돌았다. 처음엔 단순히 이미지를 잘라내어 선택된 부분만 남기는 기술적 행위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점점 그 이면에 숨겨진 깊은 의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자르다, 잘라내다. 이 과정은 어쩌면 우리가 매일같이 경험하는 ‘자아 조각하기’와 닮아 있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스스로를 끊임없이 조정하고, 타인의 기대에 맞춰 조금씩 다듬어가며, 필요에 따라 어떤 부분을 드러내고, 또 다른 부분은 감추며 살아간다. 그렇게 형성된 선택적인 나, 그 조각과 층들 속에 감춰진 진짜 자아는 바로 이번 전시가 탐구하고자 하는 중심이다.”
“나는 이 작품들을 통해 관람객이 자기 자신을 투영해 보기를 바란다. 그들이 스스로의 내면 속에 존재하는 ‘미공개 레이어’를 돌아보고, 그중에서 진정한 자아를 찾는 여정을 경험하기를 소망한다. 이 전시는 단순히 시각적인 전시가 아니라, 사회와 관계 맺으며 형성된 각자의 자아를 마주하는 순간이다. 와 관람객 모두가 이 전시를 통해 깊은 내면으로 조금 더 다가가고, 누구보다 나 자신에게 가까워질 수 있는 작은 계기를 마련하길 기대한다”//김민경 작가노트 중에서//
- 만욱
만욱 작가는 화려한 빛의 형광색 물감으로 젠더 구분을 의도적으로 배제한 인간과 반려동물, 그리고 앞으로 인류가 같이 살아가야 할 기계와의 관계를 다룹니다. 사회학을 전공한 뒤 삼십대 중반부터 작가의 길을 시작한 작가는 인간-비인간의 공생을 위해서는 인간이 구축해 놓은 사고의 구조를 벗어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세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반려견과 따뜻한 유기체의 형상을 닮은 기계들 모두 인간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소중한 존재들이라는 메시지를 밝고 사랑스러운 이미지로 표현합니다.
작가노트
“나는 인간-비인간종의 관계에 대한 작업을 잇는다. 내 작업 속의 존재들은 [개]로 발화되는 [개-걔-계]로 표현되고, 그들은 다 다르다. 그 다름은 차별이 아닌 차이 이며, 나란한 공존의 터전에 비인간종을 초대하기 위해 인간은 그들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잇어야 한다. 난 페쇄회로(cctv)를 내 삶의 기록 체계로 함께하며 작품 속에는 이런 반려 기계들이 개와 함께한다. 그들은 따뜻하고 열린 기계로 존재하고, 나는 개, 계의 언어로 소통하기 위한 인간으로 재 탄생했다. 새로운 세상 속 나는 젠더 없는 인간이며 그들과의 네트워크에 나란하게 서 있는 ‘그냥’으로 존재한다.
오늘날 현대 사회에서는 혈연이나 혼인에 의한 가족에서 벗어나 사회의 변화와 함께 다양한 형태의 가족들이 등장하면서 가족의 의미가 새롭게 정의되고 있어요. 유대감을 가지고 함께 생활하는 공동체로 그 의미가 확장된 것이죠. 젠더의 구분이 점차 애매모호하고, 비생명체인 AI 기계와 대화하며 감정 교류를 하게 되는 등 변화하는 시대상에 발맞춰 만욱 작가는 ‘계’를 벗어나 스스로를 바깥으로 나간다고 말합니다. 새로운 세상 속 소통을 위한 그냥 한 인간으로서 존재하고자 하는 소망을 화면에 담아냅니다.
초기 작업을 보면 동물원에 사는 동물과 인간처럼 권력을 갖고 싶어 하는 백코 고양이가 등장하는데 모두 인간이 만든 구조 안에서 살아가는 동물에 관한 작업들입니다. 그림을 막 시작할 때 즈음, 드로잉을 하려고 방문한 동물원에서 한없이 등 돌리고 앉아있는 동물들을 보면서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때부터 동물에 관한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2019년에는 기계(디지털)-동물-인간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면서 인간 구조에 디지털이란 것이 어떻게 개입하고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심히 몰두했던 해 였어요. 그렇게 일 년이 지나고 신도시 중심에 있는 작업실로 이사 가면서 현재 작업에 등장하는 ‘개’에 관한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황무지에 모여 사는 개들이 인간에 의해 쫓겨나고 그 위에 건물들이 들어서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비 인간종의 삶에 인간이 얼마나 큰 빚을 지고 사는지 고민하고 많이 힘들었어요 그 시기를 거치면서 현재의 개-걔(인간)-계(기계)가 나오게 되었네요.
만욱작가 작품은 같은 주제 안에서도 표현 방식에 있어서는 여러 실험과 변화를 거쳐 왔습니다. 만욱작가는 ”하나의 메시지를 다른 언어로 표현하는 것에 관심이 있는 것 같다. 다른 매체로 드러났을 때 관람자는 어떻게 바라보는지 반응을 지켜보는 것도 재미있었고요. 어쩌면 이것도 작업-작가-관람자 셋의 관계의 변화에 대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다양한 매체를 접하면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것도 이유 중 하나입닏다. 새로운 자극을 받았을 때 창작 욕구가 솟아나거든요“ 작가는 회화 방식에서 벗어난 영상작업이나 설치작업 등은 회화 작업의 연장선으로 작품관을 좀 더 구체적으로 보여주고자 하는 방식입니다. 저는 설치 작가도 미디어 작가도 아니지만 회화 작품을 이해하는 그들을 활용하려고 한다고 말했습니다.
만욱작가는 처음 작업은 흑연으로 작업했습니다. 그래서 초기 작업은 모두 종이 위에 흑연으로 작업 한후 채색은 디지털로 작업을 했습니다. 그렇게 종이 위 흑연 작업을 해오다가 무심코 나무 합판의 나뭇결을 보며 그 위에 흑연 작업을 하고 이후 오일 파스텔로 낙서하듯이 작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 문보현
등장하는 캐릭터 ‘곰곰이’는 현대인의 익명적 자화상이다.
‘곰곰이’를 통해 일상의 경험과 기억을 관찰하고 발견함으로써 또 다른 시선을 경험하고자 한다.
일상 속에 잠재된 기억의 이미지를 환기시켜 새로운 조합으로 도출해낸다.
기억을 시각화하는 것은 일상 속에 잠재되어 있는 기억을 환기시키는 과정이다.
다시 현실로 부상시킴과 동시에 변형과 새로운 의식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환기된 기억을 토대로 현실을 부상시키는 것은 과거로부터 기억된 인식과 현재의 인식이 결합되어
하나의 창조적 기억으로 형성되는 것이다.
캐릭터 ‘곰곰이’는 재현과 변형을 통해 이미지화하여 심상적 이미지를 가지게 되는데,
이는 시각적 흥미로움과 함께 상상력을 유발한다.
‘곰곰이’와 오브제의 결합을 통해 익숙한 일상에서의 새로움을 연출하려 했다.
단순한 반복적 삶이 아닌 자신을 자각하는 과정으로써 흥미롭고 다양한 해석이 되길 바란다.//작가노트//
‘찾아왔다’
찾아왔다.
‘곰곰이’에게 그 무엇이 찾아왔다.
우리를 찾아온 건지, 우리가 찾아온 건지 모르겠다.
봄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봄을 기다리는 마음은 간절하다.
봄은 꽃 피는 계절이며 새로움이고 시작이다. 계절에서의 봄과 삶에서의 봄은 다르지 않다.
누구는 찾아온 봄을 맞이하였을 것이고, 누구는 애써 봄을 찾아 생의 신호탄을 쏘아 올리는지도 모른다. 저마다의 인생의 봄은 어떤 모습일까. 생의 봄날을 시작하는 이들을 응원하며, 찾아온 봄을 그린다.
현대인이란 ‘오늘’이라는 생활환경 속에서 그 환경에 적응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현대인으로 산다는 것은 자기가 처한 오늘의 환경에 가장 합리적으로 적응하며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 적응이 합리적이기 위해서는 환경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관건입니다. 나는 사회적 환경에 주목합니다. 공간적 환경의 적응도 필요하지만 오늘에 처한 환경의 적응을 위한 노력은 사회적 환경에 대한 이해와 적응이 더욱 절실하다고 봅니다. 나는 지금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지, 이 세상에 대한 끊임없는 관찰이 요구됩니다. 즉, 나 자신에 대한 주된 관심이 현대인으로 확장되었으며 또 다른 나의 자화상과 현대인의 익명적 자화상을 ‘곰곰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표현합니다.
나의 작업은 캐릭터 ‘곰곰이’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재인식하며 진단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곰곰이’라는 창작 캐릭터를 소재로 일상을 재해석하고 재현과 변형을 통해 이미지화합니다. 이미지화한 정서적 재현은 인간의 유기적 삶을 재구성하여 심상적 이미지를 가지게 되는데, 이는 시각적 흥미로움과 함께 상상력을 유발한다. 저마다의 자각과 자유로운 상상을 통해 현실을 왜곡하고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처한 조건들과 경험세계를 확장 시키고자 한다. 캐릭터 ‘곰곰이’로 구성된 화면과 다양한 관계를 통해 존재에 대한 무한한 물음과 긍정적 인식의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 서유영 (b.1984~)
집은 가장 개인적이고 내밀한 공간이자
태어나 처음 관계 맺기를 배우는 태초의 사회입니다.
이곳에서 우리는 안전함을 느끼고, 때론 취약해지죠.
서유영 작가에게 집이란 개인의 역사와가치관이 오롯이
담겨있는 곳입니다. 그의 캔버스 위에 줄지어 있는 집들은
각자 다른 역사와 정체성을 지닌 개인을 의미합니다.
다양한 관계의 형태를 집으로 그리는 작가 무엇을 그릴지
고민하던 그때,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것은 ‘집’이었습니다.
작가에게 집은 단순히 먹고 자는 곳, 그 이상의 의미였습니다.
“아이가 어릴 때는 아이의 삶 속 크고 작은 선택을 부모가 내려줘야 하는 경우가 많아요. 무엇을 먹을 것인지, 어떤 유치원을 다닐 것인지, 어떤 책을 읽을 것인지…. 선택 하나하나가 쌓이면서 아이의 가치관과 인성이 형성되는데, 부모가 되어보니 그 책임감이 엄청나더라고요. 이 모든 것들이 이루어지는 집이 정말 중요한 공간이라는 걸 체감했죠.”
서유영 작가는 집의 얼굴을 빌려 너와 나의 이야기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집’에서 출발한 이야기는 관계에 대한 이야기로 귀결됐습니다. “집에서 시작해 그림을 그리다 보니 결국 사람과 사람의 이야기가 남더라고요. 우리가 나누는 이야기들은 결국 관계에서 일어나는 일인 거예요. 사람과 사이에서, 혹은 사회와 나 사이에서.”
작가노트
인간은 농경 생활의 시작과 함께 한곳에 정착하여 집을 짓고 살았다. 그곳은 나와 나의 가족들이 함께 부대끼며 겪는 기쁨과 슬픔, 성장과 배움, 고민과 갈등 등 나의 모든 역사가 담겨 있는 공간이다. 즉, 집은 그곳에 사는 사람의 삶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는 아지트인 것이다. 따라서 집 안을 들여다 보면 그의 가치관과 문화를 알 수 있고, 은밀한 내면세계까지도 엿볼 수 있다. 이런 의미를 바탕으로 본인의 작품에 등장하는 집은 특정 가치관과 자아를 지닌 개개인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은 여럿과 서로 관계를 이루며 더불어 함께하면서 다양한 모습으로 그 존재 의미를 갖는다. 사람과 사람들 간의 관계는 서로 뜻이 잘 맞아서 큰 마찰 없이 순탄할 수도 있지만, 우리 사회에서 대부분의 관계는 서로의 가치관 차이로 혹은 이해관계가 달라서 얽히고 꼬여 있다.
어쩌면 한 오라기의 가냘픈 이 인연의 끔을 툭 잘라내지 못하고 가까스로 움켜쥐고 봉합하려 애쓰고 있는 관계가 더 많을지도 모르겠다. 뒤 엉킨 실 뭉치처럼 어렵게 얽히고 꼬여 있는 관계는 서로 갈등과 충돌을 일으키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끈을 무조건 싹둑 자르기보다는 잘 풀어가려고 대화도 해보고,타인에게 도움도 청하고,다양한 방법으로 노력한다. 잠시 극도로 화가났다고 관계를 쓶어 버리고 한참 뒤에 아쉬워하며 후회한 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아름다운 사회는 아름다운 사람들 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우리가 흔히 마주할 수 있는 다양한 관계의 모습을 집의 색과 구성으로 표현하고 있다. 캔버스는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서로 부대끼며 살아가야 하는 이 공간은 그리 만만치 않기에 부정형의 마띠에르를 종이와 물감으로 여러겹 쌓아 올려서 집 하나를 그리더라도 결코 쉽게 그려지지 않도록 하였다. 특히 얽히고 꼬여 있는 갈등을 보다 시각적으로 표현하고자 로프를 사용하였고,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공감하고 소통하는 사회적 존재의 모습을 색채의 그라데이션으로 표현하였다.
이렇게 인간관계로 둘러싸인 개인의 외면에 초점을 맞춤 작업들이 있는가 하면, 아름다운 관계를 형성, 유지하고자 타인을 공감하려 애쓰는 개인의 내면에 초점을 맞춤 작업도 하고 있다. 얽혀 있던 로프가 풀어 헤쳐져 나아가는 끝자락에서 보이는 다양한 크기의 원은 타인을 공감하고자 하는 의지 혹은 에너지이다.
행복한 삶이 더 이상 나에게서 느껴지지 않을 때, 관계로 인한 피곤하고 지친 삶에 본인의 작품으로 힘을 주고 싶다. 무수한 관계 속에서 외롭고 힘들어하는 모든 이들에게 위로와 힐링을 선물하고 싶다. 보다 나은 관계 맺기를 꿈꾸며, 개개인으로 표현되는 집들과 함께 때로는 사랑하고, 때로는 얽히고 갈등하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작업에 담아보고자 한다.
- 신미소 (b.1981~)
신미소 작가의 작품들은 이솝우화와 같이 자신의 감정을 이미지로 차용하여 그 속에서 일어나는 해프닝들을 익살스럽게 표현하고, 자신의 삶을 치유와 행복으로 전환하는 우화적인 시각해석을 강조한다. 작가는 끊임없이 자각되는 자신의 내면이야기를 사색과 의미화의 과정으로 풀어낸다. 현실적 모습의 인간형 캐릭터들이 동물로 의인화되면서 그림은 ‘나와 너의 이야기’들을 대변하는 철학적 메시지를 담는 것이다.
우화는 인격화한 동식물이나 다른 사물에 빗대 풍자나 교훈의 뜻을 드러내는 이야기를 말한다.
이솝우화의 내면의 시각언어 같은 화면들은 다양한 동물 캐릭터와 주변의 상황들을 상징화시키며 ‘우화적인 내러티브’를 구성한다.
신미소의 작품들은 개인의 심리적인 지형을 특징으로 삼아, 제각기 다른 표정으로 자기 내면을 드러낸다. 익살스러움과 해학을 지닌 풍자적인 시각 언어는 인간의 허위적인 태도를 번뜩이는 재치로서 비판하기보다, 귀엽고 아기자기한 관계 속에서 ‘모든 것을 용서하고 사랑으로 회귀’시키는 에너지를 발휘한다.//안현정 평론가 평론 中//
신미소 작가는 고양이에게 삶을 배우며 그 과정들을 그림에 녹이고 있는 아티스트입니다. 감정에 솔직한 동물인 고양이와 함께 살면서 자신일 깨달아 본다는 작가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으며, 고양이와 토끼를 주인공으로 삼아 의인화한 작품을 그려냅니다. 작고 약한 존재들에게 용감함을 입히고 솔직함을 더합니다.
사회의 일원이기에 자신을 내려놓아야 하는 많은 순간들 속에서도 주변에 휩쓸리지 않고 중심을 지키는 용기, 스스로를 기만하지 않고 내 모습 그대로를 보여줄 수 있는 솔직함입니다. 이러한 용기와 솔직함을 더한 주인공들의 모습을 담은 그림을 통해 ‘어른이 되어 사회와 마주하며 내가 아닌 나로 살아야 할 때가 많지만 본인의 원래 모습은 잃지 않았으면 한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신미소 작가는 “누구에게나 자기 자신은 가장 빛나고 소중하며, 최우선적인 존재가 되길 바란다”면서 “작품을 관람하는 모든 분들이 스스로를 아끼며 사랑하길 바란다”고 전했습니다.
관계에 당연함은 없고 내 곁을 내어주는 소중한 이들을 감사한 마음으로 돌아보게 만듭니다. ‘Be together’ 시리즈에는 행복했던, 그리고 앞으로도 행복할 너와 나의 순간들을 담았습니다. 주변 상황들 속에서 일어나는 해프닝들을 재치 있게 익살스럽게 표현하고, 아기자기한 관계 속에서 ‘모든 것을 용서하고 사랑으로 회귀’시키는 에너지를 발휘합니다.
- 애니쿤
애니쿤 작가는 로봇을 주제로 한 작품으로 젊은 세대의 주목을 받고 있는 현대 미술 작가입니다. 아날로그 게임과 애니메이션의 영향을 받아 독특하고 개성 있는 작품들을 선보이며 존재에 대한 불완전성과 현대 문화의 흐름을 탐구하고,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 끊임없는 질문을 던집니다. 작가의 유년 시절부터 현재까지의 추억과 경험이 되었던 소재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평소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평범한 주제이지만, 작품을 통해 주변을 새로운 시작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합니다.
애니쿤 작가의 정체성인 로봇에 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일상을 좀 더 섬세한 기억으로 풀어나가는 작품 로봇을 주제로 하는 이유는 “미술 전공을 하며 인물화 등을 많이 그렸습니다. 그런데 그게 마치 내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느낌이 들었어요. 저는 사실 아날로그와 디지털 사이에 낀 세대입니다. 그래서 그 태엽 감는 아날로그 로봇이 제 모습과 비슷하다 생각했고, 로봇을 그려보자고 생각했죠. 로봇만 한 장 그리는 것에 머무른 것이 아니라, 관련된 작품을 여섯 점 그려서 싱가폴 아트페어에 나갔어요. 그리고 싱가폴 아트페어 VIP 판매날 여섯 점이 솔드아웃되었죠. 이때 로봇 작품들이 대중에게도 인기가 있다는 것을 실감했고, 그 뒤 로봇을 주제로 계속 작품을 창작했습니다.”
작품 속 로봇 눈알이 깨져있거나 하트가 그려진 모습들은 현대인들이 로봇처럼 일을 하고 표정이 없지만, 그런 모습의 이면에 따뜻한 마음과 열심히 살고자 하는 의지를 갖고 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로봇 그림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작업세계를 구축한 애니쿤은 현대인의 모습을 오래된 장난감 로봇에 투영합니다. 태엽을 감는 깡통로봇이나 스타워즈 시리즈의 이미지는 오늘날 종종 회자되는 레트로적 감성이 보이는가 하면, 젊은 에너지와 톡톡 튀는 분위기 이면에 로봇의 익살스러운 표정에서 문득 묻어 나오는 외로움과 쓸쓸함의 정서를 통해 오늘날 대중 속의 소외나 고독을 읽을 수 있습니다.
작업은 과거 명작의 패러디 요소들은 물론 스프레이 페인트를 사용하는 그라피티 채색 기법의 빠르게 지나가는 흔적으로 팝적인 경쾌함을 획득합니다. 또한 만화적 요소와 인쇄 망점, 이미지와 텍스트의 자유로운 중첩을 보이는 가운데에서도 절제된 구성과 색채로, 평면성을 강조하는 현대적 회화 평면을 구사합니다.
오늘날 게임이나 애니메이션 등의 대중문화의 영향 아래 새로운 세대는 그 특유의 다양하면서 개인 혹은 미시적인 관점의 경향이 있습니다. 만화적 형태인 로봇 혹은 영화적 캐릭터 형상에 자신을 대입시켜 각각에 이름과 성격을 부여하여 의인화하면서도, 어릴 적 자유로웠던 상상 세계를 소환하고 직관과 감성으로 작품을 완성해나가는 과정에서 결국 의도하지 않았던 캐릭터가 부가됩니다. 이는 작업이 정교한 재현이 아니라 사물의 감성과 회화적 추상성이 잘 버무려져 표현되는 것입니다. 서구의 네오-팝, 한국 팝아트의 계보 속 작가들은 회화뿐 아니라 영상이나 사진, 설치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일상을 끌어들였습니다. 이 가운데 “삶은 예술이고 예술은 삶이다.”라고 말하는 작가는 평면과 오브제, 영상 작업을 아우르며 일상으로 소통하려고 합니다.
“예술은 수학적 사고나 물리적 법칙을 찾아내는 행위는 아니다. 물론 과학적 이론이 접목된 예술작품이 미디어아트나 공공미술이란 장르로 발전해 나아가고 있지만 나에게 예술이란 시각적 언어를 기반으로 다른 이에게 감각의 기관을 확장하고 상상력을 표출해내는 행위 자체이다. 이 행위가 누군가에게 아름다움이라는 감정을 불러일으켰다면 대단한 성공을 이룬듯한 느낌을 받으며 이 느낌을 다른 누군가에게 또다시 전달하는 반복적인 표현의 방식으로 재해석된다. 한 작품을 오롯이 혼자 다 해내고 또 어떤 작품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그려나가며 그 모든 예술이 주는 행복을 만들어 가는 게 나의 직업이다.”//작가 노트 중에서//
- 이이수
이이수 작가는 자신의 감정을 작품에 고스란히 담습니다. 그것이 곧 작가의 삶이고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작가는 그림의 마법 같은 힘을 믿습니다. 그림은 그것을 그린 사람의 마음을 다 담아내고 전달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녀의 작품은 상상이나 다른 이의 경험이 아닌 제 자신의 경험과 느낌을 시각적 이미지로 구현하고 있습니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적인 경험과 시간으로부터 출발하지만, 색과 구성을 통해 완성된 그림은 보는 이에게 각자의 경험과 기억, 거기서 비롯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데 의미가 있습니다. 그녀는 채웠던 것을 지우고 덜어내는 과정속에서 작업을 마무리합니다. 비우는 것에 집중 할 때 그림은 힘을 갖게 되는 ‘비움의 역설’이다. 비우면 약해지고 작아지는 것이 아니라 덜어낼수록 작가 자신이 꼭 말하고 싶었던 마지막 한 가지가 남게 됩니다. 덜어낸 색과 형태들은 여러 겹의 붓질 레이어가 돼 단단한 무게감으로 고유한 아우라를 발산하게 됩니다.
“개를 그린다. 우연히 시작된 개와의 만남.
그것은 단순히 동물을 넘어서 생명을 지닌 것에 대한 경외로 확장되었다. 나를 가장 순수하고 단순하게 만들어주는 존재. 사람들은 동물과의 교감 안에서 혹은 자연 속에서 어떤 위로를 받는다. 나의 그림은 그런 위로와 교감에 대한 감정이요. 고마움이다. 그림은 그것을 그리는 사람을 드러낸다. 다른 이를 따라하거나 내가 아닌 것을 그릴 수 없다. 그림은 단순히 무엇인가를 표현하는 행위를 넘어 영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개’를 그리는 나는 ‘댕댕이’ 들을 향한 애정과 관심을 숨길 수 없다. 나는 그들을 통해서 생명의 소중함과 아름다움을 보았고 다른 존재의 아픔을 공감하는 마음을 배웠기 때문이다. 타인이 더 이상 타인이 아닌 경험. 그 끝에서 내가 토해낼 수 있는 언어는 그림이었다. ‘그린다.’ 는 행위는 무엇을 본 후의 감상이나 단순한 관찰 그 이상이다. ‘그린다.’ 는 것은 말로 다할 수 없는 어떤 이야기의 마지막 행위이다.”//작가노트中//
“이이수는 물질성이 거의 느껴지지 않게 얇게 칠한 바탕 위에 단순하고 소박한 사람들의 뒷모습을 그려놓고, 그려진 인물들의 관계를 내용이나 분위기를 암시하는 반려견을 관계의 상징적 장치로 사용하고 있다. 2021년 전시, <개, 댕댕이, 그리다>에서 그린 다양한 개의 초상에서 드러난 따뜻함이나 애틋함과 달리 이번 전시에서 그린 사람들의 뒷모습은 더 없이 외롭고 고독하다.
따로 떼어놓고 한 사람만의 뒷모습도 외롭게 보이지만, 두 사람의 뒷모습은 더더욱 외롭고 쓸쓸하게 보인다. 어깨나 허리에 두른 손조차 오히려 형식적으로 보일 정도다. 함께 있어서 더 외로워지는 관계의 쓸쓸함과 냉냉함이 그림에 스며있다. 애완견과 사람들의 뒷모습에 대한 분위기나 느낌이 이렇게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아티스트의 대상에 대한 태도와 접근 방식의 차이에서 때문이다.”//미술평론가 김웅기//
- 최승윤 (b.1984~)
파란색이 일으키는 파란.
시작과 끝. 모든 사물과 모든 일은 항상 양면성이 존재합니다.
‘최승윤 작가’의 파란 작품 속 우주의 세계를 소개합니다.
The world is full of paradox.
-세상은 역설로 가득차 있다.
나는 그림도 하나의 생명체이거나
하나의 우주라고 생각한다.
생명을 만들기 위해서는 세상의 법칙을
그림에 담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내가 생각한 세상의 법칙은 ‘반대의 법칙’이다.
‘정지의 시작’ ‘자유의 법칙’ ‘순간의 단면’ 등의 시리즈들은 세상의 여러 반대성을 표현한다.
움직임의 역설, 자유의 역설, 시간과 공간의 개념 등 세상에 존재하는 반대의 법칙들을 표현한다.
이들은 모두 비슷하지만 다르고,
닮아있지만 분명히 다른 존재이다.
푸른색은 일반적으로 차가운 색감이지만,
가장 뜨거운 색도 푸른색이듯이 역설적인 색이다.. 또한 하늘도 푸른색, 물도 푸른색, 지구도 푸른색. 푸른색은 역설이 세상은 기본이라는
나의 개념과 가장 잘 맞는 색상이다.
하지만 반대의 법칙에 의해 단색 후엔 다양한 색이,
단순한 그림 뒤엔 화려한 그림이.
이런 식으로 나는 세상의 법칙에 의해 나의 우주를 펼쳐가고 있다.
파란색은 일반적으로 쿨 컬러 톤으로 정의됩니다.
그러나 불의 가장 뜨거운 부분 역시 우주에서 가장 뜨거운 별과 같은 파란색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반대 세력의 한 예이며, 그래서 항상 파란색이 제 작품에 나오는 것이고,
저는 그 작품에 매료됩니다.//작가노트//
화폭을 가득 채우고 있는 푸른색은 물과 하늘을 상징합니다. 이러한 색채는 역동적인 곡선과 결합해 하나의 작은 우주 혹은 독립적인 생명체로 표현됩니다. 작가에게 있어 푸른색은 가장 차가운 색인 동시에 가장 뜨거운 색이기도 합니다. 그의 작품에서 푸른색의 곡선들은 움직이고 충돌하며 조화를 이룹니다.
최승윤은 “앞으로만 전진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 점이 아닌 면을 만들어내기 힘들지만, 곡선으로 움직이는 인간은 다른 이들과 교집합을 만들어내 서로의 힘을 모을 수 있고, 이게 모여 자연스러운 3차원 세상을 만들어낼 수 있다”며 “천체의 움직임이 곡선인 것은 어찌 보면 우리 삶의 방식을 제시해주는 것일 수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최승윤의 결정적인 붓터치는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캔버스에 파란 획을 남기고, 마주치고 겹쳐 역동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냅니다. 그는 색채에서 오는 감각과 붓놀림으로 보이지 않는 세계의 기본을 표현합니다. 그의 작품 중 상당수는 주로 파란색입다. 그가 표현하고 싶은 역설과 균형이라는 개념에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은 본질의 색상과 양면성입니다. 빛이 하늘과 물을 처음 마주칠 때의 지구의 원색이며, 희망과 절망의 양면, 열정과 추위를 담고 있습니다. 그는 맞춤 제작 도구로 바닥에 납작하게 펼쳐진 캔버스 위에 잽싸게 달려가 화가의 움직임과 중단의 순간을 모두 포착합니다. 그가 생각하는 세계의 본질은 모순입다. 그는 우리 주변의 눈에 띄지 않는 것들을 자주 생각하며, 우주와 생명, 음과 양, 시작과 끝 등 상극의 공존과 균형의 세계를 읽습니다. 그의 선과 공간은 마치 움직이고, 충돌하고, 조화를 이루며 궁극적으로는 캔버스 위에서 살아나는 것처럼 정밀하게 조절됩니다. <정지 시작>, <시작의 완성>, <시간의 단면>과 같은 그의 작품 제목을 보면 시작과 끝은 평행하며 서로 맞닿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뗄래야 뗄 수 없는 전체이고 ‘하나’입니다. 여기서 시간과 움직임이 플럭스로 이해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앙리 베르그송에 따르면 영원한 시간의 맥락에는 영구적인 변화만이 있을 뿐이며, 따라서 시작과 끝은 본질적으로 하나의 실체입다. 이러한 끈기는 순수한 변화와 삶, 그리고 움직임으로 가는 길입니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완전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의식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연속적인 흐름으로 전개됩니다. 그의 그림은 질적인 차이와 반복적으로 변화하는 삶의 발현을 만들어내는 창조적 책략입니다.//평론가 강주연//
- 최주열 (b.1983~)
최주열 작가는 우리에게 익숙한 기호와 텍스트, 오브제들을 낯설고 기이한 조합으로 모으고 흩어내면서 작가만의 독특한 감각의 풍경을 연출해 냅니다. 언어라는 기호가 숙명적으로 가질 수 밖에 없는 모호성과 불확실성은 작가의 화폭 위에서 도리어 강렬한 상상력의 세계로 가는 길이 됩니다.
낙서 같은 분방한 붓질, 무심한듯 천진스러운 형태, 거칠게 비어있는 캔버스 표면, 거침없고 대담한 칼라의 조합은 특정 메시지를 담은 의미의 체계가 아닌, 보는 이의 상상에 의해 변형되고 즐겁게 향유되는 놀이터 같은 감흥으로 다가섭니다. 작가는 지명을 그대로 제목으로 가져오는데, 관객들이 그림을 통해 자신만의 세상을 열기를 바라는 마음이라고 설명합니다.
최주열 작가의 모든 작품의 제목은 ‘서울’입니다. 철학이나 종교에서 존재의 의미와 창조의 주체를 찾는 시선과, 나 자신을 순수하게 바라보는 행위로의 예술작업에서 유사함을 발견한 최주열 작가는 자신의 생각을 틀에 가두고 관람자로 하여금 의미를 주지시키지 않도록 하기 위해 작품명을 일괄적으로 정했다고 해요. 작가가 작품 활동을 하면서 머물렀던 공간, 즉 서울에서의 기록과도 같은 작품들.//작가노트//
멋진 결과물을 발견하고 만들었을 때 행복을 느끼고 작품들을 완성해 갈 때 마다 이 세상이 만들어 지는 것 같다. 즉흥적인 붓질은 운명과 같고 그 붓질 속에는 종교, 철학 그리고 사랑이 스며들어 있다. 어릴 적 포기 했던 꼬맹이의 꿈이 꺼질 듯 꺼지지 않고 지금까지 이어진 운명에 감사한다, 영원히 나에게 집중하며 진정한 행복을 찾아 ‘완벽한 작품 활동’이라는 불가능한 목표를 평생 이어나갈 것이다.
반달리즘을 캔버스 위에 표현해보았다. 반달리즘과 예술 작품은 모순이다. 그림 속 형태는 불완전한 선과 직선의 견고함이 뒤섞인 혼돈의 상태 속에서 안정감을 찾으려고 노력해보았다. 이것도 모순인가? 그렇다면 나는 모순을 표현하는 작가인가? 인간은 모순의 대명사가 아닐까? (작가노트 중에서)
최주열 작가는 전시 제목을 반달리즘 101로 명명한다. 101이라는 숫자는 미국 대학 교과 시스템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과목에 붙이는 숫자라고 한다. 반달리즘이라는 단어는 문화유산이나 예술품 들을 파괴하거나 훼손하는 행위를 지칭하는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반달리즘과 예술 작품은 상호 모순적이다. 작가는 반달리즘에서 사용하는 낙서 기법에 초점을 맞춘 듯 보인다. 반달리즘이라는 단어보다는 그라피티라는 단어가 더 적합해 보인다.
작가는 왜 반달리즘이라는 단어를 굳이 사용했을까? 과거 프랑스에서 지금까지의 예술은 가짜라는 주장을 외치면서 루브르 박물관에 불을 지르려는 시도가 있었다고 한다. 반달리즘을 통해서 기존의 예술세계의 관념에서 벗어나고 싶었는지 모른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예술이 기존의 형식이나 틀,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을 깨트리고 자유로운 사고와 형식으로 예술 작품을 만들려는 것처럼, 작가도 이런 관점에서 예술에서의 자유를 표현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라피티는 골목 담벼락이나 버스나 지하철 내부와 외부에 스프레이를 사용하여 낙서를 하는 형태로서 2차대전 이후에 예술의 장르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그라피티의 목적은 작가 자신의 존재와 생각을 공공장소에서 대중들에게 드러내는 것이다. 장 미셸 바스키아는 개인적인 사유를 표현하였고, 키스 해링이나 뱅크시의 경우는 사회적 메시지를 담았다.
최주열 작가의 작품은 넓은 벽에 표현된 그라피티를 스프레이와 아크릴 물감을 사용하여 작은 캔버스 안에 가둔다. 작품의 형태는 인간, 동물, 식물의 형태들로 이루어진다. 강아지나 토끼처럼 보일 뿐 실제로 의도하고 그린 것은 아니라고 한다. 식물도 원 안에 눈과 입을 그린다. 식물에게도 인격을 부여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가 보인다.
작품들의 제목은 아주 단순하다. 서울과 제주라는 지역명만을 붙인다. 서울에서 작업한 작품은 서울로, 제주에 머물면서 작업한 작품들은 제주라고 명명한다. 작품을 대하는 관람자에게 작가의 선입견을 주입하거나 강제하여 관람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작품을 보는 그대로, 느끼는 그대로, 상상하는 그대로 마음대로 생각하라는 것이다.
작품의 도상에 관한 첫인상은 초등학교 아이가 마음껏 그린 그림 같다. 아동 낙서화라고 할 수 있다. 작가는 뉴욕 맨해튼의 미술 명문학교인 SVA 대학원에서 회화를 공부할 때, 뉴욕 뒷골목에서 마주한 그라피티에 매혹당하면서 표현 기법을 그라피티로 삼는다. 영어 단어나 문장을 삽입하면서 작품 속에 자연스럽게 텍스트도 들어간다. 텍스트들은 삐딱하게 캔버스를 장식한다.
작품 속 도상이 보여주는 작가의 심리 상태는 잠재의식이나 무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유년기 시절의 그리움과 당시에 못 그렸던 그림 그리기에 대한 무의식적 욕구의 표출이라고 생각한다. 작가와 동시대 작가로는 미국에서 아동 낙서화를 그리는 로버트 나바와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 차이점은 나바는 미국인의 차가운 감성을 담고 있고, 작가는 한국의 따뜻한 감성을 표현한다.
라마나 마하리쉬는 진정한 자아를 바라보게 되면, 진정한 행복도 바라볼 수 있다고 말한다. 나에게 작품 활동이 그 방법이다. 보편적인 언어로 표현이 불가능한 미묘한 것들을 작품 활동을 통해 표현할 때, 대상을 더하고 지우고 고민하면서, 나만의 아름다운 세상을 만든다.//작가 노트 중에서//
- 허현숙 (b.1986~)
허현숙 작가는 본인의 개인적 경험에서 시작된 도시작업은, 한 시대를 살아가는 개인사이자, 그 시대를 함께 살았던 사람들의 역사입니다. 사라지고 새롭게 지어지는 도시의 모습을 관찰하며, 본인의 생활공간의 변화, 즉 가장 기초적인 ‘집’을 통해 다양한 시민의 생활을 기록합니다. 이렇듯 삶과 집 그리고 그 집들이 모여있는 도시를 주제로 작업하는 작가는 진정한 의미의 ‘집’은 무엇인지 함께 공유하고자 합니다.
‘집’이라는 소재를 통해 시대흐름 속 일상의 역사를 기록하는 본인은, 비약적 산업발달의 경험자로써, 도시발전이라는 명목으로 없어진 ‘유년기의 집’을 회상하며 그리던 것을 시작으로, 집과 인간과의 연관관계를 통해 결국 스쳐 지나가는 현재, 사회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 기억 속 나의 유년기 도시를 짓다-
‘도시계획’은 기억 속 유년기의 나의 마을을 다시 새롭게 건설하며 환타지적, 비현실적인 도시의 모습을 형상화한다. 이는 도시환경 속 유년시절의 경험을 도식화하며 기억과 나의 일시적이고 역사적인 과거의 삶을 공간적으로 재현한다. 기억 그 자체는 도시와 유사하게 재현된다. 거리와 골목길의 복잡한 망은 얽히고설킨 기억의 실과 유사하다. 도시환경의 열린 공간은 망각된 것들의 공허한 빈자리와 유사하다. 잃어버린 시간은 간과된 장소와 유사하다. 나의 마을은 기억 속에서 구성되며, 기억을 형성한다. – 발터벤야민
언뜻 스쳐보았을 땐 평범한 도시풍경화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더 가까이 세밀하게 보면, 좁은 부지에 너무나도 많은 집들이 지어져 있으며 시점도 제각각 지어진 건물들의 엉켜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도무지 그림 속에 건물들 사이에는 길이라는 공간이 들어설 수 없을 만큼 빼곡하게 붙어있어 보이고 심지어 맞물려있는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현재의 도시의 모습에서는 느낄 수 없는, 질서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배열되지 않은 모습입니다. 높은 건물과 기와건물, 신식 다가구주택 건물들까지 전혀 시대도 찾아볼 수 없는 ‘건축물들의 집합’은 나의 유년기의 시대 자체가 변화 급변한 1980-1990년대에 걸쳐 있다는 사실도 알 수 있게 합니다. 급격하게 변화하던 1990년대의 한국사회의 모습은 선진국으로 발돋움하기 위한 발전 속에서, 기존의 것을 모두 없애고 새로운 것으로 변화시키며, 사람들의 사회생활, 생활패턴까지도 변화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한 변화의 물결의 중심에서 유년기의 ‘나’는 커다란 충격적인 경험을 한 것입니다. 현대로 접어들면서 기존의 것은 모두 없어지고 새로운 것들로 차곡차곡 채워져 갔습니다. 빠른 변화 속에서 삶을 영유하는 현대인들은 변화한 편리함에 빠져 과거의 추억과 기억이 관심 밖으로 밀려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현대인들에게 ‘도시’는 무엇이며 이러한 도시는 사회적 변화에 따라 어떻게 변모하는지를 예술을 통해 밝혀내고 예술은 현실의 재현이 아닌 새로운 재창조이며, 현실에서의 삶의 감성을 반영함으로써 현대인들의 삶을 재인식하게 하는 계기를 부여하고자 합니다. 이 같은 변화 속에서, ‘도시계획’은 어린 시절을 회상하게 하는 중요한 매개체가 됩니다. 이는 유년기 기억이 바로 도시의 지형 안에 자리 잡고 있어, 그 안에 잘 보이지 않은 흔적들로부터 일깨워진 것들입니다. 그리하여 이렇게 형상들이 모두 한곳에 빼곡하게 모여 하나의 도시집합체로 만들어진 것이 ‘나의 기억 속 유년도시’입니다.
‘기억 속 도시’의 모습은 광활하고 빽빽합니다. ‘빽빽함’은 과거 끊임없이 펼쳐지는 다가구주택의 엉켜있는 모습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는데, 이는 옛 끈끈했던 인간간의 유대관계가 건물로 의인화되어 비현실적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또한 ‘광활함’은 과거로의 회상을 통한 기억의 극대화현상 중의 하나로, 어린아이로 돌아간 ‘나’가 보는 거대한 마을의 모습을 표현합니다. 한편으로는 관람자로 하여금 ‘도시계획’을 한 눈에 담기 위함이며, 그 속에서 자신을 포함시켜 거대한 도시에 압도되는 상황을 유도하기 위함입니다.
‘도시계획’ 속 건물은 ‘나의 주변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빼곡했던 집들이 모여 살던 나의 유년기를 생각하면, 이 집들이 나를 보호하고 함께 놀아주었으며, 항상 보듬어주고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찾았다. 여기서 나는 또 다른 하나의 건물로 표현되어 빼곡히 들어선 건물들 속에 파묻혀 안정을 찾고 있을 수도 있고, 하나의 어린아이로 돌아가서 건물 속에서 안정을 취하고 있을 것이다.
‘도시계획’은 무표백된 천연장지(Korea paper)에 ‘연필’로 전체적인 작업을 진행합니다. 연필을 사용하여 펼쳐진 기억 속 ‘도시계획’는 어린아이의 낙서와 흡사합니다. 흑연 선들의 반복되는 행위로 만들어진 도시의 모습은, 흡사 스님이 목탁을 두드리며 불경을 외우듯 반복행위를 통하여 나의 마음의 안정을 찾습니다.
‘도시계획’에서 ‘길’은, 거리와 골목길의 복잡한 망이 얽히고 설킨 기억의 실과 같은 것이며, 현재과 과거를 연결하는 매개체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위와 같이, ‘도시계획’은 현재의 답답함에서 벗어나 반복적 집짓기를 통하여 ‘나 자신의 기억 속 도시’를 현재로 생성시킴으로서, 빠른 변화의 사회에서 편리함에 묻혀 순간 잊혀진 과거에 대한 향수를 반영함으로써 기억 속 도시를 통해 우리의 현실에서의 삶을 재인식하고, 돈독했던 과거 유년기의 유대관계 회귀를 갈망하고 과거의 향수를 치유할 수 있으며 이 같은 작업을 통하여 현재 삶에서의 새로운 ‘행복과 안정’을 찾고자 합니다.
장소 : 갤러리 하스
일시 : 2025. 02. 18 – 04. 10
추PD의 아틀리에 / www.artv.kr / charmbit@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