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향展(갤러리 림해)_20241007

//전시 평론//
이미향의 작품세계
글 / 이영재(미술평론가)

이미향의 작품들은 강한 추상성을 띠고 있다. 이러한 추상성은 반복적인 패턴과 생동감있는 리듬이 함께한다. 그와 같은 추상성으로 충만한 작품 속에는 형식주의적 논리에 의한 화면의 전개 보다는 오히려 작가 자신이 경험해온 세계와의 끝없는 피드백이 이루어지고 있다. 왜냐하면 이 작가가 작품을 전개해온 과정은 추상성 그 자체에 대한 수학적이고 형식론적 접근보다는 오히려 반복적인 작업과정 속에 작가 자신의 꿈과 상상력, 어렸을 적의 추억, 의식의 흐름 등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미향의 작품들을 대할 때 우리는 미국과 유럽의 추상표현주의 페인팅에 대한 논리 보다는 오히려 작가 자신의 내면적인 의식 혹은 무의식의 세계와 연관을 시켜보는 것이 더 요점적일 수 있을 것이다.

예술에서 의식의 세계와 무의식의 세계는 프로이드가 말한 것처럼 딱 부러지게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완전한 의식의 표현인 것처럼 여겨지는 과학 언어와 달리 예술은 분명하기는 하지만 명확하지 않은 표현으로서 반은 의식적 표현이기도 하고 반은 무의식적 표현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은 밖으로 표출되기 이전의 내면에만 간직되어 있는 꿈이나 상상의 세계 보다는 좀 더 분명한 세계이다. 즉 예술은 과학과 표현되기 이전의 상상력이나 꿈 사이의 중간지대에 놓여있는 정신활동인 것이다.

이미향에게 있어서 이와같은 작품들에 깃들어 있는 내면적인 의식 혹은 무의식의 세계는 대체로 반복적인 리듬을 띤 패턴으로 전개되고 있다. 반복적인 리듬과 사이클은 우리가 일상과 세계와의 관계에서 늘 부딪히는 것들이기도 하다. 여름이 가면 겨울이 온다. 좋은 시절이 오다가도 때로는 불운에 휩싸이기도 한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자연에서 뿐만 아니라, 금융시장과 같은 경제의 세계에서도 존재한다. 그것은 또한 음악에도 존재하며, 음악에서도 리듬은 음악의 근간이며, 특히 재즈에서의 반복되는 리듬은 우리를 마치 미지의 우주세계로 끌고 가는 듯 한 느낌을 주게 된다. 사실상 이러한 반복적인 리듬과 사이클은 우주 삼라만상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주역은 이러한 사이클의 순환을 우주적 견지에서 파악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의 삶에 있어서 이러한 리듬과 사이클은 좀 더 넓게 세상을 바라볼 때만 비로소 감지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시야가 좁은 사람들은 새로운 예기치 못한 사건이 터지면 늘 세상이 끝날 것처럼 요란하게 야단법석을 떨기도 한다. 하지만 현자는 어떤 사건이라도 늘 어떤 일정한 카테고리 속에 그러한 사건을 가둘 수 있다. 최근 발생한 Covid-19도 예기치 못했던 별종의 사건인 것 같지만, 이러한 유형의 사건은 좀 더 길게 보면 1900년대 초기의 스페인 독감이나 중세의 페스트와 같은 카테고리에 집어넣을 수 있다. 넓은 시야로 본다면 우리는 Covid-19로 인한 팬데믹은 결코 영원히 지속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고, 언젠가는 다시 자유롭게 여행도 하고 지인들과 종종 모임도 가질 수 있는 시절이 다시 올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된다.

이미향의 작품에서 보이는 반복적이며 추상적인 패턴들은 이러한 우리들의 일상과 세계의 순환과 반복 그리고 사이클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대부분의 작품들은 밤하늘의 무수한 별들을 보듯 우주적이며 무한한 반복이 되풀이되고 있으며, 그 속에서 어떤 영원성을 암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 작가에게 있어서 이러한 패턴의 반복은 우주론적 거대 담론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한 지극히 소박한 세계로부터 비롯되고 있다. 즉 그러한 패턴들은 선험적이라기 보다는 어렸을 때 원초적으로 세계를 마주 대했을 때의 경험으로부터 비롯되고 있는 것이다.  

이 작가의 독백 속에는 그러한 점이 보다 분명해지고 있다. 이 작가는 스스로의 독백을 통해 이러한 작업을 하면서 어린 시절 집 앞 마당에서 나뭇가지로 그림을 그리던 추억이라든가, 들길을 걷다가 어떤 작은 들꽃을 꺾어서 향기를 맡아보기도 하고, 씹어서 맛을 느끼기도 하고, 머리에 꽂아 보던가 손톱에 물을 들이던 추억들을 연상했다고 한다. 그것은 의식적인 행위들이라기보다는 무의식에 가까운 자연과의 원초적 조우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러한 소박한 출발은 결국은 본인자신도 모르게 어떤 우주론적 목적성을 향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 추억과 향수는 화면 속에 용해되어 마치 생성과 소멸의 연속처럼 반복적인 패턴으로 무수히 전개된다. 그것은 추상미술의 논리 그 자체 보다는 추상적 작업에서의 여러 무의식적인 행위들 이를테면 물감으로 으깨기, 이기기, 섞기, 찍기, 뿌리기, 깎아내기 등을 통해 작가 자신도 예상하지 못한 전혀 새로운 세계를 펼쳐지게 한다. 그러한 일련의 작업들은 매체만 다를 뿐이지, 어렸을 적의 땅바닥에 나뭇가지로 그림을 그리거나, 들길을 걷다가 꺽은 어떤 꽃의 향기를 맡거나 혀로 맛을 느껴보거나 손톱에 물을 들이거나 하는 행위와 매우 유사한 것이다.

언필칭 무미건조하고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 같은 이러한 행위는 우리가 예상하지 못했던 놀라우리만큼 다양성과 통일성을 지닌 새로운 화면의 출현으로 그 보상이 이루어지고 있다. 지극히 단순하고 아무런 생각없이 묵묵히 전개되는 작업의 결과는 미리 계획되었다기 보다는 무상무념의 세계 속에서 작업된 결과로서 나타난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본다면 이 작가에게 있어서 이들 작업의 동력은 어릴 적의 원초적 표현행위와 유사한 그 무엇으로부터 나온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작업의 최종 결과물은 어릴 적의 원초적 표현행위와 반드시 동일한 것이라고 볼 수만은 없을 것이다. 어릴 적에 땅바닥에 나뭇가지로 그림을 그리던 행위와는 달리 물감과 캔버스라는 매체를 사용한다는 것은 그러한 작업의 결과를 영원히 저장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들 저장된 표현물은 이제 미술계라는 네트워크 속에 피드백 되고자 하고 있는 것이다.//이영재//

//작가 노트//
 반복적인 패턴과 생동감 있는 리듬으로 이루어진 나의 작품 속에는 내 어린 시절의 추억, 꿈, 상상력, 의식의 흐름 등이 담겨 있다. 작품 속에서 추억과 향수는 화면 속에 용해되어 생성과 소멸의 연속처럼 반복적인 패턴으로 무수히 전개된다.

그 중 원형의 캔버스 위에는 다양한 컬러로 크기와 두께가 다른 자유로운 선의 표현으로 나의 마음을 투영한 달을 형상화 한 것이다. 형식이나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수없이 반복된 채색작업으로 더욱 더 깊이를 형성되게 하면서 나의 마음속 심상들과 풍경들을 미술의 매체 속에 영원히 남길 수 있게 되었다.  

수없이 쌓아 올리고 깎아 내어 구성된 다양한 틀, 이는 작업과정의 리듬과 사이클로써 고된 삶과 고차원적 문명의 발전에 적응해 가려 애쓰고 있는 나의 내면적 모습과도 흡사하다. 또한, 무한한 반복이 되풀이 되는 이러한 몰입의 과정은 침묵의 힘처럼 성숙되어 현대인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필요한 과정이라 생각된다.//이미향//

장소 : 갤러리 림해
일시 : 2024. 10. 07 – 10. 27

추PD의 아틀리에 / www.artv.kr / charmbit@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