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철민展(아트스페이스 이신)_20240217

//작가 노트//
I.
지금껏 내가 읽은 은미는 수렴되는 의미로서의 은미이다. 내가 사진으로 고찰하고 체취한 은미 이미지는 삶에서 죽음으로 이행되는 명쾌한 프로세스의 한 지점에 있는 은미였고, 그것을 퉁쳐서 여지껏 ‘부재지향’으로 읽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미처 담기지 않는 은미가 있다.
‘이름_너머의 은미隱味’는 이미지나 언어로 드러나는 의미를 넘어선 은미에 관한 것이다. 즉 시각적 동결의 순간적이고 불완전한 재현을 넘어선 은미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는 사건 자체로서의 은미, 동사로서의 은미이고, 날 것으로서의 은미에 대한 전시이다.
우리 일상의 문화는 모든 것을 보이는 것, 확인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고 이름 붙인다는 점에서 실증주의적이다. 그리고 모든 언어와 이미지가 실제를 반영한다는 허위를 강요하는 나르시즘의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양태는 실재를 언어나 이미지의 틀 내로 한정시킴으로써 변형과 변질을 가져온다는 점에서 불완전하고 심지어 위험하다.
은미는 정의할 수 없는 진행 중인 사건이다. 그렇기에 나는 한정의 틀 밖에 서있는 은미를 고찰하고 말하는 방법으로 침묵을 선택한다. 침묵은 나와 대상이 한정의 바깥에 서는 것으로, 탈존과 외존의 사건이 전개되고 인지되는 터攄라고 보기 때문이다.

Ⅱ.
지시 혹은 재현을 위해서는 세 가지의 동일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대상의 동일성, 주체의 동일성, 장場의 동일성이 그것이다. 브레그송, 들뢰즈를 굳이 인용하지 않아도 시간위에서 부유하는 그것들의 동일성을 확신하기는 어렵다.
전통적인 의미에서 사유의 기본적인 목적은 이 세계의 본질이나 법칙을 드러내는 것에 있다. 그런데 동일성이 유지되지 않는 그 대상, 주체, 장이기에 무엇을 지시하거나 재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지시와 재현은 기호의 이상이다.
사진을 포함한 기호는 애초에 불가능한 목적에 복무한다. 세 가지 동일성을 뿌리채 흔드는 시간을 ‘공간화함으로써 우리 사회는 이를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편안함에 만족한다. 시작과 끝에 대한 정의를 포기하고, 끝없이 변화하는 ‘생성’과 ‘사건’으로 사고할 때 비로소 이 세계를 온전히 사유할 수 있을 것이다.//오철민//

장소 : 아트스페이스 이신
일시 : 2024. 02. 17 – 0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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